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스키아>의 한 장면.

영화 <바스키아>의 한 장면. 왼쪽엔 앤디 워홀(데이비드 보위 분), 오른쪽은 바스키아. ⓒ Eleventh Street Productio

  
"(해당 그림을 가리키며) 이 글 좀 해석해주시겠습니까?"
"해석이요? 그냥 글자예요."
"압니다. 어디 글자죠? 어디에서 따온 겁니까?"
"모르겠어요. 음악가에게 음표는 어디서 따오는지 물어보시죠. 당신들은 어디서 말을 따오죠?" - 영화 <바스키아>, 바스키아와 어느 기자의 대화 중에서


캔버스와 벽면을 성의 없어 보이는 선과 면, 그리고 조잡해 보이는 색이 채우고 있다. 십중팔구 사람들은 해당 그림은 물론이고 그걸 그린 작가까지 싸잡아 비난하곤 했다. 영화 <바스키아>(1996)의 일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미국 팝아트를 선도했던, 지금의 그라피티를 대중 예술로 승화시킨 장본인 '장 미쉘 바스키아'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다. '낙서 화가'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 그의 그림은 불과 40여 년 전 미국에선 무의미한 배설물 정도로 취급받곤 했다. 그가 흑인이어서? 물론 그럴 법도 했다. 여전히 미국 사회의 딜레마인 인종차별이 그땐 더욱 심했을 때이니. 바스키아보다 다소 앞서 등장한 앤디 워홀이 상대적으로 매우 이른 나이 '팝의 교황'으로 불리며 사람들에게 인정받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결론적으로 앤디 워홀도 바스키아도 대중과 먼 영역에 있던 시각 예술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이들을 수식하는 '팝(Pop)'이란 단어에서 알 수 있듯 두 사람 모두 불특정 다수에게 영감을 준 아티스트로 현재까지 칭송받고 있다. 예술 작품의 대량 복제화는 물론이고 '위대한 낙서'라는 형용모순이 바로 이들의 업적 일부다.


'설인업'의 예술성
 
 영화 <바스키아>의 한 장면.

영화 <바스키아>의 한 장면. 장 미쉘 바스키아 역은 배우 제프리 라이트가 맡았다. ⓒ Eleventh Street Productio

 
무엇이 대중예술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 갈래겠지만, 대중의 기호를 명민하게 건듦으로써 활발한 논의(그것이 긍정이든 부정이든)를 생산한다면 일단은 대중예술 범주에 들 충분조건은 되지 않나 싶다. 갑론을박을 통해 의미의 환기를 기대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인정받았음에도 "아무도 날 사랑해주지 않아서 쓸쓸하게 집에 갔다. 부활절, 울었다"고 일기장에 쓴 앤디 워홀의 사례를 보자. 대중성과 갑론을박은 이처럼 팝아티스트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일지도 모른다.

이 기준을 적용해 설리를 바라보려 한다. 그렇다. 아이돌 그룹 에프엑스 출신, 지금은 배우의 길을 가고자 하는 청년 최진리다.

이미 그에 대한 여러 글이 나왔기에 새삼스럽게 꺼내는 것 자체가 새삼스럽긴 하지만 여전히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하면 하루 기준 적게는 십여 건, 많게는 백여 건 넘는 기사가 나온다는 점에서 분명 설리는 연구대상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누리꾼 사이에서 유명한 단어 '설인업'(설리 인스타그램 업데이트)이 괜히 나왔을까.

사실 그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각은 단순했다. 남자친구 최자와 교제 사실이 불거질 때 즈음엔 그저 팬서비스에 인색하고 자기 사랑엔 적극적인 '당돌한' 아이돌 정도였다. 그랬던 그가 SNS에 몇 가지의 사진을 연속해서 올리며 논란이 극대화되기 시작한다. 존슨즈 베이비 티셔츠를 입으니 대중은 그에게 소아성애 자극이라 했고,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은 사진엔 얌전하지 못하다, 심지어 더럽다는 원색적 비난까지 등장했다.

설리는 꿋꿋했다. 오히려 그런 대중의 반응에 개의치 않는 듯 과감한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최근 올린 '남녀 성기를 상징하는 듯한 볶음밥 사진'이라든지, '하반신 나체 인형 사진' 등이다. 하루에도 많게는 수천 건의 댓글이 그의 SNS에 달렸고, 대다수가 격한 비난이었음에도 굴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걸 즐기는지 혹은 무시하는지는 본인만 알겠지만 이미 설리 스스로가 논란거리임을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로는 충분하다.

