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관계에는 위기가 있고, 모든 위기는 모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지난 2월 26일 방송된 SBS <맨 인 블랙박스>는 차 안에서 벌어지는 데이트 폭력을 주제로 삼았다. 남자친구에게 납치당해 차 안에 감금된 여성, 둔기로 여성이 탄 차량 유리를 깨고 염산을 부은 남성, 달리는 차에서 탈출하기 위해 문을 열고 도망을 시도하는 여성, 인적이 없는 공사장으로 끌려가 무차별 폭행을 당한 여성, 건물을 향해 차를 돌진하는 남자 등. 블랙박스에 담긴 데이트 폭력의 실태는 심각했다. 이 끔찍한 영상은 모두 '실제 상황'이었다.

영상 속 여성들은 끔찍한 공포에서 살아남았고, 인터뷰에 응한 많은 피해자들은 여전히 당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노라 고백했다. 영상을 접한 MC들은 탄식을 내뱉으며 "저게 무슨 사랑인가", "이건 범죄다", "(미안하다는 가해자의 말에) 그런 말로 용서될 게 아니다" 등 저마다의 감정을 쏟아냈다. 문제는 이 같은 탄식 속에, 세심하지 못한 발언이 숨어있었다는 점이다.   

폭력성 알고도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SBS <맨 인 블랙박스> 방송 화면 캡처.

이별을 고했다는 이유로 납치, 폭행을 당한 피해자. 이럴 남자라는 걸 알고 사랑에 빠진 여자가 어디 있을까?ⓒ SBS


"사람 잘 만나야 돼요." (김구라)

데이트 폭력·이별 범죄는 '그런 남자'의 잘못이지, '그런 남자를 고른'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다. 안타까움에 나온 말이겠지만, 김구라의 발언은 은연중에 잘못을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세간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상대가 자신에게 폭력을 가할 끔찍한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사랑에 빠질 이가 세상 어디에 있을까. 상대의 폭력적 성향을 알고 이별을 고하는 순간, 데이트 폭력은 곧 '이별 범죄'로 이어진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젠더 감수성 부족한' 아저씨의 실언 정도로 이해될 수 있었다. 하지만 해당 방송은 "모든 위기는 모면할 수 있다"는 위기협상 전문가가 등장하며 심각한 수준에 이른다. 국내 최초 위기협상 전문가라는 경찰대학교 이종화 교수는 한 연인의 대화를 듣는다. 격앙된 상태로 싸움을 이어가던 남녀. 흥분한 남성은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한 듯 차량을 바다로 돌진시켰고, 추락했다. 방송은 해당 사고 피해 여성이 현재까지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영상을 본 이 교수는 "본인이 화난 것을 전혀 몰라주니까 더 화를 내면서 여자를 지배하고 싶은 거다"라고 분석한다. 이어 "흥분을 가라앉히는 데 집중해라. 감정적으로 고조된 상대방을 빨리 안정시켜야 한다. 자극하면 안 된다"고 조언한다.

피해자 살린 '침착함'... 정말? 

 SBS <맨 인 블랙박스> 방송 화면 캡처.

국내 최초 위기협상 전문가의 조언은 "상대의 흥분을 사라앉히라는 것"이다.ⓒ SBS


방송은 "위기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피해자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서 한 제보자의 인터뷰 내용을 소개했다.

"헤어지자는 말을 했을 때는 정말 미친 사람처럼 흥분했어요. 그 사람을 진정시키기 위해 미안하다고 헤어지지 않겠다고. 그 말에 그 사람은 진정했고 저를 집에 데려다줬어요."

이어지는 "위기 상황에서 피해자를 살린 건 침착함"이라는 내레이션. 여기에 최기환 아나운서는 "계속 자극하면 안 된다는 거죠", 김선재 아나운서는 "일단 달래야 하는군요"라는 멘트를 얹는다. 양쪽 모두가 감정적으로 격앙되어 있는 상태에서, 피해자인 여성에게만 '이성적으로 행동하라', '상대를 자극하지 마라'는 주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버튼 하나로 신고할 수 있다는 스마트 워치를 소개하기까지 한다. 데이트 폭력 상황에 놓였을 때, 이 신고 기능을 이용하면 된다는 '팁'은 정말이지 너무나 유용한 예방법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반어법이다.

