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화의 흥행과 관계없이 매력 충만한 작품들을 열린 감각으로 그러모아 세심하게 해석하는 공감의 기록입니다. [편집자말]
 아내 나츠코(후카츠 에리)가 해주는 사치오(모토키 마사히로)의 마지막 이발.

아내 나츠코(후카츠 에리)가 해주는 사치오(모토키 마사히로)의 마지막 이발. ⓒ 영화사 진진


미용사였던 아내가 여행 중 버스 추락 사고를 당했다. 20년 동안 아내 말고 딴 사람에게 머리를 자른 적 없는 저명한 소설가 사치오에게 아내가 죽던 밤은 다른 세계였다. 어쩌면 그 날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와 아내 나츠코의 세계는 줄곧 달랐을지 모른다. 그가 잘 팔리는 소설가가 되기 훨씬 전부터 그랬을 것이다. 틀림없이 잘 될 거라며 소설가의 꿈을 뒷바라지한 아내 나츠코는 여행을 떠나기 직전, 그 밤에도 남편의 머리 손질을 해준다. 오래전부터 때가 되면 능숙한 가위질로 인해 잘려나가 바닥으로 추락한 머리카락. 잘린 머리카락처럼 떨어지고 싶지 않은 소설가의 권위 옆에서 조용히 추락해왔던 사치오와 나츠코의 관계.

변하지 않는 건 없다. '변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기어코 변하고 말았구나.' 체념하게 되는 일이 유독 '사랑'에 관해서는 박하다.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와 계절의 변화, 변화되어 흐르는 시간, 끊임없이 자라나는 손발톱과 머리카락. 변화무쌍한 것들이 천지인데 유독 감정에 관해서는 고정을 요한다.

무엇이든 '그래야만 하는 것'은 없다. 사랑이 변할 수도 있다는 긍정이 주는 마음의 평온은 상당하다. 그것은 죽음과도 관계가 있다. 변할 수 있는 감정, 죽음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은, 계산기처럼 딱 떨어지지 않는 관계의 묘함을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다. '늘 그래왔기 때문에'로 고정된 관계는 갑작스러운 변화를 맞이하였을 때, 더욱 취약해진다. 아내가 없으면 밥도 빨래도 어려운 남자. 아내가 없이는 머리손질을 할 수도 없는 남자. 변해도 되는 관계는 변하지 않은 척 유지되다가 잘렸을 때 그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

'사실은 우리 이랬었다고.'
'그간 많이 힘들었다고.'

이후의 변명은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간 못했던 말들과 차마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풀어내기 위한 시간은 관계가 끝난 후 꼭 필요하다.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고 전처럼 행복을 꿈꾸는 삶으로 돌아가려면 말이다.

여기 아내의 죽음 후 긴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한 남자의 괜찮지 못한 삶으로 들어가 본다.

괜찮다, 괜찮지 않다

 아내 나츠코와 그녀 친구 유키의 죽음 이후 유키 가족을 돌보는 사치오.

아내 나츠코와 그녀 친구 유키의 죽음 이후 유키 가족을 돌보는 사치오. ⓒ 영화사진진


자존감 바닥인 스스로를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그런 자신에게서 탈피할 수 없는 사치오. 자기애가 과하면 곁에 있는 이의 감정에도 무심해진다. 결코, 아내가 바라는 삶에 눈을 뜰 수 없던 그는 자신 일생 가장 중요한 순간을 지지하고 함께한 아내의 죽음에서 특별한 감정의 동요를 느낄 수가 없다. 그러나 충격을 받든 어떤 특정한 사건이 있었든 간에 적극적인 감정표현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이 억지 '도피'라는 점에 착안한다.

괜찮은 척 사는 것은 상처받지 않기 위한 일종의 몸부림이다. 상처에 취약했던 사치오가 선택한 도피는 '괜찮은 척 사는 것'이다. 전혀 괜찮지 않은데도 말이다. 괜찮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걸까. 매번 괜찮지 않아도 되니 힘들 땐 좀 내려놓으라고 말이다. 사치오 뿐만이 아니다. 엄마가 죽고 나서도 트럭으로 전국을 떠돌며 생계를 이어가야 할 아빠를 제외하면, 어른이 아무도 없는 집. 그 집에서 어린 동생 아카리를 돌보아야 하는 건 당연히 죽은 유키의 아들 신페이였다.

