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이 선 넘으면 가만 안 둬."

순이는 짝꿍인 석이에게 을러댔다. 한 번만 더 선을 넘으면 가만 안 둘 것이라고 경고를 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을 석이가 아니다. 석이는 일부러 팔꿈치를 삐딱하게 해서 책상의 금을 넘어 순이가 보고 있는 책을 건드렸다.

"이게 어딜."

순이는 연필로 석이의 책에 홱 선을 그어버렸다. 그걸 본 석이도 질세라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순이 책에 낙서를 해버린다. 그런데 너무 힘을 주어서 그만 책이 찢어졌다. 분을 참지 못한 순이가 파르르 떨더니 그예 울어버렸다. 순이의 울음을 본 석이는 난감했다. 이러려고 그런 게 아니었는데, 또 이렇게 되고 말았다.

세계의 화약고 중동

그때 그 시절, 한 반에 60명도 넘게 복닥대며 공부했다. 교탁 바로 앞에서부터 교실 끝까지 빈틈없이 책상이 들어찼다. 두 사람이 같이 앉아서 공부하던 나무책상은 어느 것 하나 성한 것이 없었다. 책상을 반으로 뚝 가르는 금이 책상마다 새겨져 있었다. 그 금은 늘 갈등과 대립을 불러일으켰다. 한 사람 앞에 하나씩 책상이 주어졌으면 다투지 않았을려나. 그러나 학생은 많았고 물자는 풍족하지 않았던 사오십 여 년 전 그 시절에는 그런 다툼이 일상이었다.

 '다니엘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다니엘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 영화사 진진


이스라엘과 중동 지역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의 활약을 담은 <다니엘 바렌보임의 작은 기적>이라는 다큐 영화를 보며 문득 사십 년도 더 전의 옛 일들이 떠올랐다. 금이 새겨져 있던 책상과 자기 영역을 지키려던 짝과의 다툼들도 떠올랐다. 그때 우리들의 싸움은 금방 화해가 되는 소소한 것이었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은 해결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오랜 역사 속에서 서로 반목하는 사이다. 만약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두 민족 사이의 분쟁에서 비롯될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곳은 세계의 화약고로 늘 일촉즉발의 위험을 안고 있기도 하다. 당연히 두 민족 사이에는 감정의 골이 깊이 패여 있어서 서로 한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스라엘 출신의 세계적인 명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팔레스타인 출신인 석학 에드워드 사이드는 민족적인 원한으로 인해 뜻을 같이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오랜 우정을 이어가고 있었고, 양국의 평화를 위한 큰 그림을 그려나갔으니 바로 <다니엘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가 그것이다.

1999년에 시작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는 바렌보임에게 '평화의 지휘자'라는 별칭을 안겨 주었다. 이 오케스트라는 서로 반목하는 사이인 이스라엘과 시리아, 레바논 및 팔레스타인 등 중동 출신 젊은이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2011년 광복절에는 임진각에서 평화 콘서트를 열어 분단국가인 한반도에 화합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하였다.

마음의 장벽을 뛰어넘은 아름다운 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이름인 '서동시집'은 괴테의 시에서 따왔다. 동양과 서양이 균형 잡힌 시각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교류해야 한다고 괴테는 서동시집에서 말했다. 바렌보임 역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를 편견 없이 바라보고 교류해야 한다고 보았다.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인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출신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함께 앉아 하나의 소리를 내기 위해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고 눈을 맞추는 순간을 카메라는 포착한다. 그것은 국적, 종교, 문화, 생각이 다른 젊은이들이 아름다운 하모니를 완성해가며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왜곡된 이미지를 벗고 진짜를 발견해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유태인인 세계적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팔레스타인 출신 세계적 석학 '에드워드 사이드'

유태인인 세계적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팔레스타인 출신 세계적 석학 '에드워드 사이드' ⓒ 영화사 진진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 시간을 보낸다는 게 얼마나 고역인 지 우리는 안다. 더구나 적대국 사이임에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럼에도 이 오케스트라는 해냈다. 처음에는 한 자리에 앉는 것 자체도 꺼려하던 젊은이들이 차차 상대를 이해하게 되고 마침내는 화음을 맞춰 작은 기적을 이루어냈다.

시리아 출신 단원 한 명은 이전에는 이스라엘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그에게 이스라엘 사람은 '민족의 원수이자 나쁜 사람'이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출신 단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들이 한 무대에 서게 되었다. 그들은 똑같은 음을 같은 주법으로 함께 연주했다. 그들은 함께 무엇인가를 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서로를 질시하고 반목하는 눈으로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는 음악을 통해 서로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이해하고 화해(knowledge is beginning)하며 끝내는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보여준다. '음악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화해의 시작이 될 수는 있다'고 바렌보임은 말했다. 음악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시킬 수 있는 수단이라는 바렌보임의 이 믿음은 단원들에게도 전해져 그들을 바꾸어 놓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에게 발탁되어 배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워크숍에 참여한 연주자들은 점차 이 수업이 음악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점점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 변화를 받아들인다.

