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의 영화 <2046>은 바람둥이 남자주인공 저우무윈(周慕雲, 이하 저우)의 사랑이야기다. 그가 만나는 여인들을 따라 2047년 자치권이 소멸되고 중국에 완전 귀속되는 홍콩인들의 불안감과 화양연화(花樣年華,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를 뒤로 하고 불투명한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 두려움이 화려하고 감각적인 영상과 버무려진다. 저우가 만나는 여인들을 따라가다보면, 홍콩의 미래에 대한 다양한 설정들이 상징적으로 그 안에 녹아 있음을 깨닫고, 왕자웨이 감독의 천재성에 새삼 놀라게 된다.

남자주인공 저우무윈 그의 가슴에 있는 과거의 연인이 그의 현재와 미래를 움직이고 있다.

▲ 남자주인공 저우무윈 그의 가슴에 있는 과거의 연인이 그의 현재와 미래를 움직이고 있다. ⓒ 난징영화집단


건네주고 건네받기 영화에는 "건네주고 건네받"는 동작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홍콩 반환과 중국 귀속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건네주고 건네받기 영화에는 "건네주고 건네받"는 동작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홍콩 반환과 중국 귀속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난징영화집단


영화의 제목 '2046'은 주인공 저우가 묵는 오리엔탈호텔의 객실 번호이자, 그가 쓰는 소설의 제목이고,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현재까지 용인된 홍콩 자치의 마지막 해다. 영화는 주인공 저우의 과거 기억과 현재, 그리고 소설 속 미래인 2046이 다소 난해하게 얽혀있다.

영화 <2046>은 유독 뭔가를 "건네주고, 건네받는" 설정이 많다. 저우가 방열쇠를, 선물을, 돈을, 그리고 몸과 마음과 시간을 건네주고, 그것을 누군가는 건네받는다. 1997년 7월 1일 홍콩은 영국에서 중국에게 건네졌고, 50년이 되는 2047년 중국에 완전 귀속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들 모두 담배를 피우는 것이나 창문, 작은 구멍 너머로 뭔가를 들여다보는 것도 홍콩인들이 갖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표현하기 위한 설정으로 보인다.

1966년 중국에서 발생한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경제 불황이 닥친 홍콩, 오리엔탈호텔 2046호에 묵고 있는 신문기자 저우, 그가 만나는 여인들은 추적해본다. 저우는 광둥어를, 여인 1,3,5는 광둥어를, 여인 2,4는 중국 표준어를 사용하는데, 여인 2,4는 막강한 중국자본을 암시하듯, 금전 거래가 개입하는 관계로 설정되어 흥미롭다.
  
영화 <화양연화>에서 사랑했던 연인 쑤리쩐 주인공 저우는 아직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치명적이다.

▲ 영화 <화양연화>에서 사랑했던 연인 쑤리쩐 주인공 저우는 아직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치명적이다. ⓒ 난징영화집단


# 여인 1 쑤리전(蘇麗珍, 장만위)

영화 <화양연화>에서 저우가 사랑했던 유부녀다. 영화 <2046>에서도 저우는 여전히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다. "인간이 번뇌가 많은 까닭은 기억력 때문"이라고 했던 <동사서독(東邪西毒)>의 대사처럼 저우는 그녀와의 사랑을 여전히 기억하고, 그래서 그 누구와도 진정한 사랑을 나눌 수 없는, 헛된 욕망만 쫓을 뿐 늘 허전한 가슴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우는 그의 소설에서 2046에 탄 승객의 목적은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쑤리전은 홍콩의 가장 화려하고 행복한 시절을 상징한다. 어쩌면 홍콩인들에게 남은 영국 지배 시절의 자유로움과 안락함의 기억이 아닐까.

검은 거미 쑤리쩐 프로 도박사 검은 거미는 주인공 저우처럼 아픈 과거에 묶여 함께 떠나지 못한다.

▲ 검은 거미 쑤리쩐 프로 도박사 검은 거미는 주인공 저우처럼 아픈 과거에 묶여 함께 떠나지 못한다. ⓒ 난징영화집단


# 여인 2 쑤리전(蘇麗珍, 궁리)

신문기자로 글을 쓰는 저우가 싱가포르에서 도박에 빠졌을 때, 그를 도와주는 여인이 바로 프로 도박사 '검은 거미'다. 왼손에 늘 검은 장갑을 끼고 있어 생긴 별명인데, 그 검은 장갑 안에는 그녀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아픈 과거가 숨겨져 있는 듯하다. 그녀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저우가 사랑했던 유부녀와 이름이 같은 '쑤리전'이다.

저우는 그녀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지만, 그녀는 저우와 함께 떠나길 거부한다. 저우는 검은 거미에게 "언젠가 과거에서 벗어나면 날 찾아오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사실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검은 거미는 저우에게 지금까지 만난 가장 괜찮은 남자라고 한다. 홍콩이 만난 가장 괜찮은 남자는 누구였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 여인 3 Lulu(류자링)

1966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저우는 클럽에서 우연히 Lulu를 만난다. 결혼하기로 했던 애인이 갑자기 죽고 그를 잊지 못했던 Lulu는 그날 밤 2046호 객실에서 새 남자친구에게 살해된다. 저우처럼 과거의 연인을 잊지 못하는 Lulu의 갑작스런 죽음은 2047년을 앞둔 홍콩인들의 두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매력적인 바이링 외로운 저우는 그녀와 술친구가 되고, 사랑을 나누지만, 마음을 다 주지는 않는다.

