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목 '문라이트'는 앨빈 맥 캐런의 각본 'In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에서 따왔다.

영화 제목 '문라이트'는 앨빈 맥 캐런의 각본 'In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에서 따왔다. ⓒ AUD


흰색 카라티를 입고 파란색 가방을 멘 조그마한 아이가 도망가고 있다. 긴 나뭇가지를 손에 쥔 아이 몇 명이 그 뒤를 쫓으며 "호모 새끼 잡아"하고 소리친다. 도망치던 아이는 빈집으로 숨어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따라오던 아이들은 집 밖에서 거칠게 문을 두드리고 돌로 창문을 깨며 아이를 위협한다. 겁을 집어먹은 채 귀를 꼭 막고 바닥에 주저앉아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는 '리틀'.

밖이 잠잠해지자 조심히 움직이기 시작한 리틀의 발에 챈 건 깨진 주사기였다. 주사기를 눈 위로 치켜들어 구경하려는데 또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숨을 죽인 채 서 있는 리틀 앞에 후안 아저씨가 나타난다. 후안 아저씨는 방어적인 리틀의 눈치를 살피며 부드럽게 아이를 밖으로 유도하고 이 만남으로 둘은 친구가 된다.

리틀이 리틀로 불리는 건 키가 작기 때문. 리틀은 말이 거의 없다. 늘 위축돼 있다. 눈은 슬프거나 공허하다. 우울한 꼬마 아이 리틀은 흑인이다. 리틀의 엄마는 마약 중독자다. 아빠는 없다. 리틀 엄마에게 마약을 파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랑 많고 다정한 마약상 후안 아저씨. 기운 없이 시무룩해 있는 리틀을 데리고 바닷가에 놀러 갔던 날, 후안 아저씨는 리틀에게 수영을 가르치곤 이렇게 말한다.

"네가 어떤 사람이 될지 너 스스로 결정해야 해. 그 결정을 남에게 맡기지 마."

자신을 찾아 나서다

 바닷가에 앉아, 달빛을 받으며, 두 아이는 이야기를 나눈다.

바닷가에 앉아, 달빛을 받으며, 두 아이는 이야기를 나눈다. ⓒ AUD


하지만 꼬마 아이 리틀은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기만 하다. 아이들이 자신을 '호모'라 부르며 놀리는 이유도 모르겠고, '호모'의 뜻도 모르겠고, 언제쯤 자신이 '호모'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테레사에게 이름을 말해줄 때 "샤이론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리틀이라 불러요"하고 말했던 건 정말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겠기에 그랬던 거다. 어린 샤이론 앞에 서 있는 거대한 세상은 편견 가득한 모진 눈으로 샤이론을 낮춰 부르고, 세상의 뜻대로 리틀은 한껏 움츠러든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리틀은 소년이 된다.

영화 <문라이트>는 총 3부로 나뉘고, 각각의 제목은 샤이론의 이름이거나 별칭인 리틀, 샤이론, 블랙이다. 2부 제목이 샤이론인 이유는 2부가 시작되는 첫 장면에서 밝혀진다. 카메라의 시선은 천천히 한 소년의 옆모습을 비추고, 그 시선은 은밀하고도 조용히 소년의 코와 움직이는 입술, 침을 꿀꺽 삼키는 목울대를 따라간다. 그리고 그 시선이 바로 샤이론의 시선이다. 남자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샤이론은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달은 뒤이고, 그래서 삶도 더 혹독해진다.

엄마의 마약 중독은 더 심해졌고, 후안 아저씨도 떠났으며, 샤이론을 놀리는 아이들은 더 잔인해졌다. 아이들을 피해 철저히 혼자가 된 샤이론이 자신의 이름인 "샤이론"을 작은 목소리로 읊조린 건 어쩌면 후안 아저씨가 생각나서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는 내가 결정하겠다는, 그 어떤 편견과 억압이 나를 짓눌러오더라도 나 자신을 속이지는 않겠다는 의지로.

