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분노를 노래로 담았다. "아 내가 화내는 게 맞는 일이구나" 그런 걸 확인하고 싶었다.

나의 분노를 노래로 담았다. "아 내가 화내는 게 맞는 일이구나" 그런 걸 확인하고 싶었다. ⓒ 박영록


"아무 생각 없이 스포츠브래지어를 샀는데, 집에 와서 보니 뽕이 어마어마어마하게 들어가 있다. 도대체 운동할 때 왜 이딴 걸 입는가? 이렇게 될 때까지 운동하라는 의미인가.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한 친구의 이 글을 보며, 꼭 이번 슬릭 인터뷰의 도입부로 쓰고 싶었다. 우리 시대 여성성의 현주소를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있을까. 여성의 정체성은 남성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우리 사회가 뿌리 깊은 가부장제에 여전히 머무르고 있다면, 여성의 권익과 그에 따른 정체성도 절대 거기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 통렬하고도 정돈된 가사들로 가부장제의 치부를 매섭게 꼬집는 여성 래퍼 슬릭을 만나 분통 터지는 여성의 현실과 이를 노래로 승화하는 그녀의 페미니스트 작업에 대해 들었다.

최근 정규앨범을 냈다. 그간의 음악 활동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정규앨범의 의미를 얘기하면서 인터뷰를 시작하면 좋겠다.

2012년부터 2015년까지는 음악 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에 가까운 시기였다. 그러면서 싱글도 내고 회사도 들어가고 그러는 게 신기했다. 정규앨범은 2014년 말부터 작업해서 2016년에 <콜로서스>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긴 얘기로는 처음 세상과 만나는 작업인데, 세상이 바라보는 나, 내가 바라보는 세상을 담으려 했다. 그런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이 음악을 계속하는 힘이려니 싶었다. 어디 가서도 당당하게 음악 한다는 얘기를 할 수 있어야 하겠다 싶었다.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세상엔 테트리스 조각처럼 이빨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그래서 세상에 대해 두려움이나 이질감을 느끼는 존재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세상엔 테트리스 조각처럼 이빨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그래서 세상에 대해 두려움이나 이질감을 느끼는 존재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 박영록


- 정규앨범 낼 때 애초의 의도와 1년여가 지난 지금은 어떤가?
"힙합 내 래퍼들 일반의 서사와 내 건 좀 다르다. 다들 자기 얘기를 하지만, 좀 더 내면적인 얘기를 한다고 할까. 내면 얘기가 음악의 주된 정서가 되는 걸 좋아하고, 거기 공감해주시는 분들이 조금 생기는 것 같다."

- 힙합 신 내부의 평가보다는 내면과 더 큰 내면, 내면의 확장으로서의 사회와 맞대면하는 데 더 열중하는 것 같다.
"KHA(코리아 힙합 어워즈)에서 '올해 과소평가된 앨범상'을 받았다. '아는 사람만 아는 앨범'이라는 거 아니겠나. 폐쇄적인 한국 힙합 내에서 크게 사랑받은 앨범은 아니었단 말이다. 힙합 신 혹은 힙합 리스너 신 내부의 반향보다는 지금 찾아오신 참여연대처럼 바깥으로부터의 주목을 더 많이 받은 거 같다. 힙합도 국내에 들어온 뒤 여러 장르와 많이 결합하고 있는데, 나의 랩은 순수한 힙합이 아니라 여러 장르가 섞인 형식을 음악적으로 지향한다. 그래서 "이건 꼭 들어야 해"라며 챙겨 듣는 정도는 아니지만, 내 내면의 메시지에 관심 있는 분들이 찾아주시는 거 같다."

- 열심히 만든 음악을 더욱 많은 사람들이 듣게 하는 것에 대한 고민도 많을 것 같다.
"내 음악에서 그런 부분이 주된 고민은 아니다. 내가 너무 나이브한 건지 몰라도, 좋은 음악을 만들면 언젠간 모두에게 가 닿으리라, 그렇게 믿고 있다."

- 질문을 바꿔보자. 어떤 분들이 내 음악을 들어주었으면 하나?
"저랑 비슷한 분들이 많이 들었으면 한다."

- '슬릭과 비슷한 사람'이라면 어떤 분들일까?
"1집 제목 '콜로서스'는 괴물, 괴수란 뜻이다. 콜로서스는 사람을 위협하는 괴물이 아니라, 세상에 던져졌을 때 그 어떤 말로도 정의되지 못하고 어떤 분류에도 속하지 못하는 그런 미확인생명체 같은 걸 말한다. 세상엔 테트리스 조각처럼 이빨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그래서 세상에 대해 두려움이나 이질감을 느끼는 존재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그런 분들이 내 음악을 들으며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는 공감의 힘을 나눠주었으면 한다."

