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의 수많은 외교 실책 중에서 가장 크게 언급되는 것은 성급하게 추진한 사드 배치와 한-일 위안부 합의입니다. 특히 고작 10억 엔의 재단 출연금만 받는 대가로, 사실상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을 철거하고 향후 국제 사회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런 위안부 합의 내용은 우리 국민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위안부 제도는 일본 정부와 군이 주도한 '성노예' 제도라는 것이 이제까지 역사학계의 일관된 결론입니다. 그런데도 일본은 지금까지도 국가 차원에서 책임을 인정하고 제대로 된 사죄와 보상을 한 적이 없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졸속 합의는 '한국과 피해자들은 과도한 보상 요구를 하지 말고 이 정도 선에서 합의해 달라'는 일본의 입장과, 한-미-일 삼각 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미국의 의도가 반영된 것입니다.

이 영화 <눈길>은 일제 말에 강제로 끌려가 위안부가 된 두 소녀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가난한 집 소녀 종분(김향기)은 같은 마을에 사는 부잣집 딸 영애(김새론)를 부러워합니다. 좋은 옷과 신발이 있고, 학교에도 다니는 그녀와는 달리, 어린 남동생과 집안일을 도와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서럽습니다.

 영화 <눈길>의 한 장면. 한 마을에 사는 영애(김새론)와 종분(김향기)은 집안 형편이 달라 그리 친하지 않다. 하지만 영애의 집안이 아버지의 독립운동에 가담한 사실 때문에 풍비박산이 나자, 다를 것이 없는 처지가 된다.

영화 <눈길>의 한 장면. 한 마을에 사는 영애(김새론)와 종분(김향기)은 집안 형편이 달라 그리 친하지 않다. 하지만 영애의 집안이 아버지의 독립운동에 가담한 사실 때문에 풍비박산이 나자, 다를 것이 없는 처지가 된다.ⓒ CGV아트하우스


그러던 어느 날 영애의 집안은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풍비박산 납니다. 영애의 오빠는 학도병으로, 영애는 여자 근로정신대로 징집되지요. 한편, 이때까지만 해도 영애가 일본으로 가는 줄만 알고 부러워했던 종분은 어머니가 집을 비운 사이 괴한들에 의해 위안부로 끌려가게 됩니다. 만주를 향해 끝없이 달려가는 열차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된 두 소녀는, 끔찍한 시간을 견뎌내야 합니다.

교차하는 시간, 깊어지는 공감대

이 작품은 원래 광복 70주년 기념 2부작 드라마로서, KBS에서 제작하여 2015년 삼일절 전야와 삼일절 당일 밤까지 이틀에 걸쳐 방영되었던 바 있습니다. 두 편을 묶어 한 편의 영화로 개봉했음에도 처음부터 장편 영화로 기획된 작품들 이상의 완성도와 깊이 있는 성찰이 돋보입니다.

우선, 위안부 피해자들을 '끔찍한 일을 당한 우리의 어린 누이'라는 식으로 대상화하지 않습니다. 작년 이맘때쯤 공개되어 화제가 되었던 <귀향> 같은 영화처럼요. 대신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상황을 겪어야 했던 피해자들의 아픈 심정을 관객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주력합니다.

80대의 종분과 옆집 소녀 은수(과거), 10대 시절의 종분과 영애(현재), 80대 종분을 종종 찾아오는 10대 모습의 영애(판타지), 이렇게 세 가지 차원을 오가는 구성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관객은 자연스럽게 다양한 상황에서 표출되는 주인공들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게 되지요.

 영화 <눈길>의 한 장면. 일본군이 주둔지를 옮기는 혼란 속에서 빠져 나온 종분과 영애 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는 '눈길' 뿐이다.

영화 <눈길>의 한 장면. 일본군이 주둔지를 옮기는 혼란 속에서 빠져 나온 종분과 영애 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는 '눈길' 뿐이다.ⓒ CGV아트하우스


80대가 된 현재의 종분(김영옥)을 전체 이야기의 중심에 놓은 구성은, 위안부 문제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성노예제도라는 끔찍한 발상을 가능하게 한, '어린 여성을 성욕을 해결하는 도구' 정도로 보는 사고방식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그대로 있으니까요.

은수의 일탈 때문에 보호자 격으로 경찰서를 찾아간 종분은 은수와 함께 붙잡힌 남자들의 뻔뻔함과 경찰의 무심함에 분노합니다. 미성년자임을 속이고 술집에서 일하다가 붙잡힌 은수를 나무라기만 하는 상대 남자와 업주, 경찰의 태도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죠. 그들의 모습은 교묘하게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일본 정부의 태도와 그대로 겹칩니다. 이 장면은 종분이 그동안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자신의 설움을 수십 년 만에 토해 냈다는 점에서, 보는 사람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를 쓴 박유하는 올해 초 명예훼손 형사 소송에서 1심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 그의 책이 일본이 원하는 위안부 문제 해결 논리를 대변하고 있다고 봅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해 애매한 표현을 사용하여,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와 군이 책임을 회피할 빌미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책임을 한국의 민족감정과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태도에 떠넘기려는 것은 아닌지 의아합니다. 이런 책이 일본의 보수 우익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양심적인 '리버럴' 지식인들에게도 절찬을 받았다는 사실이 우려스러운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영화 <눈길>은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그런 식의 논점 흐리기가 결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잔인한 폭력 앞에 끔찍하게 유린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아파했을지,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큰 것인 생생하게 보여 주니까요. 인류 보편의 감정에 호소하는 이런 방식은, 위안부 문제가 민족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반인권적 국가 범죄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만듭니다.

 영화 <눈길>의 포스터. 피해자의 감정에 집중함으로써 위안부 문제가 민족 감정을 넘어선 반인권적 국가 범죄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영화 <눈길>의 포스터. 피해자의 감정에 집중함으로써 위안부 문제가 민족 감정을 넘어선 반인권적 국가 범죄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CGV아트하우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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