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연 감독의 영화 <해빙> 포스터.

이수연 감독의 영화 <해빙> 포스터.ⓒ 롯데엔터테인먼트


위노나 라이더와 안젤리나 졸리의 출연으로 주목받았던 영화 <처음 만나는 자유>. 불면과 우울증, 마약 중독으로 정신병원에 갇힌 10대 소녀들을 통해 '병든 미국'의 모습을 우회적으로 그려낸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내레이션이 어제 들은 듯 선명하다.

"1960년대가 사람들을 정상적으로 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랬다. 미국의 1960년대는 합리적 이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람을 피부 색깔로 나눠 차별하는 인종적 편견이 여전히 존재했고, 케네디를 포함한 주요 정치인의 피살 뉴스가 때마다 TV에 등장했으며, 정치는 끝 간 데 없이 우측으로만 치달았다. 뿐인가. 베트남에선 이유도 모르고 전쟁에 끌려간 젊은이들이 매일같이 죽어갔다. 잠 못 드는 밤과 약물남용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

잠시 철학자 흉내를 내보자. 시대가 '토대'라면 영화는 '상부구조'의 하나다. 상부구조는 토대의 하위개념이다. 이는 "영화는 시대를 투영하거나 반영한다"는 문장으로 바꿀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해빙>, 당대 한국 현실의 성공적 반영

앞서 말한 <처음 만나는 자유>가 미국의 1960년대의 암울함을 투영하고 있다면, 최근 개봉한 <해빙>은 지리멸렬한 한국의 2017년을 반영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영화적 반영'은 절반 이상의 성공을 이룬 것처럼 보인다.

 <해빙>은 분열과 착란에 빠진 2017년 한국의 상황을 스크린에 성공적으로 옮겼다.

<해빙>은 분열과 착란에 빠진 2017년 한국의 상황을 스크린에 성공적으로 옮겼다.ⓒ 롯데엔터테인먼트


50년이라는 간극과는 무관하게 2017년 한국의 현실은 1960년대 미국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문을 펼쳐보자.

유산에 얽힌 싸움으로 동생이 형을 엽총으로 쏘고, 혼수가 적다고 시어머니와 남편으로부터 학대받던 여성이 15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청와대와 문화체육관광부는 선출되지도 임명되지도 않은 해괴한 권력자 하나로 인해 파탄이 났다. 이것만인가? 중국과 일본 등 인접한 국가와의 외교 갈등은 소시민들에게까지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

이수연 감독은 바로 이 착란과 분열의 풍경 속에서 <해빙>을 연출해야 했다. 단편영화를 포함한 이전 작품들을 통해 비현실적이거나 불합리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파괴된 내면풍경을 섬세하게 그려낸 바 있는 이수연. 아니나 다를까. 이 감독 특유의 연출력은 <해빙>에서도 자연스레 이어진다.

'정상'과 '합리'에서 멀어진 사람들과 이를 부추기는 사회

과도한 욕망으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걷는 의사(조진웅 분), 히스테리와 허영으로 가득 찬 듯한 의사의 아내(윤세아 분), 명품 집착에 빠져 도둑질도 서슴지 않는 간호사(이청아 분), 정체를 짐작하기 힘든 노인(신구 분)과 무언가 거대한 비밀을 숨긴 것처럼 보이는 그의 아들... <해빙>에 등장하는 인물의 절대다수는 세상이 보편적으로 규정한 '이성'과 '합리'의 삶에서 멀어진 이들이다. 비현실적 군상들.

비단 영화의 주연과 조연만이 아니다. <해빙>의 공간적 배경인 서울 외곽 조그만 동네와 의사가 세를 든 원룸, 무시로 등장하는 정육점과 내시경 검사를 하는 진료실까지도 현실의 공간인지 정신분열증에 빠진 인간의 망상이 만들어낸 비현실의 공간인지가 헷갈린다.

이수연 감독은 합리와 이성을 상실한 인물과 분열과 착란을 부르는 공간을 민첩하게 오가며 관객들과 머리싸움을 벌인다. 117분의 상영시간 내내 긴장감과 불안감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밀어붙이기식' 연출의 힘이 만만찮다. 이쯤 되니 "극대화된 스릴과 서스펜스를 제공한다"는 <해빙>의 카피가 장삿속으로 만든 터무니없는 과장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배우 조진웅은 <해빙>에서 발군의 연기력을 보여준다.

배우 조진웅은 <해빙>에서 발군의 연기력을 보여준다.ⓒ 롯데엔터테인먼트


드물게 칭찬을 쏟아낸 영화이니 하나만 더 치켜세우자. 2017년 '병든 한국'의 현실을 영화 속으로 끌어온 <해빙>. 감독이 영리하게 깔아놓은 복선과 세련된 반전. 이와 더불어 <해빙>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기둥은 조진웅이다. 내가 과문해서일까? 이전엔 몰랐다. 그가 이 정도로 연기 잘하는 배우인줄. 눈빛과 말투는 물론, 손짓까지… 진짜 조현병 환자라고 해도 믿길 정도다.  

<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등의 저자. 경북매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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