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 관계, 슬픔…. 영화는 평화롭게 시작하지만, 갈수록 묵직해진다.

실수, 관계, 슬픔…. 영화는 평화롭게 시작하지만, 갈수록 묵직해진다. ⓒ THE 픽쳐스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시작 장면은 평화롭다. 배 위에는 아빠, 아들, 삼촌이 있다. 짓궂은 삼촌은 어린 조카를 연신 놀려대며 조카의 반응을 즐긴다. 아빠가 더 좋냐, 삼촌이 더 좋냐 하고 묻는 유치한 질문에 조카는 아빠를 선택하고 삼촌은 괜히 억울한 척하며 장난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삼촌인 리는 혼자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리의 얼굴이 달라졌다. 얼굴이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다. 최저임금을 받으며 겨우겨우 살아가는 리의 직업은 잡역부이다. 건물 세입자들은 시시콜콜한 일로 리를 부르고, 리는 세면대나 화장실을 점검하고 변기를 뚫고 건물 밖 눈을 치운다. 해야 할 말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자들의 추파도 모른 척 넘기며, 그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의 표정에 드러난 감정

 이 영화는 슬픔에 관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슬픔에 관한 작품이다. ⓒ THE 픽쳐스


'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하고 관객이 생각하게 될 즈음 리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차를 타고 맨체스터로 향하는 리의 마음은 조급하고 병원에 도착한 리 앞에는 형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리와 이웃 친구, 의사와 간호사. 네 명의 대화는 매끄럽지 않고 뭔가 삐끗거리는 느낌이다. 리를 보는 의사와 간호사의 태도는 형을 잃은 동생을 배려하는 것 이상이다. 관객은 모르지만, 이들은 알고 있는 무엇. 그 무엇이 주는 묘한 긴장감을 통해 감독은 관객을 이야기 안으로 더 바짝 끌어당긴다.

형의 죽음을 맞닥뜨리고도 크게 슬퍼하지 않는 리를 보다가 나는 문득 깨달았다. 형의 죽음 소식을 듣기 전부터 리의 표정은 이미 슬픈 표정이었다는 것. 건물 잡무를 처리하던 리의 얼굴은 무덤덤해 보였던 것이 아니라 슬퍼 보였던 거라는 것. 과거의 언젠가부터 리는 늘 슬펐기에 지금의 슬픔이 도드라져 보이지 않을 뿐이라는 것.

영화는 형의 죽음 이후 리와 조카 패트릭이 만들어가는 일상을 마치 다큐멘터리 찍듯 묵묵히 좇는다. 투덕거리기는 하지만 서로를 좋아하는 게 분명한 리와 패트릭은 어쩌면 둘이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듯 보인다. 입은 거칠어도 눈으로는 삼촌을 살피는 패트릭. 역시나 입은 거칠어도 패트릭을 위해 맨체스터를 견디고 있는 리.

형이 유언에서 리를 패트릭의 후견인으로 지정한 건 단지 패트릭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의 옆에 동생이 있어 주길 바라면서, 한 편으로는 사랑하는 동생 옆에 아들이 있어 주기도 바랐을 것이다. 이제는 동생이 그 날의 아픔에서 벗어나 다시 맨체스터로 돌아오길, 다시 고향의 품으로 돌아오길, 다시 행복해지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삶 틈틈이 치고 들어오는 리의 과거 모습은 이러한 기대를 조용히 물리친다. 그때는 있었고 지금은 없는 것들을 통해 리의 삶이 현재 얼마만큼 망가진 것인지 우리는 알게 된다. 그 날의 사건은 리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다.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이 끝났다.

절제와 자연스러움의 조화

 사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일도 있다.

사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일도 있다. ⓒ THE 픽쳐스


영화 내내 인물들은 자주 실수하고, 자주 사과한다. 대부분의 실수는, 이렇듯 사과만으로도 해결된다. 하지만 그 날의 실수는 결코 사과로 해결할 수 없고 리도 그것을 안다. 그래서 죽으려 했지만 죽지 못했다. 총을 머리에 대고 제발 나를 죽게 내버려달라는 듯 '플리즈'라고 외치던 리의 얼굴은 그가 지금부터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보여주는 듯하다. 세상과 법은 리의 실수에 무죄를 선고했지만, 리는 스스로 죗값을 치르려 한다. 삶이 주는 모든 즐거움을 거부한 채 쓸쓸히 살아가는 방식으로.

영화가 진행될수록 우리는 생각보다 리가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고, 특히 영화의 마지막 즈음에 보게 된 리의 환영은 너무나 끔찍하기만 하다. 아무래도 감독은 영화를 통해 끝나지 않는 고통도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세상엔 사그라지지 않는 슬픔도 있는 법이라고. 세상사 대부분의 상처는 시간의 힘을 빌려 낫거나 잊히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상처도 있는 거라고.

영화는 천천히 흘러가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다. 인물들이 망설이거나 쭈뼛대며 대화하는 모습은 답답함이 아닌 긴장감을 불러오고, 심지어 이 절망적인 스토리 안에 코믹한 설정도 꽤 들어있었다. 무엇보다 리를 연기한 케이시 에플렉의 절제된 연기과 패트릭을 연기한 루카스 헤지스의 자연스러운 연기의 조화가 좋았다.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계속 보고 싶을 정도로.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황보름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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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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