이해와 화해(knowledge is beginning) 

"팔레스타인 사람은 모두 배관공이거나 정비공인 줄 알았"던 이스라엘 연주자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간으로도 안 보였다"는 팔레스타인 연주자가 한 자리에 모여 연주를 한다. 그들이 서로 부딪혔을 건 안 봐도 뻔하다. 그들은 음악으로 증오의 장벽을 부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못했다. 민감한 정치 문제가 나올 때면 카메라 앞에서 '스톱'을 외치기 바쁘다. 그런 그들이 분쟁지역인 팔레스타인의 수도 '라말라'에서 공연을 한다. 이스라엘 출신 단원들에게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그들은 용기를 내어 적지인 라말라로 가서 공연을 함께 했고, 이를 본 팔레스타인의 한 소녀는 '이스라엘에서 온 것들 중 군대와 탱크가 아닌 것은 최초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다니엘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다니엘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 영화사 진진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 한 편으로 우리 민족의 처지가 떠올랐다. 우리 역시 이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분단된 지 어언 70여 년, 그동안 우리는 서로를 증오하고 헐뜯었다. 어찌 보면 제 얼굴에 침 뱉기나 마찬가지였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감정의 골은 패이고 패여 이제는 나무책상 한가운데를 가른 금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골을 메울 수 있는 길은 정녕 없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경평축구대회'가 있었다

최근 뉴스 보도를 통해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다가오는 4월에 남북한 여자 축구대표선수들이 평양에서 시합을 할 것 같다. 2018 아시아축구연맹 여자 아시안컵 예선 조추첨 결과 한국이 북한, 우즈베키스탄, 인도, 홍콩과 함께 같은 조에 편성됐고 또 예선전이 모두 평양에서 치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축구 선수들이 평양에서 경기를 치른 건 1990년 10월 11일 남북통일축구가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사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경평축구대회'가 있었다. 경평축구대회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 양대 도시인 경성과 평양을 대표하는 경성 축구단과 평양 축구단이 장소를 번갈아 가면서 벌였던 친선 축구경기로 1929년 10월에 서울에서 첫 경기가 개최되었다. 해방 후인 1946년에도 서울에서 경평전이 열렸으나 38선이 그어지면서 남북통행이 금지되자 평양 선수들은 경비망을 뚫고 어렵게 내려와서 경기를 했고, 다시 돌아갈 때는 육로가 위험해 뱃길을 택해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서울 선수들을 초청하겠다는 그들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한 채 경평전은 무기한 중단되었다.

마치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유럽의 프로축구리그처럼 우리나라에도 서울과 평양의 양강 구도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분단으로 이 전통은 살려지지 못했다. 하지만 경평전의 주축이었던 경성 축구단과 평양 축구단은 해방 이후 각기 남북 국가대표팀의 모태가 되었고, 이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월드컵 본선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스라엘과 중동 지역 젊은이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다니엘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이스라엘과 중동 지역 젊은이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다니엘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 영화사 진진


동토를 녹이는 따뜻한 햇살

음악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꾼다면 스포츠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땀 흘려 함께 뛰며 몸으로 부딪히다보면 마치 봄날에 대지가 녹는 것처럼 우리 민족의 앙금도 풀리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경평축구대회'를 다시 부활시키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1946년 경기를 끝으로 중단된 경평축구대회가 다시 살아난다면 민족의 갈등의 골도 차츰차츰 메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영화를 보고 온 그 다음 날 '강화나들길' 1코스를 걸었다. 철종의 잠저인 용흥궁과 고려시대 궁궐인 고려궁지 등의 역사유적지를 두루 둘러보는 1코스는 북산을 넘어 북한이 건너다보이는 '연미정'까지 걷는 길이다.

강화읍의 북산에 오르자 북녘의 산과 들이 건너다 보였다. 볼 때마다 늘 가슴이 짠한 북녘의 산들,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라서 더 그렇게 가슴이 아픈 듯하다.

영하 7~8도를 오르내리는 한겨울 속에도 햇살이 쬐는 곳은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길을 걷다 양지바른 곳에 앉아 한참을 쉬었다. 한겨울 속에도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통일을 바라는 우리의 마음이 햇살처럼 퍼져나가서 이 춥고 추운 한반도의 동토를 녹일 수 있었으면, 그래서 평화와 통일이 하루 속히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연미정 너머 북녘 땅을 건너다보았다.

다니엘 바렌보임 에드워드 사이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경평축구대회 다니엘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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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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