- 작업방식도 궁금하다. 다른 장르와의 결합을 적극적으로 추구한다고 했는데, 그런 작업은 어떻게 이뤄지나?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이뤄진다. 다른 장르, 내가 지향하는 장르의 음악을 많이 듣는다. 한국 힙합보다는 외국의 여러 합동작업을 많이 보며 무드를 따보려고 애쓴다. 언어적으로는 아주 좋아하는 독립영화를 보면서 '말하는 방식'을 많이 배운다. 상업영화만 보며 자랐지만, 독립영화를 만나면서 말하는 방식, 말하는 언어가 매우 다양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구나!" 그런 깨달음. 메시지와 관련해서는 페미니즘 책들도 많이 본다."

- 최근 관심 깊게 참조하는 작업을 음악, 영화, 책 등으로 나눠 소개한다면?
"음악은 너무 마이너해서 아무도 모르실 텐데…. (웃음) 미국의 래퍼 커먼(Common)이 최근에 낸 뮤직비디오로 20분짜리 단편영화 같은 게 있다. 미국 내 아프리카계 미국인(쉽고 이상하게 말하자면 '흑인')들의 존재 자체를 인상 깊게 보여준 작품이었다. 며칠 전에 본 <거미의 땅>은 의정부 미군 부대와 성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영화인데 거기 담긴 메시지나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 감명 깊었다."

페미니즘을 만나다

 2030 페미니스트 캠프에서 공연하고 있는 슬릭의 모습. 2030 페미니스트 캠프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갈무리.

2030 페미니스트 캠프에서 공연하고 있는 슬릭의 모습. 2030 페미니스트 캠프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갈무리. ⓒ @2030feminist


- 책 이야기는 따로 해보자. 페미니즘을 처음 접한 게 책을 통해서라고?
"그렇다.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라는 책이다. 대충격에 빠져 며칠을 보냈던 기억이다."

- 든든해 보이던 바탕을 훅 꺼지게 하는 운명적인 만남이 있다.
"바로 그런 거였다. 밤에 잠이 안 와서 읽기 시작했는데 아침 아홉시까지 책을 다 읽어버렸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세상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허술하며, 내가 왜 슬펐는지 알게 됐다."

- 하필 그 책을 고른 특별한 이유라도?
"인터넷에서 '페미니즘 책 추천 리스트'를 보고 도서관에서 검색했더니, 다 대출 중이고 딱 그 책만 있었다."

- 왜 페미니즘 책을 찾았는지?
"페미니즘 담론을 모를 때는 '내가 나일 수 없는 게 참 슬프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못나고 내가 모자라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페미니즘이라는 큰 분야에서는 내가 몰랐을 뿐, 그와 관련한 얘기들을 오래도록 나누어오고 있었던 거다. 책뿐만 아니라 트위터를 통해 관련 최신 이슈나 생각들을 더 깊이 접할 수 있었다. 테드나 유튜브의 자료도 보고 관련 책들도 더 찾아보며 더 깊이 있게 공부했다."

- 페미니즘 공부의 내공을 음악에 녹여낼 때의 고민도 남달랐겠다.
"그런…가? (웃음) 거기에 대해 어렵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듣게 하겠다는 생각이 애초부터 없어서 그랬나? (웃음) 2012년에 싱글을 내긴 했지만 가사를 쓴 건 아주 오래전부터다. 내 생각을 노래 가사로 쓰는 거, 그게 내가 할 줄 아는 것 중에 제일 잘하는 거였다. 오랫동안 했으니까."

- <K팝스타> 심사위원이 참가자들에게 늘 하는 주문 중 하나가 "노래 잘 부르려 하지 말고 네 얘기가 잘 전달되게 하라"는 거더라. 그런 점에서 오래도록 자기 얘기를 가사에 녹여낸 슬릭은 타고난 아티스트인 건가?
"아이고오~ (웃음)"

- 언제부터 가사를 쓰기 시작했나?
"초등학교 때부터다."

- 왜 힙합이었나? 처음부터 힙합이었던 건가?
"아니다. 처음엔 가요 가사를 개사하는 거로 시작했다. 아니다. 그 전엔 시를 썼다. 동시. 원래 맘에 드는 게 있으면 무조건 해보는 성격이다. 학교에서 동시를 배우고 맘에 들면, 아, 시가 세 줄 쓰는 거구나, 나도 세 줄 써야지, 그런 식으로 막 썼다. 물론 거지 같았지. (웃음) 가사도 시 같다는 걸 알고는 그것도 써보고, 그랬던 거다."

- 최근 유튜브의 <마이크 스웨거2>에서 힙합계 내부의 여성혐오와 관련된 가사를 노래해 주목을 받았다. "내가 안 하면 아무도 안 할 것 같아서"라면서.
"맞다. 그런 사회비판 작업은 꾸준히 계속할 거다."

