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축복인 시절이 있었습니다. 세계 대전 등 큰 전쟁을 치르고 난 직후에 나타났던 베이비붐 시기가 바로 그런 때였습니다. 전쟁으로 가족이나 친구를 떠나 보낸 수많은 사람들은, 새로 태어난 생명을 돌보면서 과거의 상처를 차츰 잊고 희망찬 미래를 꿈꾸곤 했지요.

영화 <파도가 지나간 자리>의 배경이 되는 시기 역시 그렇습니다. 1차 대전 직후, 전쟁터에서 돌아온 톰(마이클 패스벤더)은 호주의 외딴 섬 야누스의 등대지기로 자원합니다. 특유의 성실성과 꼼꼼함을 인정받아 정식 직원으로 채용된 그는 섬에서 가까운 마을에 사는 이자벨(알리시아 비칸데르)과 사랑에 빠집니다.

기회가 날 때마다 편지를 주고 받으며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한 두 사람은, 결국 결혼하여 야누스 섬에 신혼 살림을 차리게 됩니다. 너무나도 행복한 날들이 계속되지만 그들에겐 문제가 있습니다. 아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자벨은 두 번이나 유산을 겪으며 깊이 상심하고, 톰은 그런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보지요.

두번의 유산 후 찾아온 사건

 <파도가 지나간 자리>의 한 장면. 1차대전 참전 용사인 톰(마이클 패스벤더)는 외딴 섬의 등대지기로 자원하고, 근처 마을에 사는 이자벨(알리시아 비칸데르)와 결혼하게 된다.

<파도가 지나간 자리>의 한 장면. 1차대전 참전 용사인 톰(마이클 패스벤더)는 외딴 섬의 등대지기로 자원하고, 근처 마을에 사는 이자벨(알리시아 비칸데르)와 결혼하게 된다.ⓒ CGV아트하우스


그러던 어느 날, 바다를 표류하다 섬으로 떠밀려 온 보트 안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아기와 죽은 남자가 발견됩니다. 톰은 조난 사실을 신고해야 한다는 자신의 의무를 떠올리지만, 아기를 돌보며 너무나 기뻐하는 이자벨을 바라보며 주저합니다. 결국 두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남자를 땅에 묻고, 아이에게 '루시'라는 이름을 붙여 그냥 키우기로 결심합니다.

중반부까지 이어지는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어떤 멜로 영화보다도 로맨틱합니다. <블루 발렌타인>(2010)나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스>(2012)에서 보여줬듯이, 연인들 사이의 멜로 감정을 표현하는 데 강점이 있는 감독 데릭 시엔프랜스는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합니다. 야누스 섬과 그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담아낸 촬영, 듣는 사람을 설레게 만드는 편지 구절들, 사랑이 꽃피는 과정을 효율적으로 담아 낸 몽타주 시퀀스 등이 돋보이지요.

특히, 이 영화를 찍으면서 실제 연인으로까지 발전한 마이클 패스벤더와 알리시아 비칸데르의 연기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내면의 갈등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능력이 뛰어난 마이클 패스벤더와, 감정을 거리낌 없이 활기차게 드러내는 것이 강점인 알리시아 비칸데르의 연기는 상반된 스타일이지만 굉장한 시너지를 내거든요. 두 배우의 팬이라면 필히 챙겨 봐야 할 작품입니다.

원작과 영화 사이

영화의 원작 소설 <바다 사이 등대>(The Light Between Oceans)(2012)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 40여개국에 출간되었고,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도 오른 히트작입니다.

톰과 이자벨의 진실한 사랑과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 그리고 그들의 위태로운 선택이 초래한 윤리적 딜레마를 다룬 것이 성공 요인이었죠. '다른 사람의 불행을 기초로 한 행복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도덕적 당위를 위해 굳이 현실의 행복을 포기해야 하는가?' 같은 본질적인 질문들은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에 비하면 영화는 그런 딜레마를 원작만큼 효과적으로 다루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원작처럼 루시의 생모 한나(레이첼 바이스)의 존재를 알고 고민을 거듭하던 톰의 내적 갈등과, 그가 내린 '올바른 결정'이 후반부의 갈등 상황을 촉발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결정의 여파로 이자벨이 겪는 마음의 혼란과 상처가 제대로 부각되지 않기 때문에 클라이막스까지 긴장감이 유지되지는 않습니다.

찬란했던 사랑만큼이나 깊어진 이자벨의 증오심이 상황을 예측 불가능하게 몰고 간다는 것을 원작만큼 명시적으로 보여 줬더라면 어땠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관객들은 후반부의 상황을 '저 여자 정말 어쩌려고 저러지? 하지만 그녀의 심정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야.' 하는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끝까지 가슴을 졸였을 겁니다.

 <파도가 지나간 자리>의 한 장면. 두 번의 유산 끝에 상심에 빠진 이자벨은 파도에 떠밀려 온 배에서 구한 갓난아이 루시를 아무도 모르게 자기 아이로 키우기로 마음먹는다.

<파도가 지나간 자리>의 한 장면. 두 번의 유산 끝에 상심에 빠진 이자벨은 파도에 떠밀려 온 배에서 구한 갓난아이 루시를 아무도 모르게 자기 아이로 키우기로 마음먹는다.ⓒ CGV아트하우스


윤리는 사회 구성원들의 암묵적인 약속과 규범으로서,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규칙입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각자 개인의 욕망과 행복만을 추구해서는 함께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원작자 M. L. 스테드먼이 이 영화 속 인물들을 1차대전의 직후라는 시점에 갖다 놓은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때야말로 처음 겪은 대규모 전쟁의 영향으로 기존의 윤리에 대한 감각이 바닥에 떨어진 시점이기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이름의 합법적인 살인 행위가 서구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거죠. (물론, 자기네 나라가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원주민을 비인간적으로 탄압한 제국주의 국가라는 점을 간과한, 순진한 시각이긴 합니다.)

전쟁의 여파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톰-이자벨-한나, 그 때문에 고난을 겪어야 하는 어린 루시의 운명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분명합니다. 어지럽고 심란한 시절일수록 당장의 유리함만을 찾기보다는 무엇이 '옳은' 결정인지 숙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탄핵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은 오늘의 한국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당장의 실리를 계산하여 모두 다 껴안고 가자는 식의 태도보다는,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 판단을 분명히 하는 태도가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물론 그것이 말처럼 쉽진 않겠지요. 좋은 게 좋은 거니 그냥 편하게 가자는 유혹도 있을 것이고, 현재의 기득권을 일정 부분 포기해야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문제가 대부분 기본적인 사회 윤리가 작동하지 않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한다면, 힘들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세대가 살아갈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진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파도가 지나간 자리>의 포스터. 원작만큼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탐구가 깊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아름다운 풍광과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파도가 지나간 자리>의 포스터. 원작만큼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탐구가 깊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아름다운 풍광과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CGV아트하우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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