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이끌 지도자가 가져야 할 덕목은 무엇일까요? 오마이스타는 드라마와 영화 등을 통해 '리더의 조건'을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영화 <퓨리>

영화 <퓨리>는 전차부대가 적으로 둘러싸인 최전선에서 마지막 전투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스 코리아


전쟁영화는 늘 매력 넘치는 장르였다.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 어깨 너머로 보았던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1979), 주말의 명화에 걸핏하면 걸렸던 <플래툰>(Platoon, 올리버 스톤, 1986), 머리 크고 나서 뭐 좀 안다 싶을 때 내 돈 주고 극장가서 보았던 <라이언 일병 구하기>(Saving Private Ryan, 스티븐 스필버그, 1998)까지, 전쟁영화는 항상 날 설레게 했다. 아드레날린이 넘치는 젊은 남자들이 실 없는 농담을 뱉어내며 머신 건을 난사하고, 그들이 스쳐가는 곳엔 흡사 슬래셔 영화를 보듯 피가 흘러 넘쳤다. 전쟁터를 둘러싸고 있는 청초한 자연을 물들이는 붉은색이 주는 카타르시스에 나는 마냥 매료되었다.

그리고 성인이 된 지금, 좋아하는 전쟁영화에 대한, 유년시절과는 좀 다른 중요한 기준이 하나 있다. 그 영화가 팀이나 부대를 이끄는 리더로 분하는 '영웅상'을 어떤 방식으로 건설하는가다. 근작 중 하나인 <퓨리>(fury, 데이빗 에이어, 2014)에서 나는 지울 수 없는 리더의 얼굴을 보았다.

지울 수 없는 리더의 얼굴

2차 세계대전. 미국은 1944년 6월 6일 연합군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합세한다. 이듬해 5월까지 미국은 패전을 예감한 채 '악다구니'를 쓰던 독일을 상대로 전투를 치른다. <퓨리>는 전차부대를 이끄는 '워대디 (극 중 브래드 피트가 맡은 콜리에 중위의 별명)'가 적으로 둘러싸인 최전선에서 마지막 전투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수차례의 전투로 이미 많은 동료들을 잃은 그에겐 한 대의 탱크 '퓨리'와 전쟁에 지쳐버린 5명의 부대원들만 남아있다. 그러던 중 지원군으로 전투 경력이 전무한 통신병 출신의 '노먼'이 배치되고, '워대디'는 신참을 포함해 4명의 부대원만으로 적진으로 들어가야 한다. 죽음이 전제된 전투와 4명의 병사, 그리고 그들의 비극적 운명을 꿰뚫고 있는 '워대디'의 시선과 갈등을 영화는 그리 특별하지 않은 전쟁영화의 작법으로 그려낸다. 

'그리 특별하지 않다'고 언급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퓨리>는 흥행했던 전쟁영화의 플롯 공식, 즉 장르를 구성하는 도식적인 내러티브적 요소 – 의리로 뭉친 부대원들과 그들을 이끄는 수장, 이들에게 떨어진 불가능한 임무, 애국심·개인적인 신념·동료를 향한 희생 정신 혹은 그 외 다른 선한 의지로 극복·고귀한 죽음을 수반한 해피 엔딩 – 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언급한 요소들만으로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최근 개봉한 <핵소고지>(멜 깁슨, 2016) 같은 전쟁영화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시각적인 면으로도 <퓨리>는 전쟁영화 계보에서 특출난 이력을 자랑하지 않는다. 선혈과 내장이 낭자한 배틀신은 이미 많은 작품들에서 재현 및 반복되었다. 핸드핼드 카메라와 롱테이크를 이용한 사실적인 촬영 기법, 혹은 역설적으로 드라마틱한 효과를 이용하는 슬로우 모션이나 음악의 차용 역시 <씬 레드 라인>(테렌스 말릭), <플래툰> 같은 작품 에서 사용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퓨리>를 범작 이상으로 보고 싶게 하는 드라이빙 포스(driving force) 중 하나는 콜리에 중위로 대변되는 영웅상과 그를 그려내는 브래드 피트의 연기다.

영화 초반, '워 대디'는 자비롭거나 합리적이기 보다는 차갑고 다소 무자비한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그가 가진 나치에 대한 혐오를 본인의 병사들에게 과시하기도 하고 탱크로 나치병사들을 밀어내라는 명령까지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대목까지는 타란티노의 영화 <바스터즈: 거친녀석들>(2009)에서 나치 병사의 머리를 벗겨내는 알도 중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영화 초반의 결정적인 한 시퀀스는 워 대디가 보여주던 인물상을 한 순간에 전복시킨다.

