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화의 흥행과 관계없이 매력 충만한 작품들을 열린 감각으로 그러모아 세심하게 해석하는 공감의 기록입니다. [편집자말]
*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재키> 영부인으로 살았던 여성을 연기한 나탈리포트만

영화 <재키>에서 영부인으로 살았던 여성을 연기한 나탈리 포트만. ⓒ (주)그린나래미디어


떠올리기 괴로운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둘 꺼내지자 어느덧 시뻘건 피가 그녀의 아름다운 핑크빛 투피스를 흥건하게 적신다. 두 발의 총성, 그녀 무릎 위에서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하게 된 남편으로 인해 20세기 최고 신데렐라 삶은 끝이 보이게 된다. 세련되면서도 이지적인 고품격 투피스에 남겨진 핏자국이 스크린 밖에서도 선연하다.

존 F. 케네디의 암살은 1963년 11월 22일 오후 텍사스 주 댈러스의 거리 한복판에서 비밀스럽고 정확하게 명중한다. 오픈카를 타고 퍼레이드를 하다 총에 맞은 존 F. 케네디와 그의 곁을 지키던 재클린 케네디.

단 두 발의 총성이 생사를 가를 때, 죽음의 세계에 이미 발을 들인 당사자보다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주변인이 더 괴롭다는 것. 명배우 나탈리 포트만의 절제되면서도 증폭할 것 같은 감정연기는 재키(재클린)에게 닥친 그 날의 끔찍함을 충분히 표현한다. 피가 흐르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남편의 머리에 그간 꿈꾸지조차 않던 죽음의 그림자가 덮치고 만다. 재클린의 투피스엔 거부할 수 없는 죽음과 그로 인한 절망이 뻘겋게 피어나 자신을 마주한다. 거부하지도 못하지만, 곧장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은 현실에서 당장 피력할 수 있는 그녀 의지는, 피 묻은 정장을 당장 벗지 못하고 인파 속을 뚜벅뚜벅 걷는 일뿐이다.

케네디의 죽음, 이상의 죽음

 부통령 린든 존슨이 케네디 사후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하려 선서하는 장면

부통령 린든 존슨이 케네디 사후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하려 선서하는 장면. ⓒ (주)그린나래미디어


미국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죽음. 그 예기치 못한 파장은 이상의 날개를 달고 도약하려 했던 미국 정치 혼란을 야기했다. 또한 그와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가 구축해온 '이제까지 없던 새롭고 매력적인 상'의 빛이 꺼짐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매료당한 국민이 암살 직후 숨 고르고 주변을 돌아보기도 전에 들이닥친 살아있는 자들의 새로운 정권.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직감적 진실은, 너무도 빨리 찾아왔다.

"잊히지 않게 해라. 그 짧았던 빛나는 순간을. 카멜롯에 있었느니라."

케네디의 짧았던 정치생명은 평소 숭상해왔던 신화적인 영국 아서왕이 탯줄이 되어 받쳐주던 것이었다. 아서왕의 궁전이자 왕국의 수도였던 '카멜롯'은 케네디 정권에게 꿈꿀 수 있는 이상을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케네디 부부가 잠들기 전에 즐겨 들었다던 축음기에는 늘 '카멜롯'이 있었다. 미국 사상 최연소 대통령이라는 강렬한 타이틀을 지니며 꿈꿨던 '이상'은 무엇이었을까.

무던히도 예술을 사랑했고, 역사를 지키려 애쓰고 평화를 주창했던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 카멜롯 안에서 국민 삶을 위해 꿈을 꾸겠다는 믿음 하에 정치를 했다지만 좀 석연치 않다. 그와 영부인 재클린의 미국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로 세련되고 기품 있어 보이는 매력은 큰 그림을 감춘다.

기품과 우아, 세련, 트렌디함 등의 시각적인 관심을 끄는 신진정치세력 스타일 속에 숨어 버린 미국의 짧지만 잔혹한 역사. 그 당시 케네디와 영부인 재키는 지금의 연예인 수준으로 집중관심을 받았고, 그 인기는 곧 정치권력으로 더욱 부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미국 역사 속에서 케네디가 어떤 '혁명적인 이상'을 품진 않았을 것이다.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여전한 제국주의적 역사는, 낭만과 평화, 신화적 이상으로 포장된 한 대통령 일가가 끝내 겪은 불운한 삶에 동정도 하지 못하게 만든다.

 남편의 피가 묻은 투피스를 당장 벗지 못하고 백악관으로 돌아온 재키(나탈리포트만)

남편의 피가 묻은 투피스를 당장 벗지 못하고 백악관으로 돌아온 재키. ⓒ (주)그린나래미디어


영화에서 의문을 남기고 사망한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부인 재클린(재키)의 말.

"그 이상들은 살아 있을까요?"

미국 내에 존재하는 '이상'이란 것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환경과 문화, 예술, 그리고 세계로부터의 존경을 꿈꾸던 케네디의 '이상'도 부분적으로 잘못된 점이 있다. '존경'은 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닌 것을. 미국의 '힘'은 존경받을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명시해 두려 한다. 힘은 존경보다는 '두려움'을 유발한다. 힘을 이용하여 구축한 것들은 거짓말의 연속이다.

