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를 소재로 한 또 한 편의 영화가 등장했다.

위안부를 소재로 한 또 한 편의 영화가 등장했다. ⓒ (주)엣나인필름


일제강점기 말인 1944년. 한마을에 사는 종분(김향기 분)과 영애(김새론 분) 두 소녀는 요샛말로 각각 흙수저와 금수저다. 넉넉잖은 집안 형편과 남동생만 바라보는 부모 탓에 학교도 다니지 못하는 종분과 달리, 영애는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해 일본 유학 후 교사가 되는 게 목표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의 일상이 갑작스레 무너진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알 수 없는 어른들에게 끌려가 기차를 타고 알 수 없는 곳을 향한다. 또래의 수많은 소녀와 함께 도착한 곳은 이역만리인 중국 만주 어딘가다. 이들은 감옥과 다를 바 없는 좁다란 방 안에 갇혀 지내게 된다. 밤낮없이 일본군들이 줄지어 찾아오고, 악몽 같은 나날들이 이어진다.

영화 <눈길>은 '위안부'라는 소재를 통해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된 여성의 고통을 조명한다. 한 가정의 귀한 딸이자 누나, 여동생이었던 두 주인공이 전쟁 물자이자 보급품으로 전락하는 전개를 통해서다. 소녀들은 하루아침에 인간의 존엄성을 철저히 유린당하면서 더할 나위 없는 비극을 맛본다. 이해할 수도, 있을 수도 없는 '재난' 앞에 이들은 무력하다. 도망치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하는 이들의 삶은 지옥 그 이상이다.

 영화를 통해 구현된 현실은 강렬하다.

영화를 통해 구현된 현실은 강렬하다. ⓒ (주)엣나인필름


위안부에 끌려간 영애가 느끼는 비애감은 그래서 강렬하다. 이름대로 귀한 집 '영애'(令愛)였던 영애와 수직 추락을 겪은 영애 사이의 간극은 엄청나다. 그가 짓밟힌 자존감을 견디다 못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부르짖는 건 당연하다. 이런 영애를 보듬는 건 흙수저였던 종분이다. 그는 지옥 같은 위안부 생활 속에서도 희망을 간직한다. 언젠가 다시 엄마와 동생을 만날 거란 생각으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지낸다. 영애는 마마상과 일본군에게 고개를 숙이는 종분이 통 마음에 들지 않지만, 종분은 "조금만 견디면 고향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해맑게 말한다. 영애가 느끼는 자괴감은 종분을 통해 일말의 희망으로 변모하고, 다른 세계를 살아온 두 소녀는 불행과 맞서는 과정에서 비로소 연대한다.

어린 종분의 이야기 중간중간 등장하는 현재의 종분(김영옥 분)의 에피소드 또한 의미심장하다. 특히 현재를 살아가는 종분이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여고생 은수(조수향 분)와 인연을 맺는 전개는 어린 종분-영애의 구도와 맞물려 기시감을 자아낸다. 사회적 안전망에서 벗어나 어른들에게 이용당하고 착취당하는 은수의 상처는 위안부의 기억을 떨쳐내지 못한 종분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과거의 소녀와 현재의 소녀가 조금씩 서로를 이해해 가는 과정은 여전히 사회적 약자인 여성 청소년의 현주소를 가볍지 않게 짚고 넘어간다.

 <귀향>과 여러모로 닮은 영화 <눈길>. 여기에서도 과거와 현재가 교차한다.

<귀향>과 여러모로 닮은 영화 <눈길>. 여기에서도 과거와 현재가 교차한다. ⓒ (주)엣나인필름


<눈길>은 여러모로 앞서 개봉한 <귀향>과 닮았다. 위안부를 소재로 한 두 소녀의 이야기라는 점이나, 과거와 현재의 서사가 연결되어 서로 교차하며 전개되는 점도 그렇다. 다만 <귀향>이 일제의 잔혹성을 비극적으로 조명하는 데 집중했다면 <눈길>은 두 소녀의 내면을 좀 더 섬세하게 파고든다. 위안부란 소재를 역사적 사건으로 대하기에 앞서 한 여성이 살아온 삶의 경로로써 바라본다. <눈길>이 일제강점기를 겪은 우리나라는 물론 시대와 지역을 아우르는 약자의 서사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지난 1일 개봉.

눈길 김새론 김향기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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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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