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까칠하게 공연을 보고, 이야기 합니다. 때로 신랄하게 '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잘 만든 작품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하지 않을까요?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작품들이 더 많이 올라오길 바라봅니다. [편집자말]
괴물 같은 연극 <베헤모스> 지난 2월 1일 서울 충무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개막하여 지난 2일 폐막한 연극 <베헤모스>의 공연 이미지. 드라마스페셜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기득권층의 부패와 범죄, 그리고 그 와중에 극단적으로 대상화되어 공격받는 여성 피해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괴물을 잡기 위해서는 괴물이 되어야만 하는 이 이야기는 관객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 괴물 같은 연극 <베헤모스>지난 2월 1일 서울 충무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개막하여 지난 2일 폐막한 연극 <베헤모스>의 공연 이미지. 드라마스페셜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기득권층의 부패와 범죄, 그리고 그 와중에 극단적으로 대상화되어 공격받는 여성 피해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주)PMC프로덕션


여성주의적인 서사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 가장 크게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여성 캐릭터를 쓰는 방법. 객체화, 대상화되며 존재하던 여성 인물을 주체로 끌어올린다. 이 과정에서 여성 서사에는 일종의 롤 모델이 생긴다. 서사적인 다양성을 넘어 영화나 연극 등 재현 예술에 종사하는 여성 배우들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여성들이 어떻게 사회 속에서 '여성'이 되는가, 그들이 받는 억압이나 차별 등의 현실을 그려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이게 단순히 기존 서사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억압이 억압으로 존재하는 과정을 잘 다뤄내는 게 중요해진다.

여성주의적인 서사에 대한 이야기를 떠나 '사회 비판적인', 이른바 진보적인 텍스트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소위 사회, 특히 자본주의 사회를 꼬집는 영화나 연극 속에서도 여성이란 존재는 종종 배제됐다. 그들은 객체로 존재한다. 사회를 꼬집는 '진보' 텍스트에서도 무시되는 여성 문제 때문에, 영화계에는 이른바 '진보 한남' 영화로 불리는 작품도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와 여성 혐오는 발자취를 함께 한다. 국가에 의해, 자본에 의해 여성은 수도 없이 배제되고 지워지며 억압받았다. 그런데 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진보 텍스트 속에서도 여성은 배제됐을까, 여성주의적인 텍스트를 다뤄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에 연극 <베헤모스>는 '아니'라고 이야기 한다.

최근 <벙커 트릴로지>로도 잘 쓰인 '여성' 서사로 호평을 받은 김태형 연출의 연극 <베헤모스>는 드라마 스페셜 <괴물>을 리메이크하며 무대화했다. 놀라운 이야기이다. 이런 부류의 서사는 대개 젠더 감수성을 제대로 갖추기 힘든 소재이다. 여성이 죽었고,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남성이다. 남성 배우와 여성 배우의 성비만 해도 여성 배우는 한 명인 반면에 남성 배우는 4명이나 되지 않는가. 하지만 <베헤모스>는 원작보다 더 훌륭한 리메이크를 선보이며 지난 2일, 공연을 마쳤다.

베헤모스, 이는 무엇일까

괴물 같은 연극 <베헤모스> 지난 2월 1일 서울 충무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개막하여 지난 2일 폐막한 연극 <베헤모스>의 공연 이미지. 드라마스페셜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기득권층의 부패와 범죄, 그리고 그 와중에 극단적으로 대상화되어 공격받는 여성 피해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괴물을 잡기 위해서는 괴물이 되어야만 하는 이 이야기는 관객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 누가 괴물인가괴물을 잡기 위해서는 괴물이 되어야 한다. 누가 진짜 베헤모스인가.ⓒ (주)PMC프로덕션


처음 '베헤모스'라는 괴물, 즉 '악'은 변호사와 한태석, 그리고 이사장 같아 보인다. 살인과 죄 따위를 묻으려는 행위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 괴물에 맞서는 '선'은 청개구리 오 검사로 보인다. 하지만 이 베헤모스가 과연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었을까. 과연 그 괴물이 이 변호사였을까, 아니면 이사장이었을까. 변호사가 뒤에 업었던 괴물 베헤모스가 과연 오롯이 이사장만이었을까.