그렇게 혼자가 된 샤이론 앞에 문득, 문득 뜬금없이 얼굴을 내미는 케빈. 샤이론이 리틀이었을 때도 케빈은 왜 맞고만 있느냐며 리틀을 도발하고 리틀에게 힘을 줬었다. 늘 곁에 있지는 않지만, 잊을만하면 찾아와 아무렇지 않은 듯 농담을 하고 은근 위로도 하며 샤이론의 기분을 북돋워 주는 친구.

그날도 샤이론이 달빛 비추는 바닷가에 홀로 앉아 있을 때 케빈이 찾아왔다. 둘은 나란히 앉아 저 하늘 위 달빛을 받으며 함께 마리화나를 나눈다.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온다. 케빈은 살아가는 중에도 가끔 지금과 같은 바람을 느낄 수 있고, 그때마다 마치 모든 것이 잠깐 멈춘 듯한 기분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 기분이 아주 좋다고. 샤이론도 그렇듯 시간이 멈추는 순간에 들리는 건 심장박동 소리뿐이라고 맞장구치고, 어쩌면 샤이론은 이때 그런 바람 같은 존재가 케빈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슬프고 답답한 샤이론의 삶에서 '유일한' 기쁨은 케빈뿐이라고.

가끔은 너무 많이 우는 통에 자신이 눈물방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샤이론. 그런 샤이론에게 케빈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묻고, 바다 앞에서, 달 아래에서 그것을 하게 해준다. 둘이 헤어지는 순간, 영화가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샤이론은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하루가 지나자 또 눈물로 변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케빈의 가게에서 와인을 마시며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아슬아슬한' 대화를 나눈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케빈의 가게에서 와인을 마시며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아슬아슬한' 대화를 나눈다. ⓒ AUD


3부가 시작되고 근육질 늠름한 어른이 돼 있는 샤이론을 보면서 나는 이 영화를 어떻게 분류할지 나름 가늠해 봤다. 물론 하나의 분류에 딱 맞아 떨어지지야 않겠지만 <라라 랜드>를 '로맨스 영화'로 분류할 수 있다면, <문라이트>는 '성장 영화'로 분류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3부에서 샤이론은 분명 성장해 있었다. 결국, 마약상이 되어 버렸다는 한계는 있지만 적어도 더는 놀림이나 모욕을 받는 처지에 있지는 않았으며, 한편으로는 후안 아저씨처럼 너그럽고 부드러운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 한 장면을 보고 마음이 멍해졌다. 밤 중에 케빈의 전화를 받은 샤이론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 그 표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그 얼굴에는 꼬마 시절의 리틀과 소년 시절의 샤이론의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순하고, 선하고, 슬프고, 상처받고, 아픈 아이의 표정.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느닷없이 또다시 샤이론의 삶으로 불쑥 들어온 케빈의 목소리에 샤이론은 어쩔 줄 몰라하며 겨우 말을 이어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사람의 만남. 영화에서 꽤 긴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이 만남은 지금껏 본 영화 속 장면 중 가장 순수하고 사랑스러웠다.

3부의 제목 '블랙'은 흑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케빈이 샤이론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이 별명을 케빈이 붙여줬다는 사실 그 자체가 샤이론에게는 큰 의미이다. 리틀에서 샤이론, 샤이론에서 블랙. 아이는 성장하며 세 단계를 거쳤다. 타인에 의해 정체성을 확립하던 리틀의 단계,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하던 샤이론의 단계,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넘어 지향점을 향해 나아가는 블랙의 단계. 블랙의 지향점은 사랑이었고, 블랙의 사랑은 케빈이었다. 영화의 엔딩 장면을 보며 나는 이 영화를 '로맨스 영화'로 기억하기로 했다. 그것도 너무나 순수하고 애틋한 로맨스 영화로.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황보름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문라이트 리틀 샤이론 블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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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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