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신작 <23 아이덴티티> 포스터.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신작 <23 아이덴티티> 포스터.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강고했던 사회주의공화국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를 앞두고 흔들릴 무렵인 1980년대 후반.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라는 '문학적 제목'을 가진 영화가 제작됐다. 한국에서도 개봉된 이 영화가 던진 파문을 지금은 40대를 넘겨 50대로 가고 있는 몇몇 영화팬들은 기억한다.

영화는 마르크스가 만들고 레닌이 현실화시킨 이데올로기가 아닌, 유입된 서방의 외부 자본이 구(舊) 소련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비틀거리기 시작한 당대의 사회상을 보여준다. 당시의 사회상을 그 시대를 산 여성들 속에 투영시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충돌하는 실상을 핍진하게 보여준 영화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이 작품은 할리우드 상업영화에 익숙해져 있던 한국의 관객들에게 여러 가지 놀라움을 선사했다.

30년 전 '옛날 영화'를 떠오르게 한 나이트 샤말란의 신작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연극적 진행방식'을 영화 속으로 대거 도입했다는 것이다. 도저한 러시아 전통 무대예술의 성취가 영화라는 '보다 새로운 표현방식'에 성공적으로 이식됐다. 이는 '형식의 틀을 살피며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찬사와 박수를 불렀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10대 후반에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를 본 필자가 47살이 됐다.

최근 개봉한 나이트 샤말란의 새로운 작품 <23 아이덴티티>는 시간을 소급해 그 옛날 영화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식스 센스>와 <해프닝>, <더 비지트> 등을 통해 보여준 샤말란의 다양한 영화적 실험은 <23 아이덴티티>에서도 지속된다. 23가지의 다중 인격을 가진 사이코패스와 위기에 처한 3명의 소녀 이야기를 통해.

 나이트 샤말란 감독은 <23 아이덴티티>에서 '연극적 연출의 힘'을 보여준다.

나이트 샤말란 감독은 <23 아이덴티티>에서 '연극적 연출의 힘'을 보여준다.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이번 영화의 경우엔 그 실험의 절정이 '연극적 형식의 과감한 도입'으로 드러나고 있다. 많게는 분당 수십 컷으로 구성되는 통상의 현란한 상업영화와 달리 <23 아이덴티티>는 심각한 설정 속에서도 화면 전환이 많지 않아 영화가 아닌 연극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보통의 스릴러 영화를 보면서는 가질 수 없는 감정이다.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는 카메라가 고정된 채 한 장면이 10분 이상 지속되는 경우도 있었다.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영화가 아닌 무대 위에서 상연되는 연극 같다는 이야기다. 분명 감독의 의도가 담겼을 '연극적 연출'은 관객의 집중력을 높임과 동시에 영화로의 몰입을 우회적으로 유도한다. <23 아이덴티티> 역시 그렇다. '연극적 영화'의 향기가 물씬 풍겨오는 것이다.

이런 연극적 장치는 수십 개의 자아를 가진 분열적 인간 케빈(제임스 맥어보이 분)의 내면 풍경과 보편의 상식에선 이해하기 힘든 행위의 이유를 설명하는 유효적절한 방법으로 작동한다. 이와 더불어 3명의 소녀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케이시(안야 테일러 조이 분)의 공황상태를 효과적으로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

아주 간략한 이야기구조 속에서 시작돼 누구나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는 해결방식으로 마무리되는 <23 아이덴티티>. 다소 심상할 수도 있는 이 영화를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보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 '연극적 형식의 연출'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긴장감 넘치는 연극 한 편을 본 기분... 그러나 아쉬움도

케이시가 과거를 회상하는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케빈이 만든 '감금실'과 정신병원 '상담실'이라는 제약된 공간만을 오가며 전개되는 <23 아이덴티티>는 관객들에게 영화라기보다는 잘 만들어진 한 편의 심리연극을 본 듯한 착각을 준다. 큰돈 들이지 않은 연극 무대장치 같은 배경으로 요즘 영화들에선 느끼기 힘든 감정적 만족을 선물하는 것이다. 이런 성취는 분명 나이트 샤말란의 내공에서 연유했을 터.

 나이트 샤말란 감독(좌)과 <23 아이덴티티>의 주연 제임스 맥어보이.

나이트 샤말란 감독(좌)과 <23 아이덴티티>의 주연 제임스 맥어보이.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도 있다. 다중인격자 케빈과 거대한 비밀을 숨긴 소녀 케이시가 일상과 평범을 상실해야 했던 이유가 '어린 시절의 OO체험'(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자세히 쓸 순 없다) 때문이란 결말은 수많은 영화와 소설에서 거듭 보아온 흔한 것이라 조금은 허무하다.

그러나, 분명 말할 수 있다. <23 아이덴티티>는 흠결보다 장점이 많은 영화다. 인도 출신의 명민한 감독 나이트 샤말란. 다음번엔 어떤 '영화적 실험'으로 우리를 놀라게 할까? 기다림을 주는 예술가는 좋은 사람이다.

제임스 맥어보이 나이트 샤말란 23 아이덴티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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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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