어느 중학교를 지원할 것이냐는 사치오의 질문에 중학교에 갈 시험을 치지 않는다고 말하는 신페이의 눈빛엔 체념이 있다. 학교에 갈 수 없는 상황에도 괜찮아야만 하는 성숙한 아이의 심경은 엄마의 죽음 이후로 견고해진 장벽 같은 것. 상처받지 않기 위한 몸부림은 어른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정말로 신페이에겐 물어봐 줄 어른이 필요했던 것이다. 자신과 너무도 닮은 어른 사치오에게서 날아오던 질문은, 포기하고 괜찮은 척 사는 것이 사실은 어린 소년에게는 버겁기만 하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너는 그래도 괜찮아?"

우는 남자... 그리고 울지 않는 남자

 사치오(모토키 마사히로)와 요이치(타케하라 피스톨)은 같은 시간, 장소에서 둘다 아내를 잃었다.

사치오(모토키 마사히로)와 요이치(타케하라 피스톨)은 같은 시간, 장소에서 둘다 아내를 잃었다. ⓒ 영화사진진


아내의 죽음에도 터져 나오지 않던 울음. 감정의 도피가 익숙한 사치오. 그에 반해 아내 나츠코와 함께 여행을 떠났던 동창 유키의 남편 요이치는 갑작스런 배우자의 죽음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슬픔에 휩싸인다. 아내 유키가 여행을 떠나며 남긴 음성메시지를 저장하여 반복 재생하는 요이치. 밤새도록 운전 하며 고립된 그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은 가족이다. 그런데 사랑하며 가장 의지하던 아내가 죽었다. 절망 같은 날들 속에서도 어린 자식들을 위해 트럭 운전대를 놓을 수 없는 그는, 비집고 나오는 감정과 필사적으로 대면한다.

작년 가족여행 사진만 봐도 예기치 못하게 울음이 터져 나오는 요이치는 아내와 관련한 모든 일상, 사물에게서 여전히 아내를 본다. 그리고 그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솔직한 남자이다.

"모두 자네처럼 솔직하지 않아."

소설가의 섬세하고 순수한 감성은 개인사를 대할 때 드러나는 솔직하지 못한 감정과는 별개의 것이다. 누구도 신경 쓸 것 없다는 듯 자신의 감정을 분출하는 요이치에게서 사치오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어떤 것들을 본다. 그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슬픔은 타인의 솔직함으로 미룬다.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핑계로 제대로 울지 않는 남자 사치오. 마음껏 울 수 있는 자와 울지 못하는 자의 간극은 어느 누구 편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연출된다.

슬픔을 꺼낼 수 없는 가슴 속 깊은 감정은 그간 무엇으로 채워져 있던 것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사치오. 솔직할 수 없던 소설가가 그간 써내려간 글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아내 죽음 이후 변화된 그의 생활은 몰랐던 것들을 알아가는 과정임과 동시에 소설가로서의 성장까지도 포함한다.

사랑해도 좋을 사람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사람은 안다. 함께 할 때 더 꼭 안아주지 못했던 상대를 그제야 진정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아내가 비극적 사고로 죽은 뒤에야 아내가 죽던 밤, 자신의 실체를 마주하는 사치오. 성공과 자기애에 빠져 곁에 있던 아내를 붙들지 못했다. 분명 사랑한다 믿었던 아내가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 욕망과 별개의 존재가 되어 버렸다. 사랑과 욕망은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애초에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욕망의 한 종류가 아니었던가.

묵묵히 곁을 지키던 아내를 향해 사그라든 변화된 욕망이 가지를 뻗쳐 삶을 집어삼켰고, 아내 나츠코는 그런 그를 알았는지 알지 못했는지 확인할 수 없는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도로 위에서 참변을 당한 트럭운전사 요이치가 입원한 병원에 그의 아들 신페이를 데리고 가는 기차 안에서는 영화 내내 터지지 않던 사치오의 진짜 속내가 조용히 흐른다. 사랑해도 좋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해서는 소중한 것을 꼭 붙잡아야 한다는 그의 말. 순식간의 헤어짐은 오랜 시간 동안 그에게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뒤늦게서야 터지는 울음은 그 긴 변명의 종착점이다. 아내와 함께 사고를 당한 유키의 가족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끝끝내 자신만의 허구 속에서 빈껍데기로 살았을 사치오.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은, 인생에서 외면하고 살던 소중한 것에 대한 회한으로 돌아온다. 그의 기나긴 변명 끝 이야기는 뒤늦게서야 솔직하다.

'인생은 타인이다.'

 영화 <아주 긴 변명> 포스터. 유명작가가 불의의 사고로 아내를 잃고 난 후….

영화 <아주 긴 변명> 포스터. 유명작가가 불의의 사고로 아내를 잃고 난 후…. ⓒ 영화사 진진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순지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rnjstnswl3)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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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문화, 다양한 사회현상에 관해 공부하고 씁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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