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오는 26일까지 공연되는 연극 <툇마루가 있는 집>. 이 작품은 한 연극연출가가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형 성구의 기일을 맞아 아내와 함께 자신이 어릴 적부터 청년기까지 살았던 옛 한옥을 찾아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은 이곳에서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연극연출가, 자신의 과거를 만나다
▲ 격동의 시기, 그 과거를 다시 마주하는 주인공. ⓒ 창작 공동체 아르케
중년의 연극연출가 진구가 찾은 어린 시절의 집은, 재개발을 앞두고 헐리게 될 예정이지만 아직은 예전 모습 그대로다. 고즈넉한 개량한옥인 이 집에는 여러 개의 작은 방과 툇마루, 우물이 있는 세면장과 작은 연못이 있다. 어린 시절 진구는 마당에 볕이 들면 툇마루에 누워 낮잠을 자곤 했다.
아내가 죽은 성구 형을 위해 흰 국화를 사러 간 사이 진구의 눈앞에서는 믿기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방문을 벌컥 열고 자신을 반긴다. 재미나게도 진구는 영적으로 하늘에 가까운 할머니의 눈에만 보인다. 이내 고무대야를 머리에 인 그의 어머니가 등장하고, 건넛방에 세를 살던 버스안내양 찬숙은 출근길에 오른다.
연극에 심취한 대학생이 된 진구는 술에 덜 깬 얼굴로 방문을 열고 나온다. 청년 진구와 만난 중년의 진구는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30년 전 자신의 과거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년의 진구는 이런 상황을 당황해하면서도 가족들의 삶을 엿보면서 맞장구친다. 행복하고 정겨운 풍경도 잠시, 진구는 가슴 속 깊숙이 감추어뒀던 상처들을 떠올리며 가슴을 치게 된다.
또한, 극 중 주인공 진구와 같이 1970~198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2017년의 중장년들이 각자의 삶에 상처가 되어버렸을 한국 현대사의 상흔과 화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담겨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개인은 물론 가족과 국가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돌아볼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
연극은 지나간 시간인 1983년과 1979년, 그리고 현재의 시간이 교차하고 중첩되면서 이야기가 이어진다. 진구는 과거의 인물들과 같은 공간에 공존하면서 그들의 생활을 엿보기도 하고, 망자가 되어 자신의 제삿날 집을 찾아온 형 성구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극은 충격적인 사건이나 심각한 갈등을 좇는 구조가 아니라, 진구가 조우하는 과거 인물들의 일상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무대 위에 등장하는 각 인물의 세밀한 심리 묘사와 디테일한 비즈니스가 극의 재미를 더해줄 것이다. 더불어 진구가 그들을 엿보며 느끼게 될 정서적 울림을 관객들도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그 시대를 살지 않았어도, 공감할 수 있다
▲ 주인공 가족이 겪는 일은, 이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다. ⓒ 창작 공동체 아르케
누구나 한 번쯤 공상과학 영화 속 이야기 같은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상상하곤 한다. 예를 들면, 후회와 아쉬움이 남는 옛일을 되돌리고 싶거나 지금은 곁에 없는 누군가가 몹시 그리울 때면 이미 흘러가 버린 과거의 한 장면에 자신이 있는 꿈을 꾸는 것처럼 말이다.
진구는 툇마루가 있는 집에서 부모님과 할머니 그리고 형과 함께 살았다. 건넛방에는 자매인 버스안내양 찬숙과 고교생 현숙 자매, 문간방에는 남편이 중동에 가서 일을 하는 임산부인 새댁이, 아랫방에는 술집 작부 정양이 세를 들었다.
유년기 진구는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직업군인 출신 아버지는 사업이 잘 안 되어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내고, 어머니는 그런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런 아버지를 진구는 정말 죽이고 싶어 한다. 부처님을 너무나 사랑하는 할머니는 아들을 대신해 김밥을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이끌었다. 집안의 희망이었던 대학생 형은 1979년 신군부 퇴진을 요구하며 독재정권에 맞서다 목숨을 잃었다.
찬숙과 정양의 삶은 비루했다. 찬숙은 동생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 17살에 고향을 떠나 술집을 전전하던 정양은 몹쓸 병에 걸려 죽고 만다. 죽은 정양의 유품이라곤 헌 속옷 몇 벌과 싸구려 화장품뿐. 돈은 버는 족족 시골에 병든 노모와 동생들에게 전해졌다.
한 편의 수채화 같은 작품은 1970~1980년대 격동의 시기를 살아온 민초들의 힘겨운 삶을 통해 시대적 애환과 아픔으로 담았다. 저마다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툇마루 집. 사람들은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 위로하며 아픔을 나눈다. 그런 면에서 툇마루 집은 현대사회에서 느낄 수 없는 정과 치유의 공간이 된다.
너무도 아픈 시대였기에 한편으로 무거운 마음이 들지만 그들의 일상은 가벼운 분위기로 흐른다. 하지만 그들의 생활 곳곳에 숨어 있었던 아픔, 고통, 상처는 다시 떠올려도 아픈 기억일 것이다. 중학생 진구가 어린 나이에 겪었던 상처가 드러나고 애써 묻어두었던 기억과 조우한 남자는 과거 자신의 모습을 보며 그날의 감정을 되살리게 된다. 그는 마치 과거에 있는 듯 관조적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개인사적 비극, 우리의 아픈 현대사를 토로하다
▲ 연극 <툇마루가 있는 집>의 포스터. 오는 26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상연된다. ⓒ 창작 공동체 아르케
한 집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지극히 개인적인 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더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을 지키지 못했던 성구의 모습은 1970~1980년대 시대의 상처를 드러낸다. 과거는 특히 슬픈 과거이기에 더 아프고 애틋하다. 누구나 저마다의 아픔을 숨기고 살아가지만 애써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그 시절에 아파하며 자신을 위로하게 될 것이다.
이 작품은 김승철 극작가 겸 연출가의 자전적 이야기다. 다시 말해서, 중년의 진구는 작가의 현재 생각을 그대로 반영하며, 젊은 대학생 진구는 작가가 살았던 과거이다. 그가 마음속 깊이 숨겼던 형 성구의 죽음을 둘러싼 기억을 연극 무대에 되살려내 영혼의 화해를 시도한다. 나아가 가족과 이웃 간의 화해를 생각하게 한다.
작품은 2016 공연예술 창작산실 희곡 우수작으로 선정됐다. 공연을 연출한 김승철은 '2015 서울연극인' 대상 연출상 수상과 '2015 공연과 이론' 작품상 수상으로 주목을 받았으며, 이번 작품에서는 무게감 있는 연출로 주제를 심화시켜 관객에게 깊은 감동과 여운을 주고 있다.
멋진 한옥의 풍경은 사실적이고 디테일한 무대와 섬세한 배우들의 연기력은 관객들의 집중도를 높여준다. 중년의 진구 역에 배우 이대연과 장용철이 출연한다. 이밖에 강애심, 이경성, 김성일, 김현중, 구선화, 박시내, 송현섭, 김보라 등이 출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