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이끌 지도자가 가져야 할 덕목은 무엇일까요? 오마이스타는 드라마와 영화 등을 통해 '리더의 조건'을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김수로, 광개토태왕, 근초고왕, 진흥왕, 선덕여왕, 태종무열왕, 세종, 광해군, 정조. 비교적 최근에 텔레비전 사극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 왕들이다. 이들을 다룬 드라마의 공통점은 거의 한결같이 '친서민' 코드로 주인공을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사극이 주인공을 친서민 군주로 조명하는 방법 중 하나는, 노예 생활 같은 극단적 경험을 거쳐 왕이 된 것처럼 묘사하는 것이다. 배우 지성이 나온 MBC <김수로>, 감우성이 나온 KBS <근초고왕>, 이태곤이 나온 KBS <광개토태왕> 등은 노예생활이나 그에 못지않은 고난을 거쳐 왕이 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극이 주인공에게 시련을 부여하는 것은 전통적인 영웅 서사시의 정형이 그렇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이유가 있다. 거기에는, 시련을 겪은 지도자만이 대중과의 공감 혹은 소통 능력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양극화 심화로 서민층의 기운이 들썩이는 지금, 사회통합을 이루려면 그런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고려가 깔려 있는 것이다.

지도자의 '서민 체험'

 <광개토태왕>의 광개토태왕(이태곤 분).

<광개토태왕>의 광개토태왕(이태곤 분). ⓒ KBS


그런데 왕조시대 사람들의 눈에, 왕은 하늘이 보낸 거룩한 존재였다. 그래서 그 시대 군주들은 민주공화국 시대의 대권 후보들처럼 일부러 서민 행세를 할 필요가 없었다. 시장에 가서 낯선 국밥집 사장을 껴안을 필요도 없고, 입에 안 맞는 길거리 음식을 미소를 띠며 먹을 필요도 없었다. 군주가 그런 모습을 보이면 오히려 이미지만 깎일 뿐이었다.

최근 미국의 공화당 경선과 대선 유세에서, 다른 후보들이 서민 행보를 연출하는 동안 도널드 트럼프는 일부러 고급스럽게 유세를 다녔다. 자동차나 기차를 이용하는 여타 후보들과 달리, 그는 자신의 이름이 크게 새겨진 보잉 757 전용기를 타고 다녔다.

그게 싫증나면 비즈니스 제트기나 헬기에 올라탔다. 2015년 8월 15일에는 82억짜리 시콜스키 헬기에 아이들을 태워주는 쇼까지 연출했다. 시장에서 아이를 끌어안고 뽀뽀나 해주는 후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런 트럼프의 행동을 그대로 따른다 해도 옛날 왕들은 문제가 없었다. 군주는 일반인과 다른 신성한 존재여야 한다는 인식이 세상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인들한테는 노예 출신 군주가 자격미달이었다. 노예 생활을 경험한 왕들은 자신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높이 떠받들 필요가 없다는 게 고대인들의 관념이었다. 영웅은 시련을 겪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시련을 기대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고대인들이 생각하는 영웅의 시련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 찾을 수 있다. 단군왕검의 혈통을 이어받은 고주몽이 고구려 건국 전에 동부여 대소 왕자의 괴롭힘을 받은 것처럼, 기본적으로 거룩한 신분을 가진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고난이나 박해를 받는 게 고대 영웅의 정형적인 시련이었다. 노예 생활은 그런 시련에 포함되지 않았다. 참고로, 주몽이 단군왕검의 혈통을 받았다는 사실은, 왕들의 내력을 정리한 <삼국유사> 왕력 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이 생각한 영웅의 시련은 노예 생활과 무관했는데도, 최근의 사극들이 왕들의 노예 체험을 자주 보여주는 것은 21세기 시청자들의 기호에 맞추기 위한 것이다. 그런 체험을 해본 지도자라야 서민 대중을 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다.

