레스터 시티의 감독 클라우디오 라니에니와 주장 웨스 모건이 지난 7일(현지시각) 영국 킹파워 스타디움에서 열린 에버턴과의 경기가 끝난 후, 영국 프리미어 리그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레스터 시티의 감독 클라우디오 라니에니와 주장 웨스 모건이 지난 2016년 5월 7일(현지시각) 영국 킹파워 스타디움에서 열린 에버턴과의 경기가 끝난 후, 영국 프리미어 리그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연합뉴스/EPA


어린 시절에 감동적으로 접했던 동화나 우화들이 나이가 들어서 다시보면 굉장히 무섭거나 잔혹한 이야기였음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인어공주는 한마디로 사랑에 상처받은 여인이 자살하는 스토리이고, 빨간 구두에서는 소녀의 발이 잘리게 되며, 톰과 제리나 아기공룡 둘리는 어렸을 때 보면 제리나 둘리를 좋아하지만 나이 들어서 보면 톰과 고길동의 처지에 오히려 동정심을 느끼게 되는 식이다. 이처럼 겉보기에 아름다운 동화도 그 이면에 담아내고 있는 현실은 잔혹한 경우가 더 많다.

축구에서도 잔혹 동화가 있다. 바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레스터 시티의 경우가 좋은 예다. 레스터는 지난 2015-16시즌 구단 역사상 133년 만의 첫 1부리그 우승이라는 대업을 이뤄냈다. 이전까지 레스터는 잉글랜드에서도 변방에 가까운 중소 구단에 불과하며 1, 2부를 오락가락한 팀이었다. 레스터는 전통의 명문이 맨유나 첼시, 맨시티 등 쟁쟁한 부자클럽과 달리 이렇다 할 대형 스타선수나 자본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도 현대축구에서 우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는 점에서 더 '동화같은 우승'으로 주목 받았다.

레스터의 동화같은 우승, 그 이후의 반전

하지만 레스터 동화의 후일담은 반전의 연속이었다. 레스터는 2016-17시즌 한때 강등권으로 추락하며 힘겨운 싸움을 펼쳐야 했다. 급기야 지난 2월 24일에는 레스터에 창단 첫 우승을 선사한 이탈리아 출신의 명장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이 성적 부진에 책임을 지고 경질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레스터의 우승 동화가 1년도 안 되어 비극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설상가상 라니에리 감독의 경질을 둘러싼 논란은 선수단과의 불화설과 고의 태업설로까지 번지며 거센 후폭풍을 불러왔다. 제이미 바디, 웨스 모건, 카스퍼 슈마이켈 등 레스터의 주전 선수들이 라니에리 감독과의 불화로 구단에 감독 경질을 요구했다는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졌다. 이들은 모두 라니에리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리그 정상급으로 성장한 선수들이다.

레스터 시티, 올 시즌 리그 우승 확정  2일(현지시간) 영국 레스터에서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 첼시 FC와 토트넘 홋스퍼 FC의 경기가 무승부로 종료되면서 리그 우승이 확정된 레스터 시티 FC의 팬들이 환호하고 있다. 

승점 77점으로 리그 선두를 달리던 레스터 시티는 이날 리그 2위인 토트넘이 첼시와 2-2로 비기면서 승점 70점이 돼 남은 경기 결과에 관계없이 올 시즌 우승을 확정지었다.

지난 2016년 5월 2일(현지시간) 영국 레스터에서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 첼시 FC와 토트넘 홋스퍼 FC의 경기가 무승부로 종료되면서 리그 우승이 확정된 레스터 시티 FC의 팬들이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EPA


당사자들이 적극적으로 부인하고 나섰음에도 여론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잉글랜드 현지 언론에서는 이들에게 '레스터 내부의 적' '뱀' 같은 표현을 썼으며, 라니에리 감독의 모국인 이탈리아 언론에서는 '배신자'라고 지칭할 만큼 주축 선수들의 항명과 태업설을 사실상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반 년 전 라니에리 감독과 선수들이 우승컵을 치켜들며 함께 환호하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축구팬들로서는 감동 동화의 환상이 무너지는 씁쓸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하필 라니에리 감독 경질 이후 레스터가 갑작스러운 상승세를  타면서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공교롭게도 레스터는 라니에리 감독이 물러나자마자 3연승을 내달렸다. 이 기간 레스터는 가호로 꼽히는 리버풀을 잡았고, 강등권 경쟁자인 헐시티를 제압하며 중위권으로 도약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레스터는 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에서 세비야를 2-0으로 제압하며 1차전 패배(라니에리 감독의 고별전이기도 했던)를 뒤집고 구단 역사상 첫 UCL 진출에 8강행까지 오르는 새 역사를 썼다.

이러한 '극적인 반전'에 레스터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시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일단 결과적으로 라니에리 감독을 교체한 효과가 팀의 분위기 전환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레스터는 라니에리 감독이 물러나기 직전 10경기에서 1승 2무 7패의 부진을 겪으며 침몰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2월 들어 FA컵에서 탈락했고 챔스 16강 1차전도 고배를 마셨다. 레스터는 지난 시즌 우승 당시 보여줬던 끈끈한 스피드와 역습이라는 색깔이 실종된 상태였다.

감독 경질 이후에 제자리 찾은 레스터

하지만 라니에리 감독이 물러난 이후 레스터는 거짓말처럼  제자리를 찾았다. 리버풀 전에서 멀티골을 넣은 바디나, 세비야 전에서 환상적인 선방으로 UCL '이 주의 선수'까지 선정된 슈마이켈처럼 논란의 중심에 서있던 주축 선수들이 연승 행진의 주역이었다는 점도 아이러니하다. 한동안 라니에리 감독의 빈 자리를 그리워하던 여론도 잠잠해지면서 레스터 선수들의 투혼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간 레스터의 부진이 '태업' 때문이었음이 결국 증명되었다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다. 현재 레스터는 수석코치였던 크레이그 셰익스피어 감독 대행이 지휘봉을 잡고 있는데 사실 라니에리 시절에 비하여 기존의 전술이나 선수 구성에서 큰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감독교체 효과가 선수단에 어떤 식으로든 자극을 줬고 셰익스피어 대행이 팀 분위기를 잘 추스른 영향도 있겠지만, 라니에리 경질 이후 극과 극이라고 할 만큼 순식간에 달라진 경기력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물론 진실은 당사자들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레스터 선수들이 라니에리를 의도적인 몰아낸 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은사이자 우승 감독을 벼랑 끝으로 몰았다는 오명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남은 기간 그야말로 죽을 힘을 다해 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라니에리 감독이 자신이 떠난 이후 레스터의 환골탈태를 과연 어떤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을지도 묘한 대목이다.

어떤 면에서는 과정이야 어찌됐든 결과가 중요하다는 승부의 세계의 냉정한 면을 보여주는 순간이기도 하다. 많은 의혹과 반전, 숨겨진 뒷이야기를 품은 채 레스터의 미스터리 동화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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