스스로 선을 자처하며 이 변호사를 '악'으로 규정하던 오 검사는 이 변호사를 이기기 위해서였든, 혹은 자신의 욕심이었든, 결과적으로 권력과 손을 잡는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 권력, 괴물 베헤모스와 손을 잡는 것이다. 베헤모스는 이사장으로 대표되는, 현 사회를 지칭한다.

표면적인 의미에서의 '정의 구현'은 분명 오 검사를 통해 이뤄졌다. 자칫하면 <베헤모스>는 그 과정에서 뻔하고 뻔한 권선징악 플롯을 따랐을 수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베헤모스>는 그렇지 않았다. 오 검사는 선인이 아니었다. 그는 결국 이 변호사를 이기기 위해, 그리고 어쩌면 자신의 욕심으로, 스스로 괴물, 이 사장과 손을 잡았다. 그는 괴물을 잡았다. 하지만 그는 극 속에서 선인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는 정의 구현을 이뤄냈다.

하지만 이 정의 구현이 정말 정의 구현이던가. 진정 사회가 좀 더 나아졌던가? 결과적으로 이 변호사는 '무죄' 판결을 받는다. 그 자신이 갈망하던 요트를 산다. 태석은 다시 여자를 만나고 무대에선 서민아가 내내 죽어있던 그 호텔과 같은 위치의 호텔에 가 여자를 만난다. 직전에 눈물을 흘리며 마치 선한 행동을 할 것처럼 굴던,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던 태석의 모습과 겹쳐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이사장은 국회의원이 되며 오 검사 또한 오진욱 부장검사가 된다.

괴물이 되어버린 인간들을 상징하는 이 변호사, 이사장, 한태석, 그리고 오 검사를 통해 <베헤모스>는 괴물이 괴물을 낳아버리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폭로한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도덕성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겨우 돈'이면 다 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폐허를 지적하고 있다. 동시에 이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만연해 있는 한, 어떤 인간의 도덕성도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그 개인의 도덕성이 취약해서가 아니다. 현 사회가, 너무도 거대한 '베헤모스'이기 때문이다.

베헤모스, 그리고 여성

괴물 같은 연극 <베헤모스> 지난 2월 1일 서울 충무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개막하여 지난 2일 폐막한 연극 <베헤모스>의 공연 이미지. 드라마스페셜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기득권층의 부패와 범죄, 그리고 그 와중에 극단적으로 대상화되어 공격받는 여성 피해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괴물을 잡기 위해서는 괴물이 되어야만 하는 이 이야기는 관객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 미디어 속의 여성여성의 이야기를 전하는 목소리도 여성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 속에서, 여성은 철저하게 대상화된다. 그리고 명명된다. 'XX녀'라고.ⓒ (주)PMC프로덕션


<베헤모스>가 가장 놀라웠던 점은 이 베헤모스 같은 사회 속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객체화되는지, 또 여성 혐오가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정확히 보여줬다는 점이다. 공연에선 여성들이 어떤 식으로 미디어에서 다뤄지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어떤 성폭행이나 살인 사건 등이 존재했을 때 그녀들은 '꽃뱀' 같은 소리를 먼저 듣는다. 그녀가 범죄의 피해자여도 말이다. 그 순간 살해당한 여성은 '죽어도 싼 꽃뱀'이 되는 것이고, 남성은 '해야 할 도리를 한' '되려 불쌍한' 사람이 된다.

이는 사회의 흔한 여성 혐오를 그대로 드러냈다. 각종 범죄의 피해자가 된 여성은 매체나 여론, 미디어를 통해 또 한 번 폭력에 노출된다. 그녀들은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꽃뱀이라는 식의 비난을 받거나 성희롱당하기도 한다. 결국 <베헤모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민아는 마약을 한 꽃뱀으로 전락했다. 살해당한 서민아는 '스위트룸녀', '커터칼녀', '마약녀'로 불린다. 하지만 한태석은 어떠했던가. 한태석은 그런 꽃뱀에게 발목 잡힌 불쌍한 명문대 모범생으로 이야기됐을 뿐이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여성 인물들을 멀티 역의 배우가 모두 소화한다는 점이 인상 깊다. 사실 연극에서 멀티 캐릭터의 활용은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인원을 가지고 공연을 해야 하기에, 다른 영화 등에서는 볼 수 없는 연극만의 매력이다.