사극이 친서민 군주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또 하나의 방법은 MBC <선덕여왕>,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MBC <이산>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선덕여왕>은 복지정책에 관심을 쏟는 군주의 모습을 보여줬고, <이산>은 기득권층에 맞서 서민층을 보호하는 정조 임금의 모습을 보여줬다.

영화 <광해>에서는 광대 출신의 가짜 광해군(이병헌 분)을 등장시켰다. 가짜 광해군은 서민 수업을 따로 받을 필요가 없었다. 태생적으로 서민이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친서민 개혁을 추진하는 실제 광해군의 모습에, 서민 의식을 뼛속 깊이 가진 가짜 광해군의 모습을 오버랩시켰다. 군주가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어떤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하는지 그런 식으로 보여준 것이다.

사극이 주인공을 친서민 군주로 조명하는 또 다른 방법은, 백성을 위해 죽을힘을 다하는 왕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KBS <대왕세종>, SBS <뿌리깊은 나무>, KBS <장영실>은 잠자는 시간만 빼놓고 하루 종일 백성과 나라만 생각하는 세종의 삶을 묘사했다.

실제의 왕과 사극 속의 왕

그런데 실제의 왕들은 사극 속의 왕들보다 열심히 일했다. 그냥 열심히 일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뼈가 부서지고 몸이 으스러지도록 더 열심히 일했다. 세종의 경우가 특히 그랬다. 이 점은 그의 허리 사이즈 변화를 통해 실감할 수 있다.

세종은 스물두 살에 왕이 됐다. 이 당시 그의 몸매가 음력으로 세종 즉위년 10월 9일자(양력 1418년 11월 6일자) <세종실록>에 묘사되어 있다. 이 대목에서 <대왕세종>과 <장영실>의 배우 김상경, <뿌리깊은 나무>의 송중기(청년 세종)와 한석규(장년 세종)를 연상하면 안 된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당시의 세종은 몸이 뚱뚱하고 무거웠다. 운동을 게을리 하고 움직이기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몸매가 그렇게 됐던 것이다.

 <뿌리깊은 나무>의 청년 세종(송중기 분).

<뿌리깊은 나무>의 청년 세종(송중기 분). ⓒ SBS


그랬던 세종이 왕이 된 뒤 허손병을 앓았다. 몸이 현저하게 수척해지고 허약해진 것이다. 임금 된 지 4년 뒤인 스물여섯 살 때 그랬다. 비만으로 고민했던 사람이 불과 몇 년 새에 홀쭉해졌던 것이다.

<세종실록>에 나온 의료 기록들을 종합하면, 그 뒤 세종은 온갖 병을 다 앓았다. 당뇨병은 평생을 따라다녔다. 이로 인해 하루에 한 동이 이상의 물을 마실 때도 있었다. 30대 초반에는 왼쪽 다리 통증과 등의 통증으로 고생했다. 등이 아파서 마음대로 돌아눕지도 못했다.

30대 중반부터는 어깨 통증이 만성질환이 됐다. 이후로는 체중도 더욱 급속도로 감소했다. 45세부터는 눈도 잘 보이지 않았다. 지팡이 없이는 밤중에 다니기도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말년에는 언어장애와 중풍 증세까지 겹쳤다. 한글 창제를 위해 언어를 연구한 인물이 언어장애를 앓고 있었던 것이다.

뚱뚱하고 무거웠던 세종이 불과 몇 년 만에 몸이 홀쭉해지면서 온갖 질병에 걸린 것은, 직무와 공부에 과도한 시간과 열정을 투입했기 때문이다. 국정 운영에 골몰하느라 건강을 해쳤던 것이다. 유시민이 정리한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의 제3부 끝부분에 이런 말이 있다.

"비가 오지 않아도, 비가 너무 많이 내려도, 다 내 책임인 것 같았다. 아홉 시 뉴스를 보고 있으면 어느 것 하나 대통령 책임 아닌 것이 없었다. 대통령은 그런 자리였다."

