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싱글라이더>는 카타르시스를 자극하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 <싱글라이더>는 카타르시스를 자극하는 영화가 아니다. ⓒ (주)퍼펙트스톰 필름


모든 것을 잃은 남자가 자신의 지난날을 후회하는 여정을 담은 점에 있어서 영화 <싱글라이더>의 주인공 재훈(이병헌 분)은 지난주 개봉한 일본영화 <아주 긴 변명>의 사치오(모토키 마사히로 분)와 닮았다. 차이가 있다면, 매사 책임감 없이 아내에게 전적으로 매달렸던 사치오와 달리 재훈은 책임감이 지나치게 넘쳐난 나머지, 자기 자신을 감당할 수 없어 급격히 무너져 버린다.

이병헌의 열연이 돋보이는 <싱글라이더>는 요즘 한국영화 특히 상업영화로서 보기 드물게 감성적 색채가 짙은 드라마를 보여 준다. 이 영화의 주인공 재훈은 여타 다른 한국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난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을 포함한 세계를 구하지 못한다. 자꾸만 재훈이 무언가를 진행할수록, 재훈이 처해있는 상황은 더욱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 이 영화의 관심은 이미 모든 것을 잃은 남자가 얼마나 더 처절하게 보일 수 있는가에 쏠려있다.

그래도 <아주 긴 변명>의 사치오에게는 죽은 아내를 되살릴 수는 없다 한들, 적어도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더 좋은 사람으로 살 기회라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앞만 보고 달리던 <싱글라이더>의 재훈이 오랜만에 뒤를 돌아볼 때쯤, 모든 것은 돌이킬 수 없이 악화하여있었다.

나 혼자만을 위함이 아니라 가족들을 위한 최선이었다. 그런데 의도와 달리 상황은 점점 꼬여만 간다. 걷잡을 수 없이 파국의 단계에 들어서니, 불현듯 자신을 옭매인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싱글라이더>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구성 아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싱글라이더>를 '잘 만든 영화'라고 하기에는 분명 어려운 점들이 있다.

영화 <싱글라이더>를 '잘 만든 영화'라고 하기에는 분명 어려운 점들이 있다. ⓒ (주)퍼펙트스톰 필름


영화 구성만 놓고 보면, <싱글라이더>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영화다. 언론시사회 공개 전부터 인터넷상에서 잠시 떠돌기도 했던 반전이 확인 사살되는 순간 맥이 턱 풀려버린다. 재훈의 복잡미묘한 시선을 따라 촘촘하게 쌓아 올린 감정선까지 한순간에 무너지는 기분이다.

혹자는 반전이 나오기 전까지의 이 영화를 두고 잔잔함을 넘어선 지루함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사실 반전이 등장하기 전까지, <싱글라이더>는 호주에 사는 아내 수진(공효진 분)과 아들을 찾아가지만, 만나지 못하고 계속 그들의 주위만 빙빙 맴도는 재훈의 모습만 보여준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재훈이 다니던 증권사는 이미 망해있고, 성난 고객들에게 시달리는 재훈은 상당히 지쳐있다. 그의 표현을 빌려 마지못해 버티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재훈의 상황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해설이나 대사가 많은 것도 아니다. 배우 이병헌의 얼굴을 빌린 재훈의 지친 표정과 몸짓이 마지못해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불쌍한 영혼을 대변한다.

한편으로는, <싱글라이더>처럼 인물의 감정선에 충실한 영화가 최근 한국영화 중에 있었나 싶기도 하다. 물론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업영화에서는 찾기 어려웠고, 이들이 집중하는 것은 최근 한국에서 일어났던 굵직한 사건, 사고를 암시하는 재난에 속수무책 당하는 시민들의 안타까운 모습과 버린 부패한 사회지도층,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난 주인공(영웅)의 활약이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의 드라마, 영화계 키워드 또한 대중들 대신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 싸우는 소시민들의 속 시원한 영웅담이다.