 영화 <퓨리>

'인간성'이라는 건 종이 모서리 만큼도 존재하지 않듯 냉기를 유지하다가도 부대원들 뒤로 돌아서자마자 부서지는 그의 눈이, 입술이, 그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물려있는 벌벌 떨리는 궐련이 그가 작은 승리에 도취하는 리더가 아님을 증명한다. ⓒ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스 코리아


무자비한 상관, 워대디의 눈물

그가 지휘하던 한 부대가 갑작스런 습격을 당하고 이 습격으로 그는 사랑하는 병사 몇 명을 잃게 된다. 부대로 복귀한 그는 운이 좀 나쁜 일상을 겪은 듯 태연하게 부대원들의 경례를 받으며 숙소로 돌아선다. 여기저기서 경례를 받고 걸어 들어오는 그의 전신을 보여주던 카메라가 다소 느닷없는 줌 인으로 그의 얼굴을 클로즈 업하는 순간, 우리는 더 느닷없는 눈물을 보게 된다. 병사들을 뒤로 하며 몸을 돌리기가 무섭게 '워 대디'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어금니가 부서지도록 다져 물며 오열한다. 그럼에도 그의 얼굴의 주름 사이사이로 눈물로 인한, 피로 인한 회한의 골이 파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병사들 앞에서 호기를 부리던 그가 촛농이 쏟아지듯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다.

'인간성'이라는 건 종이 모서리 만큼도 존재하지 않듯 냉기를 유지하다가도 부대원들 뒤로 돌아서자마자 부서지는 그의 눈이, 입술이, 그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물려있는 벌벌 떨리는 궐련이 그가 작은 승리에 도취하는 리더가 아님을 증명한다. 피트가 연기하는 '워 대디'의 이 감정적 폭발은 두려움이고, 슬픔이고, 무엇보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이다. 가망 없는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두렵다'고 말하는 신참 노먼에게 콜리에는 '나도 두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4명의 남아있는 부대원에게 살아남은 자들이 공유하는 '삶의 빚'에 대해서 설파하고 그를 위해 앞장서서 희생한다. 영화가 전달하는 가장 큰 메시지는 나약하지만 올곧은 리더, 콜리에의 입을 통해 나지막이 새겨진다.

"Ideals are peaceful. Histories are violent." (이상은 평화롭고, 역사는 잔인하다.)

역설적인 이름의, '워 대디'를 지배하는 가치는 전쟁의 명분도 승리도 아닌 그 위에 뿌려진 젊은이들의 시체와 피인 것이다.

 영화 <퓨리>

본의 아니게 '리더'의 역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을 보낸 우리들에게 <퓨리>의 리더 콜리에는 대단하진 않지만 통렬하리만치 절실한 두 가지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스 코리아


희생의 역설


광기와 두려움으로 가득 찬 좁은 탱크 혹은 허무할 정도로 넓은 전장을 메우는 것은 브래드 피트의 연기, 특히 계산한 듯 맞아 떨어지는 그의 시선처리다. 그는 전쟁터에서 몇 세기를 살아낸 나무-목석 같이 냉정하지만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공허하고 아득한 시선으로 동료들을 바라본다. 죽어가는 동료를 바라볼 때의 그의 슬픈 눈이나 그나마 살아 남은 몇 안 되는 동료들과 저질 농담을 하며 억지로 웃어 제낄 때 역설적으로 짓는 공허한 시선은 적확하고 예리하다. 피트의 연기 초년 시절의 작품인 <가을의 전설>을 떠오르게 하면서도 재능을 타고난 배우가 다년간 쌓아온 수완을 얹어 빚어내는 최고의 연기가 아닐까 싶다. 

<퓨리>는 관객으로 하여금 '고해'하는 기분이 들게 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전쟁의 참상으로도 그렇지만 그것을 오차 없이 배달해 주는 연기와 미학을 보고 있자면, 그 안에서 경이로움, 근본이 뚜렷하지 않은 반성, 침통함까지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영화가 시사하는 '희생의 역설'(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남은 자는 죄의식 속에 살아야 하는)이 보는 내내 고해와 기도를 반복하게 만든다.

본의 아니게 '리더'의 역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을 보낸 우리들에게 <퓨리>의 리더 콜리에는 대단하진 않지만 통렬하리만치 절실한 두 가지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공감과 희생이다. 그는 부대원들의 두려움과 고통을 통감하고 본인의 희생으로 남은 자들의 안위를 지켜낸다. 굳이 리더의 역할이라고 추대 받기에는 좀 사사로운 이 가치가 이토록 눈물겨운 것은, 이 두 가지가 명백히 부재한 리더십에서 너무 나도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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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23년차 직원. 시민기자들과 일 벌이는 걸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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