세종도 이런 말을 했을지 모른다. 나랏일에 무한 책임을 느낀 그는 뚱뚱하고 무겁던 몸이 불과 몇 년 새에 수척해지고 허약해질 정도로, 또 몸 전체에 아프지 않은 데가 없어 그야말로 종합병원이 될 정도로 자신의 모든 것을 국정운영에 다 바쳤다. <대왕세종>, <뿌리깊은 나무>, <장영실>에 나오는 몸매 좋은 세종의 모습은 진짜 세종이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뿌리깊은 나무>의 장년 세종(한석규 분).

<뿌리깊은 나무>의 장년 세종(한석규 분). ⓒ SBS


세종뿐 아니라 정조 임금도 지나치게 열정적으로 국무를 처리하다가 건강을 해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마흔아홉에 세상을 떠난 결정적 원인은 바로 그것이었다. 독살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죽기 직전의 치료 과정이 석연치 않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그 나이에 최후의 병석에 눕게 된 결정적 이유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서민층을 위한 개혁을 고심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이런 왕들이 볼 때는, 나랏일만 생각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궁궐이나 안가에서 개인적 안락에 빠져 시간을 허비하고 그로 인해 권력을 상실하는 군주들이 한심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꼭 연산군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대한민국 시대의 박정희·박근혜 두 대통령도 별반 다르지 않다.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적으로 반독재 시위가 들끓는 와중에도 안가에서 환락에 빠져 지낼 때가 많았다. 이로 인해 판단력이 떨어진 탓에, 최측근 중앙정보부장이 역심을 품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비슷하다. 그는 청와대 안에서 자기 몸과 안위에 과도한 신경을 쓰며 살았다. 국민이나 정권 안보는 안중에 없었던 듯하다. 세종·정조를 포함해서 사극에서 열성적 군주로 묘사되는 이들은 대한민국 시대의 박·박 대통령처럼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항상 경계하며 열심히 살았다.

사극은 박근혜 정부와 반대방향으로 간다

서민층의 불만과 단결력은 날로 강해지고 있다. 양극화 심화 때문만은 아니다. 적은 비용으로 손쉽게 대중을 단결시킬 수 있는 SNS도 그런 경향을 촉진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의 사극에 나올 군주들은 한층 더 친서민의 모습을 띠게 될 것이다.

그래서 미래의 사극에 나올 군주들은 실제 역사기록과 무관하게, 한층 더 혹독한 서민 체험을 하고 한층 더 진지하게 개혁을 고민하고 한층 더 열심히 직무를 수행하는 왕들이 될 것이다. 그런 사극을 시청하는 국민들도 대통령에 대해 더 높은 기대치를 갖게 될 것이다.

이런 경향은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에도 기여할 것이다. 대선 후보들도, 시장 같은 데서 억지로 서민 흉내만 내는 차원을 넘어, 진짜로 서민 의식을 함유하고 국민통합 의식을 가슴 속에 내재시키는 쪽으로 스스로를 개조하려 노력하게 될지 모른다.

또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더욱 더 서민층을 위하도록 강제하는 사회적 압력이 높아질 것이다. 재벌이 아닌 서민층과 손을 잡아야만 박근혜처럼 되지 않을 거라는 강박 관념이 대통령들을 지배할 것이다. 광해군과 정조처럼 다수 국민을 위해 살지 않으면 청와대 코앞에 언제 또다시 100만 시위대가 출현할지 모른다는 공포심이 청와대의 공기를 내리누를 것이다.

그런 경향은 대통령의 여가 활용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쉬는 시간에 무심코 텔레비전 리모컨을 들었다가도 '박근혜처럼 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 얼른 자리로 돌아가는 대통령도 생길지 모른다. 세종처럼 뼈가 으스러지고 몸이 축나도록 일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박근혜처럼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24시간 내내 항상 깨어서 국민과 나라를 생각하는 대통령들이 많이 등장하게 될지도 모른다.

대통령선거
댓글10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오마이뉴스 23년차 직원. 시민기자들과 일 벌이는 걸 좋아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은솔아, 돌잔치 다시 할까?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