이는 연출적으로 꽤 많은 바를 시사한다. 여성 멀티 배우는 극 중에서 서민아, 뉴스 리포터, 법의관을 모두 소화해낸다.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무대 뒤편의 호텔 1103호의 피투성이 침대에서 누워있던 서민아가 일어나 옷을 입고 다시 리포터나 법의관이 된다. 사회 속에서 여성들은 21살의 서민아이든, 뉴스의 리포터이든, 법의관이든 모두 그저 하나의 '여성'으로 기능한다. 극 중 남성 인물들은 여성을, 죽은 여성을 교환하고 거래하면서 그들 남성들 간의, 혹은 남성들만의 이야기를 쌓아간다. 여성의 죽음으로 그들의 권력과 힘, 그리고 입지는 달라진다. 그들에게 여성과 여성의 죽음은 그들의 권력을 쟁취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그 여자가 한태석의 어머니였든, 오진욱의 동생이었든, 혹은 서민아였든 말이다. 그들은 '죽은 여성'이라는 하나의 공통점으로 기능했다.

이는 마지막 결말에서 정의의 여신상이 되어버리는 멀티 캐릭터에서 또 한 번 드러난다. 그녀는 마치 서민아가 죽기 전 한태석과 호텔 1103호에 들어갔던 것처럼, 호텔에 들어간다. 그녀의 눈에는 검은 천이 둘려있다. 그녀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녀는 그 상태로 이제는 부장검사가 된 오진욱의 책상 위에 올라간다. 그녀는 여전히 서민아가 입던 옷을 입고 있다. 그녀는 또 다른 '서민아'였다.

사회에 의해 '꽃뱀'이라는, 이른바 '창녀'로 분류되는 여성과 '정의의 여신상'이 되어버린 여성을 한 배우가 보여준다. <베헤모스>는 창녀/성녀의 이분법적인 사고관을 폭로한다. 결국, 여성이 창녀이든 성녀이든, 그녀가 꽃뱀이라 비난받든, 여신이라 칭송받든 이는 모두 여성이 객체화되는 방식이다. '꽃뱀'으로 그려지는 서민아는 죽었고 한태석의 기억 속에서만 발언권을 가진다.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리고 침묵한다. 그들은 이 사회에서 주체가 되지 못한 채, 객체로 존재한다.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뤘는데, 여성은 이질적으로 그저 '여신'으로 존재한다.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못 한 채로, 상황을 자조하는 듯 웃으며 말이다.

멀티 캐릭터가 정의의 여신상이 되기 전, 그녀는 뉴스 리포터로서 이 변호사가 '무죄'로 판결 났다는 사실을 전한다. 더불어 그 '무죄' 판결로 남성들끼리 행정 소송을 걸고 재심 요청을 하는 것 따위 또 하나의 '남성들끼리의' 쟁취, 싸움을 이야기한다. 남성들의 이야기를 하며, 그녀는 운다. 겨우겨우 말을 이어간다. 그 순간은 100분 동안, 정말 처음으로 그 '여성'의 목소리가 극장에 퍼져 울리는, 더 나아가 사회에 울려 퍼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조차도, 그녀가 하는, 그리고 해야 하는 이야기는 결국 남성의 이야기였다. 이 신에서 관객들, 특히 여성 관객들은 수많은 여성 혐오 범죄와 그 범죄가 다뤄지고 보도되는 방식, 그리고 사회에서 받아온 여성으로서의 억압을 상기하게 된다. 그 순간 그녀는 뉴스를 보도하지만 동시에 이 땅의 수많은 여성을 대변하는 존재가 된다.