데이트 폭력과 이별 범죄의 심각성을 알리고자 했던 제작진의 의도 자체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방과 대처법이 오로지 피해 여성의 이성적 대처에 맞춰져 있었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이는 범죄 피해를 당한 여성들에게 "자극하지 말았어야지", "일단 달랬어야지", "침착했어야지"하고 책임을 전가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날 방송은 김구라의 "모든 남자들이 그런 건 아니다. 순간 화를 못 참아서 그런 거다"라는 엔딩 멘트에서 정점을 찍는다. 피해자에게는 생명의 위험을 느끼는 순간에도 '침착함'을 요구하면서, 가해자에게는 "순간 화를 못 참아서 그렇다"는 변호라니. 어쩜 이리도 피해자에게만 가혹할 수 있는지 당혹스러울 정도다. "운전할 때는 화내면 안 된다. 인생 망치는 지름길"이라는 마지막 말은, 누가 누구의 인생을 망친다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피해자의 분노

 SBS <맨 인 블랙박스> 방송 화면 캡처.

'침착함 덕분에' 생명을 구했다는 피해자. 이 피해자가 방송을 보고 분노한 이유는 무엇일까?ⓒ SBS


이날 방송 내용에 가장 분노한 건, "미친 사람처럼 흥분한 전 남자친구를 진정시키기 위해 헤어지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내용을 인터뷰 한, '침착함 덕분에 기적적으로 생명을 구한' 바로 그 제보자였다. 그는 자신의 SNS에 올린 글을 통해 "<맨 인 블랙박스> 제작진이 자신이 인터뷰한 내용을 통편집하고, 그 상황이 얼마나 절박하고 공포스러웠는지 알리기 위해 했던 말만 편집해 내보냈다"고 지적했다.

통편집된 멘트는 "미국에서는 남자가 길거리에서 여자에게 소리 지르거나 손목을 잡기만 해도 모르는 사람까지 개입해 막고 경찰에 신고하지만 한국에서는 데이트폭력이나 가정폭력을 단순 사랑싸움으로 취급해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다. 내 인터뷰로 인해 사람들이 데이트폭력이 사랑싸움이 아닌, 엄연한 범죄라는 사실을 인지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진정시키면 데이트 폭력은 방지할 수 있다"는 내용의 방송에 대해 "차에 태워져 살해위협 당하고 야밤에 빈 공사장으로 끌려간 시점부터 이미 폭력에 살인 미수인데 방지하긴 뭘 방지한다는 것이냐"면서 방송 내용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했다.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는 김구라의 멘트에 대해서도 "데이트 폭력 피해자들이 남자를 잘못 만나서 그렇다는 건가. 도대체 어떤 남자가 만나기 전부터 폭력을 휘두르고 살인을 예고하나. 그런 남자 미리 알고 거르는 방법이 있으면 알려 달라. 전 남자친구는 처음부터 자기가 그런 인간이라고 알린 줄 아느냐"고 분노했다. 

"2차 가해 당한 피해자들에 사과해야"

 SBS <맨 인 블랙박스> 방송 화면 캡처.

끔찍한 데이트 폭력 화면을 보고 놀란 MC들.ⓒ SBS


<오마이뉴스>와 연락이 닿은 제보자는 "다른 곳에 전 남자친구의 폭력적 행동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를 본 제작진이 먼저 연락을 취해 인터뷰에 응하게 됐다"면서 더 자세한 이야기를 전했다.

제작진은 현재 미국에 거주 중인 제보자와의 사전 대화에서 "미국은 데이트 폭력에 대해 엄격하게 처벌하고 피해자 보호 시스템이 잘 되어 있다고 들었다. 그런 이야기도 해주면서 우리나라의 피해자 보호 시스템의 필요성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고, 제보자는 방송을 통해 데이트 폭력의 심각성과 사회 인식 개선의 필요성을 알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인터뷰에 응했다고 한다.

하지만 방송은 흥분한 남자를 진정시키고 원하는 대로 해주면 데이트 폭력을 방지할 수 있다는 식으로 전개됐다. 제보자는 "내 인터뷰가 그런 터무니 없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용도로 쓰였다는 것을 알고 당황했다"면서 "제작진은 데이트폭력을 방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남자를 진정시키거나 신고 기능이 있는 시계를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데이트 폭력을 저지르지 않으면 된다는 것을 방송을 통해 명시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제작진에게 개인적으로 사과받을 생각이 없다. 하지만 다른 데이트 폭력 피해자들, 방송으로 2차 가해를 당한 이들에게는 분명하게 사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보자의 입장을 접한 <맨 인 블랙박스> 제작진은 7일 <오마이뉴스>에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맥락상 범죄 상황이라고 이야기했고,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미진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고 해명했다. 제보자 인터뷰 내용 편집과 관련해서는 "방송 시간이 제한적이라 편집한 것인데, 그 과정에서 당사자 분과 오해가 생긴 것 같다. 직접 이야기를 듣고 말씀드리겠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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