바스키아, 앤디 워홀과 설리의 또 다른 공통점을 찾자면 주변에서 흔히 끌어올 수 있는 모든 걸 대중적 통로를 통해 끊임없이 생산했다는 점이다. 바스키아는 캔버스, 벽면, 말라붙은 지저분한 종이에까지 닥치지 않고 그려댔고, 사람들에게 팔기도 했다. 영화 <바스키아>엔 우연히 만난 앤디 워홀에게마저 자신의 엽서를 팔아치우는 바스키아의 면모가 담겨 있다. 설리는?


 
f(x) 설리, 개미허리는 내가 최고! 걸그룹 f(x)의 설리가 3일 오후 서울 상암동 CJ E&M센터에서 열린 Mnet <엠카운트다운>에서 '밀크'를 열창하며 화려한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설리의 아이돌 그룹 활동 당시 모습. 에프엑스 멤버로 그는 무대 일정을 소화했고, 이후 전업 배우의 길을 택한다. ⓒ Mnet

 
해석의 주체

만약 바스키아가 2017년 대한민국에서 활동했다면 적어도 인종차별은 안 당했을지언정 설리에게 따라붙는 '관종' 내지는 '어그로'라는 별명이 붙지 않았을까. 영화에서 표현한 대로라면 말이다. 영화엔 끊임없이 대중적 성공을 갈망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려 했고, 심지어 마약 중독에 허우적거렸던 바스키아가 묘사돼있다. 연출을 맡은 줄리안 슈나벨 감독이 바스키아의 친구이기도 했으니 과장은 있을지언정 적어도 거짓은 아닐 것이다.

다시 설리로 돌아가 보자. 화제성 면에서만 보자면 설리는 이미 공존하는 국내 팝아티스트보다 월등하다. 고양이 인형 코코 샤넬을 어깨에 지고 뉴욕과 서울 한복판에서 각종 퍼포먼스를 벌인 팝아티스트 낸시랭이 울고 갈 정도다. 낸시랭 또한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포즈, 혹은 대중의 눈을 자극하는 차림새로 자신의 이미지를 한껏 제공해왔다. 그 행위의 의도와 관계없이 이제 우리는 그의 행보를 '팝아트'라 칭하기 주저하지 않는다.

오히려 설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간 면모마저 보인다. 국내 언론, 특히 각종 설과 지라시 기사를 생산하는 연예매체를 대상으로 실험한 흔적이 있으니 바로 '계폭'(계정 폭파)이다. 지난 1월 15일 몇몇 연예 매체는 설리의 인스타그램 비공개 전환 사실을 경쟁하듯 보도했다. 불과 몇 시간 뒤 설리는 이를 지켜보기라도 한 듯 다시 공개로 바꿔놨고, 연예 매체들은 또다시 '공개로 전환'이라는 기사를 쏟아냈다. 그에 앞서 2016년 5월엔 SNS 탈퇴로 보이는 행동을 했고, 역시 연예 매체들은 '설리 인스타그램 탈퇴', 나아가 '연인 최자와의 불화?' 등 원색적 보도도 서슴지 않았다.

 
 설리가 개인 sns에 올린 사진들. 설리는 익살스러운 포즈를 취한 사진들을 통해 '수줍고 예쁜 소녀'라는 틀을 넘는다. 이 사회가 보려하지 않았던 자신의 본 모습을 가감없이 표현하는 것이다.

설리가 개인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들. 설리에게서 '아동성애' '동성애' '문란함'을 읽는 이는 과연 누구인가. ⓒ @jelly_jilli

 
특정인의 SNS에 글을 남기는 행위는 그 자체로 능동성을 전제로 한다. 관심이 있으니 매일 찾아보는 것이고, 뭔가 해석하고 정의하고 싶으니 해당 계정에 댓글까지 남기는 것이다. 이를 매일 지치지 않고 보도하는 연예 매체는 이런 대중의 반응을 효과적으로 증폭 혹은 왜곡시키는 주요한 수단이 된다. 이런 소비 패턴이라면 설리 입장에선 그 반응이 어떠하든 크게 상관하지 않을 수 있다. 의도야 알 수 없지만, 대중이 활발하게 해석해 주니 속은 상할 수 있을지언정, 그게 스타 혹은 연예인으로서의 존재감을 상하게 하진 않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설리는 '팝아티스트'인가. '대중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가장 좋은 예술'이라는 기치로 대중매체를 이용하여 기존 예술의 권위에 도전한 미국 팝아트의 성격을 빌리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콘텐츠의 빠른 확대와 동시에 의미의 활발한 재생산의 면에서도 설리의 SNS 활동은 충분히 팝아트로 인정할만한 요건이다.

너무 진지하다고? 물론 설리가 진짜 팝아티스트가 되고 싶은지 아닌지 그 여부를 직접 파악한 건 아니다. 이 글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은 이런 정의함에도 꾸준한 갑론을박이 이어지길 바란다는 점이다. 그리고 설리는 계속 꿋꿋하게 자신을 표현해주길 바란다. 우린 어쩌면 설리를 통해 한국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주체와 그걸 전하는 매체의 민낯을 가감 없이 '감상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그런 의미에서 설리는 매우 훌륭한 반사경이자 리트머스 종이다. 설리를 팝아티스트로 명명하든 아니든 이미 우린 자신의 민낯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다. 이 지점에서 그의 (의지와는 별개로) 예술성을 인정해보자는 취지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하나 묻고 싶다. 그에게 아동성애를 읽고, 동성애를 읽어내며, 문란함을 읽는 이는 과연 누구인가. 이 글을 쓴 나일까, 혹 익명에 숨어 불특정 다수 중 하나를 자처하는 대중들일까. 우린 모두 설리의 '예술성'을 소비하는 '훌륭하면서도 성실한' 소비자인 건 아닐까.

 
설리 인스타그램 최자 바스키아 팝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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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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