▲ 매력적인 바이링 외로운 저우는 그녀와 술친구가 되고, 사랑을 나누지만, 마음을 다 주지는 않는다. ⓒ 난징영화집단


# 여인 4 바이링(白玲, 장쯔이)

저우는 호텔 옆방에 새로 온 자유분방하고 도도하지만, 매력적인 바이링에 관심을 갖는다. 두 사람은 크리스마스 이브를 함께 보내며 술친구가 되고, 결국 함께 뜨거운 밤을 보낸다. 하지만 저우는 돈을 건네며 바이링과의 관계에 '선'을 긋는다. 두 사람은 서로 가까워지기도 하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이 '선'을 극복하지는 못한다. 저우는 다 빌려줄 수 있지만, 빌려줄 수 없는 게 한가지는 있다고, 그래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바이링은 "날 사랑하든 말든, 내 사랑을 막지는 말아줘!", "내가 다른 남자 안 만나는 것처럼, 당신도 다른 여자 만나지 말아줘!" 애원하지만, 저우는 거부한다. 2047년 이후의 홍콩이 중국에 귀속되면, 홍콩은 지금보다 심한 중국의 간섭을 받을 것이며, 그렇게 얽매이는 것이 무엇보다 싫을 것이다.

호텔 사장의 딸 왕징원 저우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는다.

▲ 호텔 사장의 딸 왕징원 저우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는다. ⓒ 난징영화집단


# 여인 5 왕징원(王靖雯, 왕페이)

호텔 사장의 딸 왕징원은 아버지가 반대하는 일본인 남자친구가 있다. 남자친구는 함께 일본으로 떠나자고 제안하지만, 징원은 선뜻 나서지 못한다. 선택을 유보한 채 머뭇거리는 사이, 남자친구는 일본으로 떠나버린다.

저우는 두 사람의 편지를 호텔 사장 몰래 전해주며 징원과 친해진다. 그리고 징원이 글을 잘 쓴다는 것을 알고, 함께 소설을 쓰며 행복한 시절을 보낸다. 저우와 징원은 애인처럼 친해져 크리스마스 이브에 함께 저녁을 먹는다. 그러나 징원의 마음엔 여전히 일본 남자친구가 있고, 결국 저우는 두 사람을 연결시켜 주고 조용히 물러선다.

저우는 따뜻한 사랑을 원하지만, 자신은 결코 그것을 가질 수 없고, 또 그렇게 외롭고 허전하게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사랑은 타이밍이고, 아무리 서로 사랑해도 인연은 엇갈릴 수 있다"고 자위한다.

저우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소설 <2047>로 쓴다. 소설의 결말이 너무 비극적이어서 징원은 결말을 수정해 줄 것을 요구하지만, 저우는 시간 앞에 멈춰 서 끝내 그것을 고쳐 쓰지 못한다. 중국과 홍콩이 하나 되는 것에 대한 암담한 미래 인식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 여인 6 인조인간 기차 승무원

자오가 쓴 소설 <2047> 속 '2046으로 떠나는 미지의 기차'에서 근무하는 인조인간 승무원은 한 일본 사내의 비밀을 듣는다. 그 사내는 "옛날 사람들은 말 못할 비밀이 있을 때, 산에 올라가 나무에 구멍을 파고, 그 구멍에 비밀을 속삭인 뒤 흙으로 구멍을 막아버리면 비밀은 영원히 묻힌다"며 인조인간에게 함께 떠나자고 제안하지만, 인조인간은 대답하지 않는다. 인조인간이 사내와 함께 떠나지 않은 것은 단순한 기계적 결함이나 그가 싫어서가 아니라, 다른 연인이 있어서라고 저우는 소설에 적고 있다. 미래에도 여전히 지난 과거의 연인을 잊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인조인간 승무원 달리는 기차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묵도하며 자신의 옛사랑을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다.

▲ 인조인간 승무원 달리는 기차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묵도하며 자신의 옛사랑을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다. ⓒ 난징영화집단


영화 <2046>에서 "함께 떠나자"는 제안이 서로 다른 인물들의 입을 통해 모두 다섯 번이나 등장하는데, 모두 거절된다. 사랑하지 않아서 함께 떠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모란꽃은 요염하게 웃음짓다 사라지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 남겨두고서(一若牡丹盛開, ?站起身, 走了, 留下旣非是又非否的答復)"

영화에 등장하는 시처럼 불안한 미래로 떠나는 것보다 과거 사랑했던 연인을 가슴에 품고, 현재 상태를 유지하고 싶은 심리의 표현이 아닐까. 크리스마스를 시간적 배경으로 삼은 것도 서구문화에 익숙한 홍콩이 사회주의 중국에 귀속되었을 때의 부적응을 염려한 설정이 아닐까.

제목 '2046'에서 보여주듯, 영화는 시종일관 '시간의 흐름'을 주목한다. 그 시간이 미래를 향할 때는 불안함에 머뭇거리고, 과거의 행복했던 순간은 오늘을 살아가는 중요한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작동한다. 이런 인식이 홍콩인들이 2047년 중국 귀속을 불안하게 기다리는 기본 마인드일 것이다. 끝없이 이어진 긴 2046 기차가 도착하는 곳에 자오가 사랑했던, 과거의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것은 불확실하고, 시간은 심오한 밤을 향해 달려갈 뿐이다.

2046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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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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