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화의 흥행과 관계없이 매력 충만한 작품들을 열린 감각으로 그러모아 세심하게 해석하는 공감의 기록입니다. [편집자말]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술의 모든 장르는 역사와 사회를 겨냥할 수 있다. 게다가 그 안에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사랑의 감미료까지 첨가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작품은 끈끈해진다. 다만 그 사랑의 종류가 금기시되는 사회 내에서 불안 속에 떨고 있다면, 사랑은 감미료가 아닌 꼭 지켜내야 할 책임이 있는 '과제'로 관객에게 다가서게 되는 것. 과연 영화예술은 온통 불안으로 응집되어 있는 그들의 사랑을 어떤 구원의 방식으로 반영할 것인가.

금지된 사랑

영화<러빙> 사랑하지만 '불안해' 
리차드 러빙(조엘 에저튼)과 밀드레드(루스 네가)

▲ 영화<러빙>사랑하지만 '불안해' 리차드 러빙(조엘 에저튼)과 밀드레드(루스 네가)ⓒ UPI코리아


영화 <러빙>은 1950년대 후반 흑인여성 밀드레드와의 사랑을 금지 당했던 한 백인남성 리차드 러빙의 일직선 사랑에, 웅크렸던 감각을 곧추세우게 만드는 작품이다. 실존인물의 사랑을 영화화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들을 향한 차가운 시선이 바로 관객일 수도 있다는 느낌으로 카메라 앵글은 흑인여성과 백인남성의 사랑을 다소 무겁게 비춘다.

영화 <러빙>을 통해 그려진 시대의 인종차별 서사는 작가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와 다소 비슷한 양상을 띤다. <앵무새 죽이기>의 애티커스 핀치 변호사는 백인 여성을 성폭행 했다는 누명을 쓴 흑인 청년을, 가족이 위협당하는 와중에서도 성심을 다해 변호한다. 팩트는 '누명'인 것이다. 백인 여성을 성폭행한 범죄자가 그 흑인 청년일 것이라 단정하고 몰아간 사회의 불평등한 법 논리에 정정당당하게 나선 핀치 변호사. 피부색과 별개로 법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주장은 당연한 것임에도, 흑인을 변호한다는 이유만으로 질타를 피할 수 없다.

소설 <앵무새 죽이기>가 백인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의 신념 어린 행보에 비중을 가한다면, 영화 <러빙>은 백인 남성 리차드의 뚝심 있는 사랑에 말뚝을 박는다. 주변의 우려 섞인 말들… 또 그들 사랑을 부정하는 법 앞에서 차마 당당하게 고개를 들 수 없는 그였지만, 밀드레드를 향한 사랑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핀치 변호사가 위협당하는 가족의 고초를 알면서도 흑인 청년을 위한 변호를 멈추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인종차별이 팽배했던 시기, 흑인을 향한 모든 백인의 시선이 부정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사실. 정의와 사랑이라는 형태로 반추하게 되는 그 것은 문학과 영화의 힘이다. 그들은, 우리 누군가는 그래야 할 필요가 있다는 듯 활약한다. 한 남자는 법의 최전선에서 직접 싸우고, 다른 한 남자는 사랑하는 그녀를 곁에서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애쓴다. 두 남자에게 흑인과 백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지키려고 붙든 대상은 자신과 같은 사람일 뿐이다.

결혼이라는 범죄

영화<러빙> "내가 집 지어줄게. 이땅에. 우리집."

▲ 영화<러빙>"내가 집 지어줄게. 이땅에. 우리집."ⓒ UPI코리아


그 당시 미국의 인종차별은 인종 간 결혼을 '범죄'로 치부하는 악랄한 형태로까지 확장된다. 인종 간 결혼을 반대할 수밖에 없는 신의 뜻이 있다며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녘 그들의 침실을 들이닥친 사람들. 체포된 남녀는 '떠나든가, 감옥에 가든가' 단 두 가지 선택지만 놓여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인간처럼 살기 위해 고향과의 이별을 선택한다.

25년간의 추방. 감옥에 구금되고, 나고 자란 지역에서 추방될 정도로 그들의 결혼이 사회에 악영향을 끼친 건 없다. 인간의 기본권리인 결혼이 차별적 논리에 의해 박탈당하는 시대를 살았던 리차드와 밀드레드. 리차드 러빙 역의 조엘 에저턴과 밀드레드를 연기한 흑인배우 루스 네가의 깊은 눈빛은 많은 대사 없이도 힘을 발한다. 극한 상황에서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 눈빛은 관객의 일그러진 탄식 속에서도 완전하게 스크린을 채운다.

인물의 눈빛은 오래도록 축적된 불안을 뿜어낸다.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결혼은 남녀가 상대에게 받고자 하는 '안정'의 욕구가 배제된 것이다. 서로 사랑하지만 불안하다. 인정받기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결혼제도를 선택한다. 태어날 아기의 존재만으로도 두 남녀의 결혼은 합당하지만, 새 생명은 연방의 평화와 존엄에 위배된다는 또 하나의 증거로 적용될 뿐이다. 참새와 종달새가 다르게 태어난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 혼혈아는 사생아와 다르지 않다.

'우리가 정말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를 넘어서 '우리가 함께 아이를 지켜낼 수 있을까'로 확장된 남녀의 불안. '결혼이라는 범죄'에서 쉽사리 해방되지 못하는 그들은, 세 아이가 태어나 더욱 묵직해진 가정을 지키려 애를 쓴다.

산파엄마

영화<러빙> "난 당신을 지켜줄 수 있어."

