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2TV 드라마 <맨몸의 소방관>에서 한진아 역의 배우 정인선이 25일 오전 서울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주연으로서는 가장 호흡이 긴 작품을 맡았다. 배우 정인선은 KBS 4부작 드라마 <맨몸의 소방관> 한진아 역할로 나와 연기했다. ⓒ 이정민


'엔딩 여자애' 봉준호 감독의 2003년 <살인의 추억> 속 배우 정인선이 맡은 단역은 '엔딩 여자애'다. 이름도 없다. 송강호를 쳐다보며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평범하게 생겼다"고 말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여자아이. 무척 짧은 시간이지만 대중들의 뇌리에는 깊이 남았다. 배우 정인선이 스크린을 통해 처음으로 대중들의 눈에 들어온 순간이었다.

하지만 정인선의 공식적인 데뷔작은 1996년 드라마 <당신>으로 그보다 더 이르다. 정인선은 이후 <매직키드 마수리>나 영화 <안녕! 유에프오>에서 단역을 맡고는 작품 활동을 쉰다. "'아역'이라는 타이틀에 회의가 들었다"고. 대학교에 입학한 후 다시 활동을 시작한 정인선은 어느덧 햇수로는 21년차인 배우가 됐다. KBS 4부작 <맨몸의 소방관>을 끝낸 지난 25일 배우 정인선을 서울 서교동에서 만났다.

찰나의 시간, 영원한 기억

 KBS 2TV 드라마 <맨몸의 소방관>에서 한진아 역의 배우 정인선이 25일 오전 서울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주연'에 대한 부담감은 없을까. 정인선의 대답은 "전혀"였다. ⓒ 이정민


인지도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을 때 무릇 배우 스스로나 대중들이 기대하는 역할이 있기 마련이다. 예컨대 아역에서 성인 배우로 올라서며 본인이 주연인 드라마나 영화를 찍는 것 같은. 아마 배우 본인도 (그 누구보다 훨씬 더) 연기를 쉬는 동안 역할에 대한 고민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다시 현장에서 뛰게 되면 그 이전보다는 더 빨리 뛰고 싶고 더 많이 뛰고 싶다고 말이다.

하지만 정인선은 별로 그런 마음이 없어보였다. 2014년에 그가 선택한 <한공주>라는 작품은 평단과 대중의 호평을 고루 받긴 했지만, 그 호평 이전에는 그저 작은 독립영화에 불과했다. 그는 <한공주>에서는 이 영화로 단숨에 주목을 받은 천우희의 친구 역할로, 영화 <경주>에서는 <살인의 추억>에 이어 또 다시 이름 없는 '젊은 안내원'이라는 역할로 등장한다. 그 선택은 브라운관에서도 이어졌다. 1부작인 <드라마스페셜>이나 1회 만에 죽어 사라진 해란(JTBC <마녀보감>) 같은 역할들. 이번에도 정인선은 4부작 KBS <맨몸의 소방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짧지 않느냐"고 물으니 그는 웃었다.

"오히려 긴 호흡에 대한 부담감이 4부작이라서 더했던 거죠. 4부작인데도 (지금까지 했던 작품들) 보다 긴 호흡이라서 걱정했거든요. 보시는 분들이 '얘 너무 많이 나오는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면 어떡하지? 라고. 알고 보니 제가 짧게 치고 빠지는 경우가 많았더라고요. 저는 언제나 크든 작든 비중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게 <살인의 추억>도 마지막 장면에서 짧게 나왔는데 기억을 해주셨잖아요? <경주>에서도 정말 조금 나오는데 무턱대고 '<경주> 너무 잘 봤다'고 말씀해주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러면 '그걸 잘 보셨다고요?'라고 되물어요. (웃음) 정말 눈 감았다 뜨면 사라질 역할이거든요? 조금 나오고 금방 지나쳐요. 그 과정을 지나치며 이제 길고 짧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저도 모르게 체감한 것 같아요."