또한, 여성 혐오적 사회를 드러내기 위해 <베헤모스>가 던지는 유죄와 무죄에 대한 질문도 인상 깊다. 극 속에서 한태석과 이 변호사, 그리고 이사장은 한태석의 '무죄'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유죄와 무죄. 그 단어 자체는 죄가 있다/없다를 각각 지칭한다. 하지만 정확히 하자면 유죄와 무죄는 이는 '법정에서 판결된' 죄가 있다, 없다를 의미한다. 더 나아가, 어떤 끔찍한 죄를 저질러도 법정에서 인정되지 않으면 그 죄는 무죄이다. 그 죄가 설사 살인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베헤모스, 관객들을 갖고 놀다

괴물 같은 연극 <베헤모스> 지난 2월 1일 서울 충무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개막하여 지난 2일 폐막한 연극 <베헤모스>의 공연 이미지. 드라마스페셜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기득권층의 부패와 범죄, 그리고 그 와중에 극단적으로 대상화되어 공격받는 여성 피해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괴물을 잡기 위해서는 괴물이 되어야만 하는 이 이야기는 관객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 <베헤모스>가 던지는 질문지난 2일 막을 내린 작품이지만, 이 작품이 남긴 질문은 오래도록 관객들의 마음 속에 남을 것이다.ⓒ (주)PMC프로덕션


<베헤모스>는 관객들의 심리를 잘 이용했다. 어떤 서사를 접하는 데에 있어 관객들은 나도 모르게 '선'과 '악'을 설정한다. 보통은 주인공이 선이 되곤 한다. 그리고 그 악이 무찔러질 때,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베헤모스>는 표면적으로 선으로 오검을, 악으로 이변을 설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그 선과 악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베헤모스>를 보는 관객들은 나도 모르게 '그래서 누가 서민아를 죽인 걸까?'에 집착한다. 물론 누가 서민아를 죽였는지를 알고 그 살인자를 처벌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뿐일까. 서민아를 누가 죽였든, 그녀는 죽었다. 한태석이 죽였든 이변이 죽였든 그게 뭐가 중요한가. 한태석은 살인미수범이고 이변은 살인범이다. 한태석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인을 방관했고 이변은 살인했다. 이때 한태석이 오검의 손을 잡는다고 한태석이 선이 되는가. 아니면 오검이 진짜로 '정의 구현'을 하는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서사에 익숙해지던 관객들은 저도 모르게 이 <베헤모스>를 보러 객석에 앉아있을 때도 이 '선'과 '악'을 설정하고, 이에 따라 공연을 보는 데에 열중하게 된다. <베헤모스>는 관객들의 심리를 정확히 이용했다. 권력을 지닌 그들에게 선과 악의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했다. <베헤모스>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한 여성의 죽음과 그 죽음을 거래하는 세 인물을 통하여 누군가의 죽음을 소비하는 척한다. 그리고 그 '척'은 마지막 결말에서 뒤집힌다. 결국, 그 선과 악의 구분이 무의미했다는 점, 그들은 결국 하나의 베헤모스에 잠식당한 인물들이었고 그들 중 누구도 선이 아니었다는 점을 보이며 말이다.

<베헤모스>는 유쾌한 연극이 아니다. 이 공연을 관람하고 나서는 길은 발걸음이 무겁다. 이 공연이 고발하고 있는 거대한 괴물과 현실이 너무도 사실적이기에 더욱 끔찍하다. 오 검사는 베헤모스를 무찌르기 위해 베헤모스와 손을 잡고 베헤모스가 되길 택했다. 그러기에 베헤모스는 죽지 않았다. 이 사회는 여전히 수많은 '서민아'들을 '꽃뱀' 'XX녀' 따위의 이름으로 부른다. 부정의는 넘쳐나고, 그 속에서 여성들은 객체화된다.

하지만 이 100분 남짓한 러닝 타임의 공연 내에서 그려진 현실은 관객들을 끊임없이 베헤모스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어쩌면 이 연극은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사실을 방관할 것인지, 아니면 폭로할 것인지. 베헤모스와 싸우는 그 과정에서 똑같이 베헤모스가 될 것인지, 아니면 그러지 않을 것인지 따위의 질문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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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까칠하게 공연을 보고, 이야기 합니다. 때로 신랄하게 '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잘 만든 작품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하지 않을까요? / 해외 관극도 함께하며, 잘 만든 서사를 기다리는 중.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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