그러나 첫 장면에서부터 주인공이 주눅 들어 있고, 심지어 그만의 잘못이 아닌데, 더 나쁜 놈을 대신해 성난 고객들에게 뺨까지 맞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웃을 일 하나 없었던 재훈의 안타까운 모습은 '사이다' 주인공을 원하는 몇몇 대중들에게는 답답한 '고구마'로 비칠 수 있다.

공간 그리고 감정

 호주 로케이션은 훌륭한 선택이었다.

호주 로케이션은 훌륭한 선택이었다. ⓒ (주)퍼펙트스톰 필름


그런데 반전을 뒤로하고,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재훈의 뒤를 졸졸 따라가 보자. 그러면 어느 순간 극 중 재훈이 했던 말처럼 어떻게 살았는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정신없이 살아왔던 자신의 삶이 재훈에게 슬그머니 투영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영화는 걷잡을 수 없이 감정의 늪으로 치닫게 된다. 멋진 외모에 좋은 대학을 나와, 젊은 나이에 증권사 지점장에, 부인과 자식을 호주에 조기 유학을 보낼 정도로 많은 돈을 벌었던 재훈은 사회적 기준으로 봤을 때 대단히 성공한 인생이다.

하지만 금수저는 아니었던 재훈 또한 회사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월급쟁이일 뿐이다. 회사가 망하자 진짜 책임질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재훈에게 그 모든 잘못을 덤터기 씌우는 상황이다. 재훈에게 죄가 있다면,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더 많은 부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지인, 친척, 가족. 심지어 자신의 돈까지 털어가며 부실 채권을 판 것이고, 아내와 아들을 위한다는 이유로, 그들과 충분한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호주로 보낸 것이 될 수 있겠다.

재훈이 생각했던 것처럼, 수진과 아들은 호주에서 잘 지내고 있었다. 아니, 재훈의 상상 이상으로 그들은 재훈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의 힘으로 호주에서 정착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싱글라이더>를 찍기 이전 뮤직비디오, CF 감독으로 활동했던 이주영 감독이 직업상 자주 찾은 곳이라 로케이션 장소를 호주로 정했다고 했는데,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호주라는 배경이 절묘하게 어울리는 탁월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호주는 극 중 지나(안소희 분)이 겪었던 것처럼 이방인들에게 위험한 나라이기도 하지만,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 모두가 쳇바퀴 돌듯 정신없이 살아가는 한국과 달리 여유롭게 살아갈 기회의 땅이기도 하다. 지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혹은 북유럽행을 결심하는 것도 재훈과 같이 신기루 같은 성공에 목매어 살다가 소모되는 삶이 아닌, 인간답게 살고 싶은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호주에서 완전 정착을 위해 호주 시드니 시립 오케스트라 단원 면접을 보러 간 수진은 누군가에 의해 끌려다니는 삶이 아닌 자신이 주체가 되는 삶을 살고 싶다고 한다. 그렇게 수진이 호주에서 주체적인 삶을 꾸려가는 동안, 뒤늦게 그걸 깨달은 재훈은 이미 먼 길을 돌아왔다.

재훈을 반면교사로 삼아,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 식의 뚜렷한 메시지를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적인 아쉬움을 차치하고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게 하는 한국 영화를 만나는 것은 정말 흔하지 않은 경험이다. 악당들을 처단하는 소시민적 영웅들의 맹활약을 통해 답답한 현실에서 쌓인 대중들의 울분을 해소하는 영화들이 많이 출연하는 것은 좋지만, <싱글라이더>처럼 배우의 감정선과 감독의 섬세한 연출에 따라, 자신의 인생을 잠시나마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도 계속 나와줘야 한다. 어쩌면 <싱글라이더>가 관객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느냐에 따라, 요즘 들어 자꾸 문제로 지적 시 되는 한국영화의 다양성 부족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싱글라이더>는 괜찮은 작품이다. 이런 영화적 시도가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싱글라이더>는 괜찮은 작품이다. 이런 영화적 시도가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 (주)퍼펙트스톰 필름



싱글라이더 이병헌 공효진 영화 이주영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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