 KBS 2TV 드라마 <맨몸의 소방관>에서 한진아 역의 배우 정인선이 25일 오전 서울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역 시절에는 연기를 한다는 게 당연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책임감이 들고, 그 책임감을 느낄 때 좋아요." ⓒ 이정민


쉬었던 만큼 더 비중 높은 배역을 혹은 많은 일을 하고 싶진 않을까.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저는 아마 늙을 때까지도 그런 소리를 듣겠죠. 그런데 그건 제가 쉴 때부터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한 부분이에요. 연기를 쉬면서 항상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했고 그래서 오히려 조바심이나 조급한 것도 없어요. 어떻게 보면 전 1996년도에 연기를 처음 시작했고 지금은 2017년이니까 '오래 했구나' 혹은 '연기하는 일 안 질려?'라고 물어보는데 제 실감으로는 아직 20년이 채 되지 않았고 아직 낯설고 어려워요."

삶과 함께 성장하는 연기

정인선은 SBS <엽기적인 그녀> 공개 오디션에도 도전한 바 있다. 당시 오디션을 도전하면서 찍었던 네이버 V LIVE에서 그는 시종일관 밝게 웃으며 예능감을 뽐내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난 정인선은 특유의 저음으로 대화를 진지하게 끌어갔다. "V LIVE에서 상상했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르다"고 말을 건네니 웃다가 고개를 겨우 들고 "이제 제 작품을 보시는 건 안 부끄럽거든요? 그런데 V LIVE는 너무 부끄러워요. 어색한 게 싫으니까 뭔가 더 채우려고 하나봐요"라고 한다.

 KBS 2TV 드라마 <맨몸의 소방관>에서 한진아 역의 배우 정인선이 25일 오전 서울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한진아'라는 역할에 반전적인 면모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단다. 겉은 차갑지만 속은 따뜻한 또 여리여리하지만 강단이 있는. ⓒ 이정민


이런 모습은 정인선이 분했던 KBS <맨몸의 소방관> 속 한진아의 모습과 또 다르다. 차가운 상속녀 이미지의 미대생 한진아를 만들기 위해 정인선은 많은 고민을 했단다. 무엇보다 처음 인물을 보자마자 차갑고 도도한 이미지가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감독님이 원하는 그림은 그런 것이었어요. 셔츠를 윗 단추까지 모두 틀어막은 어떻게 보면 <아가씨>의 히데코(김민희) 같이 갇힌 새장 속에서 살아온 이미지였으면 좋겠다고. 바지보다는 치마를 입었으면 좋겠고, 치마도 짧지 않았으면 좋겠고. 저도 그렇게 이미지를 구축해나가기 시작했어요. 그 과정에서 현장에 있는 스태프 분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 느낌이에요. 이들의 도움을 통해 진아가 완성된 것 같고, <맨몸의 소방관>이 완성된 것 같아 애틋하고 고마워요. '아 내가 그래서 이 작업을 좋아하지. 다 같이 뭉쳐서 종합예술을 만드는 거니까.'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촬영장의 협업이 좋아 남몰래 일을 하는 스태프들 뒷모습을 꼭 촬영해 스마트폰 속에 담아둔다는 정인선. "다 자기 것을 열심히 하고 계시는 게 그렇게 멋있고 여기서 내가 뭔가 하나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게 좋더라고요." 그는 "의심의 여지없이" 계속 이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역 시절 무슨 생각으로 제가 이 일이 천직이라고 말을 하고 다녔는지는 모르겠는데 지금도 그 생각에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제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드리고 싶고. 최대한 얇고 길게 가고 싶다는 느낌이 있는 것 같아요. 덜 하겠다는 게 아니라 얇고 길게. 계속 삶을 열심히 살아나가면서 연기도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이죠."

 KBS 2TV 드라마 <맨몸의 소방관>에서 한진아 역의 배우 정인선이 25일 오전 서울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정인선 맨몸의소방관 한공주 살인의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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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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