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주 긴 변명> 포스터. 예고편의 문구가 꽤 어울렸다.

영화 <아주 긴 변명> 포스터. 예고편의 문구가 꽤 어울렸다. ⓒ 영화사 진진


인간은 무언가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그 존재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영화 <아주 긴 변명>(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주인공 사치오(모토키 마사히로 분)는 머리 잘라주는 것부터, 받기싫은 전화를 받는 일까지 다 알아서 해주는 아내 나츠코(후카츠 에리 분)를 내심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런 아내가 사치오 곁을 훌쩍 떠났다. 뒷정리는 좀 부탁할게라는 한 마디만 남기고.

<아주 긴 변명>의 예고편을 보면 이런 문구를 만날 수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를 잇는 감성드라마'.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료타(후쿠야마 마사하루 분)처럼 <아주 긴 변명>의 사치오 또한 피 한 방울 안 섞인 아이들을 키우게 된다. 별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츠코와 함께 사고로 죽은, 나츠코 친구(유키)의 아이들을 보자마자 이 아이들과 함께 있고 싶다는 감정이 들었다.

트럭 운전 때문에 몇날 며칠 집을 비워야 하는 아빠를 대신해 동생 아카리까지 보살펴야 하는 신페이가 안쓰러워 그랬을까. 나츠코와의 사이에서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사치오가 유키의 두 아이를 도맡아 키울 정도로 정이 든 이유를 영화는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사치오의 얼굴과 표정으로 그의 상태를 짐작해볼 뿐이다. 아내가 죽은 이후에도 사치오는 이상할 정도로 의연하다. 나츠코가 집을 나가자마자 내연녀를 집으로 부를 정도로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던 까닭도 있겠지만, 사실 사치오는 많이 참고 있었다. 나츠코가 비명횡사 하고 있던 순간에, 그녀의 침대 위에서 다른 여자와 버젓이 불륜 행각을 벌이던 자신과 같은 파렴치한 인간은 나츠코의 죽음에 슬퍼할 자격도 없다면서, 그렇게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

각자의 상처에 관하여

 영화 <아주 긴 변명> 한 장면. 이들의 상처를 누가 치유해줄 수 있을까.

영화 <아주 긴 변명> 한 장면. 이들의 상처를 누가 치유해줄 수 있을까. ⓒ 영화사 진진


엄마를 잃은 신페이와 아카리의 빈자리를 채워주면서 사치오도 아내를 잃은 상처에서 조금씩 회복되고,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신페이와 아카리에게 온갖 정성을 쏟아붓는 사치오의 행동을 두고 그의 매니저는 "도피"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치오에게 묻는다. 사모님(나츠코)이 돌아가신 이후 진심으로 크게 울어본 적이 있었냐고.

<아주 긴 변명>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처럼 대안 가족의 모델을 제시하는데 의의를 두었다면, 영화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사치오)이 피 한방울도 섞이지 않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진정한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멈추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주 긴 변명>이 진짜 고민하는 지점은 그 이후이다. 자신이 겪은 상처를 숨기기 급급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그 관계가 굳건이 지속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영화가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대단히 회의적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사치오는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요이치(타케하라 피스톨 분)의 여린 마음을 지적하며, 아이들에게 충실할 것을 권유한다. 그런 사치오 또한 신페이, 아카리 남매와의 이별의 상황이 머지 않았음을 직감하는 순간, 폭발하게 된다. 그런데 홧김에 자신이 꽁꽁 숨겨두었던 상처를 털어 놓으니, 비로소 나츠코가 떠난 빈 자리를 빙빙 맴돌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제서야 사치오는 알게 된다. 인생은 타인이라는 것. 소중한 것을 잃게된 이후 생긴 아픔은 누군가를 통해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극복해야 하는 문제임을 자각한 사치오는 그렇게 '아주 긴 변명'을 끝내게 된다.

정말로 긴, 변명

 영화 <아주 긴 변명> 한 장면. 소중한 것은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놓치니까.

영화 <아주 긴 변명> 한 장면. 소중한 것은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놓치니까. ⓒ 영화사 진진


"헤어지는 것은 순간이야. 그러니까 소중한 것이 있다면 꼭 붙잡아 둬."

일년 가까이 친아들처럼 애지중지 돌봐주었던 신페이를 마음 속에서 떠나 보내던 날, 사치오는 신페이에게 이런 당부를 남긴다. 뒤늦은 후회가 만든 인생 성찰이다. 나츠코가 죽고, 그녀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를 깨달아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영원'이 아닌 언젠가는 끝이 보이는 삶을 살고 있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현재에 충실하되,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삶. 돌이킬 수 없는 지난날을 추억 한 켠으로 남기고, 앞으로는 후회하는 삶을 살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는 사치오의 덤덤한 모습에 어느순간 코 끝이 찡해진다. 16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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