▲ 영화<러빙>"난 당신을 지켜줄 수 있어."ⓒ UPI코리아


리차드와 밀드레드의 첫 아이가 태어나던 날은 그들이 다시 체포되던 날이기도 하다. 낯선 곳에서 가족도 없이 아이를 낳을 일이 두렵던 밀드레드. 그녀를 위해 산파로 살고 있는 자신의 어머니댁으로 몰래 차를 몰던 리차드. 결국 산파 어머니의 도움으로 가족들 온기가 뒤섞인 리차드의 본가에서 아이는 무사히 태어난다. 그리고 어떻게 알고 왔는지 기가 막히게 들이 닥친 차량은 리차드와 밀드레드를 태우고 판사의 판결이 기다리고 있는 법정으로 향한다.

"넌 쟤랑 결혼하지 말았어야 해."

아기가 태어나기 전 진통을 겪는 밀드레드를 돕던 엄마는, 밖에서 초조해하는 아들을 앞에 두고 참았던 말을 입에서 터뜨린다. 뱉은 말이 겸연쩍게도 추방당한 아들부부가 맞이할 아이의 탄생을 기꺼이 돕던 엄마. 그 안에서 수 없이 피어났던 생명. 산파 엄마의 손을 데일 듯이 불덩이 같던 생명들은 뜨겁고 찬란하게 피어났었다. 그렇게 태어난 모든 생명과 다를 것 없는 사랑의 결실인 아들부부의 아이를 받아낸 엄마.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차별받을 수 있는 현실임에도 한 우주가 눈앞에 드러나는 순간엔 어떤 말도 무색해진다. 만감이 교차하는 생명 탄생의 현장만큼은 누구에게나 공평할 수 있다는 것을, 겪어본 이들 모두는 안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욕망과 우월주의에 사로잡혀 분리한 인권. 공평하게 피어난 생명 앞에 낙인찍힌 인권과 비인권은 비단 피부색의 이유만은 아니다. 부모에게서 대물림 된 모든 것에 기준을 세워 인간의 대접을 얼마나 해줄 것이냐를 결정하는 국가와 사회. 대부분의 모든 생명이 온정 속에서 곱게 피어났음을, 생명이 근간이 되어 차별 없이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 인간임을.

산파 엄마의 주름진 눈가엔 생명의 기억이 곱게 접혀 들어가 있다. 주름을 펴보면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생명은 없을 것이다. 인종의 구별 따위는 그 기억 속 어디에도 없다.

비현실적 상상

결혼이 범죄가 된다면, 사랑하되 결혼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은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리차드와 밀드레드가 아이를 갖지 않았다면 결혼을 결심하지 않고 사랑만 했을까. 그랬다면 드넓은 벌판의 숨소리가 아침마다 인사하는 정든 고향에서 추방당하지 않아도 되었을까.

결혼을 하는 대부분 사람들은 상대와의 사랑을 합법화된 제도 안에서 결속시키고자 하는 희망이 있다. 또 그 과정에서 책임질 생명이 생기게 되면 결혼은 당연한 절차가 되기도 한다. 한편, '때가 되어서' 한다는 경우도 드물지 않고, '남들도 다 하니까'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수없이 선을 보러 다니며 결혼에 대한 강박에 빠져 사는 이도 많다.

결혼을 선택하는 이유도 제각기 다르지만, 그 선택의 결과도 모두 조금씩 다르다. 리차드와 밀드레드처럼 정말로 사랑하기 때문에 놓을 수 없어 결혼을 선택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이며, 그 선택의 결과에 평생 만족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영화<러빙> 타인종간의 결혼이 불법이었던 미국의 어느 시대를 관통하는 '사랑'

▲ 영화<러빙>타인종간의 결혼이 불법이었던 미국의 어느 시대를 관통하는 '사랑'ⓒ UPI코리아


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지는 일반적이면서도 당연한 수순이 점점 변하는 시대. 사랑한다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게 낫다 싶어진다는 미혼남녀가 늘고 있다. 누군가는 사랑은 하지만 결혼은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에 이어 또 다른 누군가는 결혼은 하지만 애는 낳기 싫다는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끈질긴 노력으로 리차드 러빙과 밀드레드 러빙의 결혼은 범죄의 오명을 벗었다. 대법원 판결 7년 후 리차드 러빙은 음주운전자의 사고로 목숨을 잃고, 밀드레드는 재혼 없이 그가 지어준 집에서 평생 살았다.

"늘 저를 지켜줬던 그이가 그리워요."

밀드레드의 그 말은, 변치 않은 사랑을 향한 감동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조금 비현실적이다. 사랑하는 감정 하나 만으로 평생 상대의 손을 놓지 않은 두 사람의 현실스토리는, 요즘 비슷하게 사랑을 하며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비현실적 상상이다.

인종을 뛰어넘은 남녀의 사랑과 그 결속이 미국헌법을 바꿔놓은 역사적 감동스토리임에는 틀림없다. 영화가 풀어낸 그들의 진짜 사랑은 아름답고 애잔하다. 그러나 그들처럼 누구나 순애보적인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섞인 환상에 빠져버리게 된다면 곤란하다. 사랑의 현실은 누구에게나 같은 색깔일 수 없으며, 그 사랑을 지키려는 노력이 없다면 더욱이 그렇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한 사람에게 집중하여 노력하고 싶은 사랑을 만나고 싶고, 또 결혼을 꿈꾼다. '러빙' 그 비현실적 상상만으로도 가슴에 묵직한 사랑을 심은 느낌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권순지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rnjstnswl3)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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