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성 정체성 장애, 흔히 다중 인격 장애라고 불리는 정신 질환은 영화나 소설, TV드라마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소재입니다. 사람은 같은데 어느 순간 완전히 다른 인격의 소유자가 되어 버리는 캐릭터는 창작자들의 상상력을 오랫동안 자극해 왔습니다.

범죄자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주목적인 범죄 미스터리에 투입하여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갑자기 표변한다는 점이 주는 섬뜩함을 활용하여 공포물에 집어 넣거나, 다른 인격으로 행동했던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소동을 이용하여 코미디를 만들 수도 있지요.

이 영화 <23 아이덴티티>는 정신 장애를 가진 캐릭터의 범죄 행각을 다룬 전형적인 사이코 스릴러물의 외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23개의 인격을 갖고 있는 케빈(제임스 맥어보이)은 그간 억눌려 있던 범죄 성향의 인격들이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생일 파티를 마치고 귀가하던 여고생들을 납치하고 감금하기에 이릅니다.

영화의 가장 큰 매력, 제임스 맥어보이

 영화 <23 아이덴티티>의 한 장면. 늘 외톨이로 지내는 케이시(아냐 테일러-조이)는 행복하게 자란 중산층 자녀인 다른 친구들과 생일 파티 후 함께 귀가하려다가 습격을 받고 밀실에 갇힌다. 둘로 정확하게 나뉜 화면 구도는 그들이 엇갈리는 운명을 상징한다.

영화 <23 아이덴티티>의 한 장면. 늘 외톨이로 지내는 케이시(아냐 테일러-조이)는 행복하게 자란 중산층 자녀인 다른 친구들과 생일 파티 후 함께 귀가하려다가 습격을 받고 밀실에 갇힌다. 둘로 정확하게 나뉜 화면 구도는 그들이 엇갈리는 운명을 상징한다.ⓒ UPI 코리아


피해자 중 한 명인 케이시(아냐 테일러-조이)는 공포스런 상황 속에서도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하려 분투합니다. 한편, 케빈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한 주치의 플레처 박사(베티 버클리)는 그가 숨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인내심을 갖고 상담을 지속해 나갑니다.

영화의 중후반 정도까지는 범죄자-피해자-수사관의 역할을 맡은 세 명의 캐릭터가 만들어 내는 팽팽한 긴장감이 돋보이는 편입니다. 언제 표변할 지 모르는 다중 인격을 가진 케빈, 자신의 트라우마를 복기하며 기회를 엿보는 케이시, 의학적 접근 방법을 통해 '비스트'라 불리는 케빈의 새로운 인격의 정체를 엿보고자 하는 플레처 박사의 존재는 차츰 서로 얽혀 들면서 흥미진진한 전개를 만들어 냅니다.

특히 케빈이 가진 다양한 인격을 완벽하게 표현한 제임스 맥어보이의 연기는 이 영화의 가장 매력적인 볼거리입니다. 강박증 있는 냉혹한 소시오패스 커플을 번갈아 연기하고, 어딘지 모자라는 9세 악동의 모습을 실감나게 재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소름이 돋습니다. 인물별로 표정, 말투, 몸짓을 다르게 설정하는 등 세부 묘사에 집중한 전략이 아주 효과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결말부는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할 때 약간 맞지 않고 튑니다. 마치 수퍼히어로물에서 악당이 탄생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처럼, 만화적으로 과장된 설정과 악당 특유의 장광설이 등장합니다. 심지어 감독의 전작 <언브레이커블>과 동일한 세계관이라는 암시도 나오지요. 그래서 약간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감독 M. 나이트 샤말란은 <식스 센스>로 최고의 찬사를 받은 이후, 여러 작품을 연출해 왔지만 늘 전작에 비해 못 미친다는 평가를 받아 왔습니다. 그런 세간의 평가는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장르적으로 충분히 더 매끈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자신의 취향과 주제 의식에 따라 집어넣은 설정들을 고수하느라 영화가 좀 늘어지거나 덜컹거리는 경향이 있었거든요. 이 영화에서도 그런 면모는 여전합니다.

하지만 <라스트 에어벤더>나 <애프터 어스> 같이 높은 제작비의 SF 모험물을 연출했다가 흥행에 크게 실패한 후, 저예산 호러/스릴러 장르를 시도한 <더 비지트>와 이 작품 <23 아이덴티티>의 성공으로 다시 흥행 감독 대열에 복귀한 것은 축하할 만한 일입니다. 다음 작품으로 기획하고 있다는 <언브레이커블> 속편도 진행에 탄력을 받을 수 있겠지요.

인물이 겪은 고통에 공감하게 만드는 '드문' 영화

 영화 <23 아이덴티티>의 한 장면. 케빈(제임스 맥어보이)의 여러 인격들 중 하나로 발현된 9세 소년 헤드윅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소녀들을 구경하고 있다. 제임스 맥어보이의 연기력이 잘 발휘된 장면.

영화 <23 아이덴티티>의 한 장면. 케빈(제임스 맥어보이)의 여러 인격들 중 하나로 발현된 9세 소년 헤드윅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소녀들을 구경하고 있다. 제임스 맥어보이의 연기력이 잘 발휘된 장면.ⓒ UPI 코리아


이 영화는 최근 몇 년간 꾸준히 등장하여 흥행 대박을 친 몇몇 저예산 할리우드 호러물들처럼 등장인물의 고통과 공포를 전시하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대신 주요 인물들이 겪었을 고통의 시간들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려고 노력합니다.

해리성 정체성 장애를 현상으로만 다루지 않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짚어 보는 장면을 넣은 것, 케빈의 다중 인격 장애를 촉발시킨 어린 시절의 플래시백과 케이시가 갇혀 있는 동안 끊임없이 떠올리는 과거의 기억들을 주로 인물의 시점샷으로 처리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끔찍한 학대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식으로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하고, 그로 인해 일종의 가학적 쾌감을 충족하려 하는 일반적인 저예산 호러 영화의 방식과는 차별화 되는 부분이지요.

평탄하게 자란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변의 누군가가 겪고 있을, 아동 학대나 성희롱 같은 말 못할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둔감합니다. 이 영화 도입부에서 친구들이 평소 외톨이처럼 구는 케이시를 두고 하는 말들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이상함만을 탓할 뿐이지요. 또한 언론 보도 등을 통해 그것이 알려진다 하더라도 가십으로 소비하며 분노하긴 하지만, 정작 피해자의 상황이나 정신적 트라우마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 속의 '비스트'가 '아무 고통 없이 자란 너희들은 고통을 좀 맛봐야 돼' 라며 폭주하는 모습은, 과장된 설정이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다른 이들의 불행을 어떤 식으로 대했는지 반성하게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영화 <23 아이덴티티>는 '제작비 대비 높은 수익률을 올린 흥행 감독의 귀환'이기도 하지만, '장르 규칙과 관행을 종종 위배하며 자신만의 취향과 주제 의식을 지켜왔던 예술가의 건재'를 보여 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더 반갑습니다.

 영화 <23 아이덴티티>의 포스터. 끔찍한 장면을 전시하듯 보여 주면서 가학적인 쾌감을 자아내는 데 집중하는 일반적인 호러/스릴러 영화와는 달리, 아동 학대 피해자의 감정과 고통을 헤아리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영화다.

영화 <23 아이덴티티>의 포스터. 끔찍한 장면을 전시하듯 보여 주면서 가학적인 쾌감을 자아내는 데 집중하는 일반적인 호러/스릴러 영화와는 달리, 아동 학대 피해자의 감정과 고통을 헤아리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영화다.ⓒ UPI 코리아



덧붙이는 글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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