힙합하는 페미니스트


- 행정자치부의 '대한민국 출산지도' 관련해서도 노래를 발표했다. 어떻게 작업한 건가?
"아주 충동적이었다. 처음엔 그 발표를 보고 '에이, 바보 같은 것들', 그 정도였는데, 점점 더 화가 치밀더라. 그 화가 난 걸 격하게 썼는데, 시간이 지나 그 격함만 남으면 발표하길 주저할 거 같아서 새벽 3시 정도에 올렸다. 그날 트위터에서 함께 분노하던 많은 사람과 나누면서 "아, 내가 화내는 게 맞는 일이구나!" 그런 걸 확인하고 싶었다."

- 그 격한 분노가 '내꺼야'의 가사 안에서는 아주 알차게, 비교적 차분하게 정리된 형태로 들어 있던데?
"어떻게 보면 그게 내가 작업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내가 가사를 쓰는 방식이, (내용이 거칠지 않고) 오밀조밀하게 들어 있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 슬릭의 작품세계 전체를 간단하게 가이드 해준다면?
"'내꺼야' 발표와 <마이크 스웨거> 출연 이후 이런 인터뷰를 많이 하게 됐는데, 처음 접한 분들을 "나 화나 있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난 화가 많은 사람이 아니다. 차분한 편이다. <콜로서스> 앨범, 특히 중후반부의 정서가 평소의 나에 가장 가깝다. 정적이라고나 할까. '내꺼야' 등의 곡으로 '화난 사람'인 나를 만난 분이라면 앨범을 통해 '말을 예쁘게, 온전하게 하려는 사람'인 나를 만나보시면 좋겠다."

- 혼자만의 작업 속으로 계속 빠져들지 않고 그걸 널리 세상 속으로 가지고 나오는 데는 지금 소속사인 '데이즈 얼라이브'라는 회사의 역할도 클 것 같은데?
"페미니즘의 충격에 빠진 때가 2015년, 회사에 들어간 건 2014년 즈음이다. 회사 사장님인 제리케이의 오랜 팬이었다. 내가 혼자 음악 하며 '이게 잘 될까?'를 고민하던 때 "내가 너에게서 비전을 보았으니 우리 회사에서 같이 해보자"고 손을 내밀어 자신감을 얻게 해 준 분이기도 하다. 데이즈 얼라이브 네 명은 나이 성별과 관계없이 아주 민주적으로 의견을 나누고 소통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바깥에선 나이와 성별이 소통의 장애물이기 십상이지 않나. <맨스플레인> 책에 나오듯 내가 온전한 나로서, 한 "인간으로 존재하기 쉽지 않은" 게 현실 아닌가. 하지만 데이즈 얼라이브에서는 그게 가능해서 너무 좋다."

- 페미니스트 아티스트로서 포부가 있다면?
"난 언제나 완성도 높은 음악을 하고 싶은 사람이다. 음악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거다. 할 수 있는 일, 잘하는 일이 그거니까. 그 외는 나보다 더 대단한 분들이 잘해 주리라 믿는다."

깜박하고 늘 쓰고 다니던 헤드폰 없이 돌아다녀야 했던 이틀간 겪은 세상의 대화와 소리가 "너무 괴롭고 끔찍하고 힘들었다"는 천상 아티스트 슬릭. 야무지게 자기 생각을 말하는 의젓한 슬릭을 보며 머지않아 그의 차분한 메시지를 담은 음악들이 훨훨 날개를 달고 날아 마지막 남은 이 땅의 가부장제 잔재를 싹 털어내는 상상을 해본다. 여성을 억압하고 남성도 맨박스에 가둬버리는 가부장제를 넘어 진정한 성 평등의 그날까지 가는 길 내내 슬릭의 음악이 우리를 가만히 위로하고 어루만지며 다시 불끈 힘이 솟게 하여 주리라 굳게 믿으며.

슬릭이 추천하는 페미니즘 입문서
"페미니즘은 하나의 존재가 살아가는 데 너무나 절박하게 필요한 학문이다. 특히 여성들은 페미니즘의 도움 없이는 자의식이 사라진 채 살아가야 해 아주 힘들 수 있다. 처음에 접할 때는 불편할 수 있지만, 페미니즘을 알고 나면 그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니다. 페미니즘을 모르고 지내는 건 아주 손해 보는 일이다."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우에노 치즈코 지음 / 은행나무 펴냄)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이민경 지음 / 봄알람 펴냄)
<아내 가뭄: 가사 노동 불평등 보고서>(애너벨 크랩 지음 / 동양북스 펴냄)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리베카 솔닛 지음 / 창비 펴냄)


덧붙이는 글 박유안. 기웃기웃 번역가. '알트' 출판사에서 일하는 그는 "까칠해도 친절하게"가 삶의 모토이며, "쟌 모리스를 번역한 작가"로 기억되길 바란다. 밤엔 주로 땅고 추며 논다. 맘 놓고 춤 출 좋은 세상을 염원한다.

이 기사는 월간 <참여사회> 3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슬릭 패미니스트 여성의날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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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가 1995년부터 발행한 시민사회 정론지입니다. 올바른 시민사회 여론 형성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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