"또 다른 카멜롯은 아마 없을 거예요."

재클린(재키)의 말은 명시된 예언처럼 맞아떨어진다. 케네디가 꼭 위대하다고 볼 순 없지만, 그 이후에도 여전히 위대한 철학을 지닌 미국 대통령이 있었던가. 당시 트렌드 세터라고 해도 무방한 케네디와 재키에게 매료되었던 전 세계는 미국이 역사 속에 꽁꽁 감춘 못된 힘을 기억하지 못했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의 역사는 미국 신진정치가의 이중적인 '이상'을 깨닫게 해주는 확실한 증거다. '신대륙' 이란 개념은 아메리카 대륙에 어울리지 않는다. 정복을 꿈꾸는 자들 욕망으로 증축된 잘못된 판단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대륙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곳엔 원래부터 살던 사람들이 있었다. 자연 친화적이며 아름답게 살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신대륙'이라 칭하며 달려드는 유럽인들로 인해 참혹하게 학살당했다. 아름다운 아메리카 원주민의 문명은 파괴되고, 아메리카 대륙은 유럽인의 식민지 땅으로 전락했다. 그 비인간적인 정복과 욕망이 근거지 삼은 대륙의 역사는 겨우 300년. '노예, 학대, 정복… ' 이런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미국.

그런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벌어진 '대통령 암살 사건'은 그저 우스운 참극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암살의 정확한 비밀은 아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권력과 정복이 뿌리가 되어 자국민의 이익만을 창출해 온 나라에서 그 만한 일에 흥분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압도적인 힘으로 전 세계를 주무르는 그들에게도 타국이 가지는 '두려움'이 있을까.

국가적인 측면으로 보았을 때는 미국 대통령의 암살사건이 드라마틱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그렇지만 인류애적 발상으로 사건을 들여다보았을 때에는, 어찌됐든 한 인간의 짧은 불꽃같았던 삶과 남겨진 가족의 슬픔은 처연하다.

백악관 복원 그리고 그녀의 선택

 예술을 사랑한 케네디정권의 한 때 찬란했던 백악관 공연

예술을 사랑한 케네디 정권. 찬란했던 한 때, 그들은 백악관에서 아름다운 공연을 감상하고는 했다. ⓒ (주)그린나래미디어


그들만의 낭만적 이상 속에서 행복했을 짧은 임기. 그 기간엔 영부인 재클린(재키)이 도맡아 한 백악관 복원 프로젝트도 있었다. 재클린(재키)의 백악관 복원은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이루어졌다. 역사적인 공간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려는 노력. 미국 역사를 총체적으로 정리해 보려는 취지. 그러나 과연 미국이란 나라가 지닌 역사가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냐 말이다. 어쨌거나 과거의 발자취를 고고하고 아름답게 복원하고 싶었던 그 신념은 '혈세 낭비'가 수단이 되었기에 비판을 피할 길이 없다.

영화의 끝은 '다른 선택'을 '갑작스레' 강요받듯 맞닥뜨린 한 여인을 동정하는 분위기로 흘러간다.

자기 것이었던 것은 없다. 때가 되면 백악관에서 나와야 하고, 대통령의 영광과 영부인이 되어 받은 사랑도 영원하진 않다. 그 끝이 보이기 시작하면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 짐 싸는 일이 이리도 빨리 진행될 줄 몰랐던 재키는 말한다.

"영부인은 짐 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요."

바람기 많았던 남편이 자신에게만 완벽하지 않았다는 슬픈 사실이 남편의 사후엔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냥 좀 평범한 사람과 결혼할 걸 그랬나 하는 자조적인 후회도 소용없다. 남은 자의 삶에는 뚜렷이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행동만이 필요할 뿐이다. 영화 속 재클린(재키)은, 영부인으로 살았던 시절의 그늘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 후의 그녀 인생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예상할 수 없던 반전이긴 하다. 세계적인 큰 사건이기도 했고, 미국 국민을 충격으로 휩싸이게 한 그녀의 선택은, 이번 영화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에 대해 드러내지 않았기에, 영부인으로 살았던 찬란했던 시절과 급작스레 닥친 어둠 속 혼란에서도 기품을 잃지 않았던 모습은 영화의 여운을 남기기에 아쉽지 않다.

제한된 범위의 프레임 조각들 속에서는 모든 역사를 알 수 없다. 진실과 역사에 바탕을 두는 이런 영화들은, '관객에게 과연 어디까지 보여줄 것이냐'를 선택하는 것으로 인해 득과 실을 동반한다. 케네디가 아닌 영부인 재클린(재키)에게 집중 조명된 이 영화의 선택이, 관객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를 지켜보는 일도 꽤 재밌을 것 같다는 발칙한 상상을 해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순지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rnjstnswl3)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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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문화, 다양한 사회현상에 관해 공부하고 씁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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