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참하라>의 한 장면. 정사에서 '성군'으로 나오는 성종의 이야기를 비틀었다.

<왕을 참하라>의 한 장면. 정사에서 '성군'으로 나오는 성종의 이야기를 비틀었다.ⓒ BoXoo 엔터테인먼트


즉위 10년 차를 맞은 조선의 왕 성종 이혈(강윤 분)은 무능하다. 그에게 국정은 뒷전이고, 밤이면 밤마다 후궁들의 치마폭 속에서 놀아날 뿐이다. 이 와중에 수렴청정을 맡은 인수대비(김선영 분)는 조선 여성들에게 일초불개(一醮不改)와 일부종사(一夫從事)를 강요하며 '열녀'란 이름으로 이를 포장한다. 권력의 도구였던 퇴폐기방 '몽화관'에까지 향한 칼끝에 많은 기녀가 죽임을 당하거나 잡혀가고, 겨우 이를 피한 기녀 비설(강연정 분)은 억울하게 죽은 동료들의 복수를 결심한다. 그는 조정의 실세 한명회(김학철 분)와 김격(이영범 분)을 오가며 이들의 질투를 유발하고, 성종과 그의 형 월산대군 이정(추석영 분)과도 가까워지며 나라를 뒤흔든다.

영화 <왕을 참하라>는 어우동과 성종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약자의 관점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당시 정착되어 가던 유교적 가부장제를 남성이라는 이름의 국가 권력이 자행한 폭력으로 그리고, 흔히 '음란'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는 어우동에게 여성의 권리를 지키려는 페미니스트의 모습을 투영한다. 한 남자에 대한 종속을 요구받는 여성, 그리고 후궁과 첩, 기녀 등 다층적으로 존재하는 일반 여성, 그리고 이를 착취하는 남성 사이의 극단적 대비가 영화의 큰 줄기다. 이 와중에 내내 보이는 추악한 불평등의 민낯은 오늘날 대한민국에 대입해도 부족함이 없다.

주인공 비설을 중심으로 뻗어 나가는 영화의 구성은 기존 어우동을 다룬 작품들에 비해 한결 폭넓고 신선하다. 조선의 가부장적 남성을 '조남충'이라며 비꼬는 몽화루 기녀들, 그리고 못생긴 얼굴에도 "양귀비의 음부를 가졌다"는 이유로 성종에게 간택되는 후궁의 에피소드 등은 현실과 맞물려 코믹하고도 날카롭게 각인된다. 그 반대편에서 균형을 잡는 성종 캐릭터 또한 왕의 권위가 배제된 미성숙한 소년으로 그려지며 인상적으로 남는다.

 농밀한 정사 장면이, 서사와 엇박자를 내고 만다.

농밀한 정사 장면이, 서사와 엇박자를 내고 만다.ⓒ BoXoo 엔터테인먼트


이러한 영화의 태도에는 "허구적 정사와 실제적 야사를 외재적으로 표현하려 했다"는 김재수 감독의 의도가 깔렸다. 지난 7일 언론시사회에서 그는 "<조선왕조실록> 같은 정사는 당시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게 조작된 것일 수 있다"며 "오히려 야사야말로 사실에 가까울 거로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상황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는 방식이 아니라 오늘의 문화적 관점, 정치적 상황에서 접근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비설의 조력자 역할을 하는 주변 캐릭터들의 서사가 깊이 다뤄지지 못한 점은 아쉽다. 광대와 백정, 동료 기녀에 이르기까지 약자로 구성된 이들의 연합은 그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드라마틱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다른 한 편에서 가부장제하의 남성 권력을 상징하는 한명회와 김격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기생 쟁투의 중심에 선 이들은 희화화된 캐릭터로 기득권 남성을 풍자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처한 자가당착과 자기모순을 폭넓게 보여주지 못한 채 소모된다.

이 같은 패착은 굵직한 메시지에 앞서 선정성에 상당 부분을 할애한 영화의 노선 때문으로도 읽힌다. 초·중반부 성종을 중심으로 수차례 등장하는 정사 장면들은 퍽 농밀해 여느 에로 영화를 능가할 정도다. 문제는 이런 선정성이 극 중 서사와 맞닿지 못한 채 단편적으로만 읽힌다는 점이다. 특히 어머니 인수대비와 형 월산대군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진 성종의 내면, 그리고 이런 그의 성도착적 성향이 좀처럼 서로 녹아들지 못한 채 겉도는 지점은 아쉽다. 욕망에 눈먼 인간 군상의 민낯을 파헤치면서도 상당 부분 관객의 욕망에 의존하는 듯한 영화의 노선이 극 중 남성 캐릭터들 못지않게 모순적으로 비치는 건 그래서다.

 서사의 함의는 컸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서사의 함의는 컸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BoXoo 엔터테인먼트


결국 <왕을 참하라>는 서사가 지닌 거대한 함의에 비해 그 결과물의 완성도가 아쉬운 작품이다. 여기에는 "40일간 34회차로 촬영했다"는 감독의 말대로 열악한 제작 환경이 한몫을 했을 것이고, 어쩌면 안일한 상업적 의도로 '19금 노출'에 치중한 누군가의 입김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야사'를 다룬 사극으로서 나름 적잖은 의미를 남긴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영화는 문란한 여성 자체가 아니라, 그 여성에 의해 드러나는 남성의 추악함을 보라고 역설한다. 옷이 찢기고 상투가 벗겨져 가며 싸우는 한명회와 김격의 장면이 그 어떤 정사 장면보다도 오래 남는다면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오는 16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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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이지 않습니다. 사심을 담습니다. 다만 진심입니다. 제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 제 진심이 닿으리라 믿습니다. 공채 7기 입사, 사회부 수습을 거쳐 편집부에서 정기자 생활을 했고 지금은 오마이스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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