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소 고지 포스터

▲ 핵소 고지 포스터 ⓒ 판씨네마(주)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논어> '안연'편엔 내용과 형식에 관한 멋스런 이야기가 하나 등장한다. 전국시대 위나라 대부 극자성과 공자의 제자 자공이 나눈 대화로 극자성이 "군자는 질박하기만 하면 된다. 문채(文彩)가 있으면 무엇하겠는가"하고 말하자 자공이 "무늬도 바탕만큼 중요하고, 바탕도 무늬만큼 중요하다"고 답한 것이다.

무늬와 바탕, 내용과 형식에 대한 논의는 군자뿐 아니라 예술에 있어서도 오래 묵은 주제다. 어떤 이는 내실만 갖췄다면 외연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다른 이는 안팎의 어우러짐이 좋은 예술의 필수요건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

2월 말 개봉한 <핵소 고지>를 보며 이 같은 논의의 해답이 무언지를 자문했다.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편집과 음향상을 받으며 기술적인 면에서 극찬을 받은 이 영화는, 그러나 무늬만큼 훌륭하지 못한 바탕을 가졌다는 혹평과도 마주한 상태다. 혹평은 대개 감독의 인식과 관련된 것으로 전쟁의 상대방인 일본군을 바라보는 시선, 영웅화 작업에 대한 거부감, 지나치게 폭력적인 묘사의 당위성 등에서 출발한다.

전쟁영화이자 위기극복의 성장드라마

핵소 고지 종교적 신념에 따라 집총을 거부하면서도 전쟁에 참전하길 원한 데스먼드 도스(앤드류 가필드 분).

▲ 핵소 고지 종교적 신념에 따라 집총을 거부하면서도 전쟁에 참전하길 원한 데스먼드 도스(앤드류 가필드 분). ⓒ 판씨네마(주)


우선 <핵소 고지>가 어떤 작품인지부터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얼핏 영화는 안데르센의 동화 <미운 오리 새끼>가 걸어간 길을 그대로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오리들과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받은 오리가 마침내 아름다운 백조임을 알게 된다는 유명한 역전드라마 말이다.

영화는 2차대전 당시 오키나와 전투 실화를 배경으로 한다. 진주만 습격 이후 본격 참전해 일본 본토 공략에 나선 미국은 요충지인 오키나와를 점령하기 위해 핵소고지에서 일본군과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였다. 핵소고지를 포함한 오키나와 여러 곳에서 미군은 막강한 화력지원을 바탕으로 수차례에 걸친 진격작전을 감행했다. 일본군의 역습에 4만이 넘는 전사자가 나왔지만 미군은 끝내 핵소고지를 정복, 오키나와를 넘어 일본의 항복을 받아냈다.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의무병 데스먼드 도스(앤드류 가필드 분)는 핵소고지 전투의 영웅이다. 전투 중에 친한 동료를 잃은 도스는 신에게 자신의 역할을 물은 끝에 핵소고지에 홀로 남아 무려 75명의 부상병을 구한다. 그의 활약은 미군의 사기고양으로 이어지고 영화는 핵소고지를 탈환하는 미군의 모습과 함께 생존자의 인터뷰를 담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종교적 신념으로 집총을 거부하고 의무병으로 참전해 주변의 편견과 무시를 감내해야 했던 주인공이 끝내 영웅적 활약을 펼친다는 <미운 오리 새끼>식 구성이 영화에 극적 재미를 더한다.

데스먼드 도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덧입히다

핵소 고지 쓰러진 동료를 끌고 전장을 빠져나가는 데스먼드 도스. 도스는 핵소 고지 전투에서 총 한 자루 없이 무려 75명의 부상자를 구했다.

▲ 핵소 고지 쓰러진 동료를 끌고 전장을 빠져나가는 데스먼드 도스. 도스는 핵소 고지 전투에서 총 한 자루 없이 무려 75명의 부상자를 구했다. ⓒ 판씨네마(주)


멜 깁슨이 그린 도스의 이야기는 일견 예수 그리스도의 일대기처럼 보인다. 일본군의 총탄에 위협받고 동료들의 괴롭힘에 고통받는 그의 모습은 로마 점령군과 유대민족 모두에게 억압받은 예수와 여러모로 흡사하다. 집총을 거부하는 도스의 신념은 적인 일본군 이전에 주변 동료들에게 위협받는다. 그러나 도스는 신에게 길을 물은 끝에 끝내 신념을 지켜낸다. 영화가 신념으로 표현했으나 그 본질은 신앙에 가까운 신념이다.

반전이란 주제를 위해 지나친 폭력묘사를 했다는 일각의 비판이 있지만 그건 영화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영화는 세간의 평과 달리 내용과 형식이 교묘히 맞물린 영리한 작품이다. 멜 깁슨은 더없이 폭력적인 전투의 장을 창조해 놓고 이 가운데 재림한 예수의 일대기를 빚어냈다. 그에게 최종 목적은 데스먼드 도스의 영웅화도 전쟁의 참혹성을 부각시키는 것도 아닌, 현실 가운데 신의 행적을 따른 이의 모습을 복원하는 것이다. 신의 뜻을 따른 인간의 모습을 그려 참담한 현실 가운데 예수의 길을 탐색하는 것이 이 영화의 첫째가는 목표다.

불편한 건 내용과 형식에 앞서 존재하는 작가의 시선이다. 멜 깁슨은 영화 가운데 도스의 상대가 되는 일본군을 괴물처럼 왜곡하고 뭉그러뜨린다. 영화에서 미군의 몇배로 죽어가는 일본군은 불굴의 악마처럼 존재할 뿐 도스나 그의 동료와 같은 인간의 모습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설정으로 그가 전하려는 말은 무엇일까. 전작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그랬듯, 죄를 거듭하는 구제불능 피조물의 가운데에 재림예수를 그려넣고자 한 건 아니었을까.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노숙인 자활을 위한 잡지 <빅이슈>와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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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오마이뉴스 스타팀에서 방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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