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이끌 지도자가 가져야 할 덕목은 무엇일까요? 오마이스타는 드라마와 영화 등을 통해 '리더의 조건'을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선 기간 내세운 슬로건 중 하나는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여성 대통령이 되긴 했지만 집권 기간 동안 한국 여성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가임기 여성을 경악케 한 출산 지도, '고스펙 여성'의 '하향 결혼' 유도가 모두 여성 대통령의 집권기에 터져나왔다.

차기 대선 주자 가운데 여성은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유일하다. 그마저도 심 대표의 지지율을 생각하면 차기 대통령이 여성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여성들은 다시금 남성 대통령이 만드는 여성 정책의 영향을 받아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다. 여성 정책을 만들게 될 남성 대통령에게 일본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TBS)를 추천하고 싶다. 드라마는 '계약결혼'이라는 가볍고 비현실적인 소재를 차용해 많은 여성이 처한 무거운 현실을 풀어낸다.

여자, 문과, 대학원 졸업생

주인공 미쿠리는 26살의 '고학력 백수'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업이 여의치 않아 대학원에 진학했고 대학원 졸업 후 겨우 계약직으로 취업하지만 그마저도 해고당하고 만다. 그를 해고한 팀장은 "너는 대학원까지 졸업했으니 다른 회사에 취업할 수 있지 않겠냐"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 자신의 자조 섞인 말마따나 '문과 계열의 대학원 졸업자'를 위한 자리는 도통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 미쿠리는 고학력 백수다

주인공 미쿠리는 고학력 백수다 ⓒ 일본 TBS


미쿠리는 궁여지책으로 가사노동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전공했고 관련 자격증까지 있는 그녀에게 가사노동은 전공과는 무관한 일이다. 게다가 은퇴한 부모님이 시골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미쿠리는 독립 자금이 없는 상태에서 독립해야 하는 곤란한 상황에 놓인다. 고심 끝에 그녀는 가사노동을 제공하고 돈을 받는 자신의 처지가 결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자신의 고용주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한다.

계약 결혼이라는 주인공 미쿠리의 선택은 다분히 '드라마스럽다'. 하지만 이를 제외한 모든 상황은 미쿠리 또래의 여성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최근 일본은 오히려 기업이 구인난에 시달리는 상황이니 일본 여성보다 한국 여성이 공감할 여지가 더 클지도 모르겠다. 물론 성별을 근거로 고용에 불이익을 주는 행위는 남녀고용평등법으로 금지돼 있지만, 많은 여성 취업준비생들은 성별이 학벌이나 대외활동 못지않은 중요한 '스펙'임을 안다.

취집을 마냥 욕할 수 없는 이유

극중 미쿠리는 가사노동의 경제적 대가를 정당하게 받는 조건으로 (계약)결혼한다. 얼핏 황당한 전개처럼 보이지만, 여기서 경제적 대가라는 조건을 지우면 꽤 익숙한 그림이 보인다. 소위 '취집'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취업에서 받는 불이익은 여성이 취집을 선택하게 한 요인 중 하나지만 취집을 비난하는 여론에서 구조적 문제는 지적되지 않는다. 그리고 취집은 다시, 여성이 고용시장에서 불이익을 받아도 된다는 근거로 작용한다. "여자들은 시집가고 애 낳으면 회사 관둘 거니까"라는 말은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미쿠리의 친구 야스에는 취집의 정석 코스를 밟은 인물이다. 학창시절 공부와는 담을 쌓다가 속도위반으로 덜컥 결혼해버린 그녀는 바람을 피우는 남편을 두고도 이혼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없다. 착실히 커리어를 쌓아가던 여성들조차 결혼과 출산, 육아의 벽 앞에서 '경단녀'가 되는 세상이다. 변변찮은 경제적 능력도 없는 '애 딸린 이혼 여성'의 삶은 (종국에는 모두가 행복해질 게 분명한) 드라마에서조차 불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까지 혼자인 이유를 알겠네"

미쿠리와 야스에가 너무 극단적인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요즘은 여자도 능력이 좋아서 마음만 먹으면 어디고 취업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백 번 양보해 그렇다 치자. 하지만 미쿠리와 야스에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괜찮은 직장에 다니게 됐다면, 정말 그걸로 여성은 행복해질까? 그렇지 않다.

 커리어우먼 유리는 젊은 여성들의 롤모델이 되기 위해 열심히 산다.

커리어우먼 유리는 젊은 여성들의 롤모델이 되기 위해 열심히 산다. ⓒ 일본 TBS


미쿠리의 이모 유리는 화장품 회사 홍보부에서 일하는 커리어우먼이다. 40대 후반의 유리는 실력 있는 직원이지만 결혼하지 않고 악착같이 일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비난받는다. 간부들은 그녀를 두고 "융통성이 없다", "지금까지 혼자인 이유를 알 것 같다"고 말한다. 유리는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기에 오히려 더 최선을 다해 산다. "혼자서 살아가는 게 두려운 젊은 여성들에게 롤모델이 되기 위해 멋지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모습은 이미 그 자체로 멋지다.

유리는 멋지지만 단순히 '멋있는 여성'이라 정리하고 넘어가기엔 석연치 않다. 그것은 유리 앞에 놓인 '유리천장'이 현실에 실재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용 과정에서의 성차별을 극복하고 취업한 후에도 왜 여성들은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받아야 할까. 결혼한 여성은 (미쿠리와는 달리 경제적 대가를 받지 못한 채) 가사와 육아 노동으로 이중고를 겪으니 결혼이 비난을 피할 능사는 아닐 것이다.

준비된 여성 대통령 대신

드라마 후반부, 미쿠리는 남편의 정서적‧경제적 지지 속에서 새롭게 취업 의지를 다지고, 싱글맘이 된 야스에는 부모님의 작은 청과물 가게에서 일한다. 자신을 '독한 여성'으로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도 유리는 계속 멋진 커리어우먼으로 살아갈 것이다. 계약결혼을 내세운 드라마다운 해피엔딩이다. 온갖 우연과 행운 없이 현실에서 이런 해피엔딩은 불가능하다.

대선 주자들이 여성 정책을 도외시한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최근 1~2년 간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무시할 수 없게 커졌다. 유권자의 절반은 여성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이제라도 알아주는 듯하다. 지지율 1위인 후보는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물론 그의 소수자 인권 의식을 두고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차기 대통령은 우연과 행운의 빈자리를 잘 짜인 여성정책으로 채워줄 수 있어야 한다. 능력과 열정이 있는 여성들이 왜 취업할 수 없는지, 결혼과 출산, 육아가 여성의 인생을 어떻게 두 동강 내놓는지에 대한 공감 없이 잘 짜인 여성정책은 탄생하기 힘들다. 여성 대통령의 실패가 여성정책의 부재라는 반작용으로 이어져선 안 된다. 준비된 여성 대통령 대신 '여성정책을 준비한' 대통령을 기대한다.

여성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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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23년차 직원. 시민기자들과 일 벌이는 걸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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