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는 이 순간, 약간의 두려움이 스친다. 이 글을 읽을 독자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하길종 감독을 2인자 혹은 열등감의 아이콘 '살리에르(Antonio Salieri)'에 비유를 하는 것 자체에 비난을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다만 이 글을 끝까지 떠나지 않아 주신다면 지금 '욱' 한 것이 공연한 것이었다고 느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길종 감독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는가. 젊은 나이(당시 38세)에 요절한 안타까운 감독? 배우/감독인 하명중의 형?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 출신 감독? 혹은 표절이나 검열 같은 이슈가 끊이지 않았던 문제(?) 감독? 

 하길종

하길종 ⓒ 한국영화진흥위원회


혹은 위에 나열한 그 어떤 것으로도 기억할 수 없는, 아예 독자들이 알지 못하는 영화감독일 수도 있다. 하길종은 1941년생으로 신필름(신상옥 감독이 설립한 영화사)에서 잠시 일하다가 196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는 UCLA 영화학교 대학원 과정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당시 영화평론가 변인식과 친분을 쌓으면서 작은 영화운동들에 참여 하기도 했고(이장호 감독, 김호선 감독, 변인식 영화평론가, 이원세 감독 등으로 구성된 영화운동, '영상시대'를 결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 자신의 데뷔작 <화분(Pollen of Flowers, 1972)>을 연출한다. 

전에 논문 한 챕터를 쓰다가 하길종의 <화분>을 언급할 일이 있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스토리 한 줄 요약 하자면, 지금 봐도(1970년대 정서를 생각하면 더 더욱이나) 기괴하고 파격적인 영화였다. 영화는 푸른 집이라고 불리는 집에서 벌어지는 파괴적인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동성애에 관한 묘사와 명백히 청와대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푸른집'의 은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영화의 문제성은 당시 검열로 영화의 상당 부분이 잘려 나갔다는 점으로도 시사가 되지만 더욱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영화가 이탈리안 좌파 감독, 피에르 파울로 파졸리니(Pierre Paulo Pasolini)의 <테오레마, Teorema>와 줄거리, 캐릭터는 물론 포스터 까지도 너무나도 흡사하다는 것이다. 
 
 하길종의 화분 포스터 및 신문 광고

하길종의 화분 포스터 및 신문 광고 ⓒ 영상자료원


파졸리니 테오레마 포스터  하길종 화분 포스터와 유사함을 증명하려는 포스터

▲ 파졸리니 테오레마 포스터 하길종 화분 포스터와 유사함을 증명하려는 포스터 ⓒ IMDB


하길종 감독의 표절은 크게 문제화 되어 당시 대종상 시상식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그가 평소 <영상시대>(영상시대에서 발행한 동명의 계간지)나 다른 지면에서 유럽시네마나 감독들에 대한 존경을 공공연히 표현했던 것을 고려했을 때 하길종 감독의 표절이 아주 놀랍게 느껴지진 않는다. 더구나 파졸리니는 하길종과 공통점이 많았다. 그는 사회운동을 했던 액티비스트였고(하 감독도 미국으로 가기 전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바 있다), 시나 소설을 쓰던 다채로운 예술가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하길종의 롤모델일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좀 실망스러운 것은 데뷔작 이후 부진했던 흥행과 명성을 <바보들의 행진>(1975) 같은 작품으로 극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절이 계속됐다는 것이다. 물론 <화분>처럼 명백한 '카피'는 아닐지라도 <속. 별들의 고향> 같은 작품에서 데비빗 린의 <라이언의 딸, Ryan's Daughter>의 우산 신과,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블로우 업, Blow Up> 에서의 테니스 신을 그대로 재현한 것을 영화감독 오승욱이 언급한 바 있다.

물론 하길종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재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UCLA 졸업 작품이 학교 대표로 출품이 된 적도 있다 하니 분명 그는 재능을 갖춘 감독이었을 것이고 <바보들의 행진>은 평단과 관객을 모두 만족시킨 역작이 되었으며, 특히 그가 쓴 수없이 많은 기사와 칼럼들을 보면 분명 자신이 꿈꾸던 영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는 표절을 멈추지 못했던 것일까. 

그는 영상시대 활동을 통해 참된 영화는 현실주의와 심오한 영상미가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특히 그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언급했던 '리얼리즘,' 특히 사회적인 리얼리즘(social realism)은 그가 어떤 영화를 원했는지 대충이라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가령, 그는 거리에서 보게 되는 가난이나 노동자들의 고통,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에 가까운 원시적인 섹스 신들이 영화 안에서 자유롭게 묘사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이러한 묘사들이 박정희 군사정권 안에서 도저히 재현될 수 없었던 요소들이라는 것이다. 하길종은 영화의 진정한 가치는 리얼리즘을 통해서만 추구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곤 했는데 그런 논리라면 군부정치 동안의 검열 시스템 안에서는 진정한 영화가 만들어 질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그의 이러한 좌절이 사회적인 스탠포인트를 가지고 있던 여타 해외 거장들, 즉 앞서 언급한 파졸리니나, 혹은 고다르나 트뤼포 같은 프렌치 뉴웨이브 감독들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들을 보고 차용하며 자위되었을 것이다. 

하길종의 비극적인 삶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적잖은 유명세를 누렸던 일류 감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2인자라는 이미지를 지울 수가 없다. 다만 특별한 것은, 살리에르가 옆에 있는 모차르트를 바라보며 느꼈을 열등감과 분노와는 다른, 하길종 본인이 자처한 2인자의 자리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70년대 군사정권에 의한 영화 탄압을 증오했고, 정작 본인은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던 <속. 별들의 고향> 같은 상업영화라도 만들어가며 영화 감독으로 살아야 하는 현실에 통탄했다. 그는 고다르나 코폴라 처럼 사회적인, 정치적인 자유를 누렸던 동시대 감독들, 혹은 그들의 환경을 동경했을 것이고, 표절에 가까운 차용이라도 해서 그들의 자유를 소유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영화 <바보들의 행진> 포스터.

영화 <바보들의 행진> 포스터. ⓒ 하길종


또한 그의 표절이 문제시 된 이후 그를 감시하는 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연한 차용을 멈추지 않았던 것을 보면 이는 감독이 이러한 작품들을 의도적으로 모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고다르가 위켄드<Weekend>에서 무모할 정도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그에 순응하는 프랑스인들을 씹어대는 것을 목도하고 자신은 꿈도 못 꿔볼 상황에 사는 것에 대한 자조적인 시위랄까. 

하길종을 2인자라고 지칭한 것은 이러한 관찰에 근거한 또 다른 시선이었다. 그는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서, 주어진 것 만으로 쥐어짜가며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현실에 질식 하고 있었고 그의 끊임 없는 표절은 그가 이러한 '흉물스런 현실'에서 잉태되는 '흉물스런 시네마'의 1인자이기를 거부했던, 일종의 '쿠데타'(그는 영상시대 활동 중, 영상시대 영화운동이 관습에 젖은 한국 영화의 쿠데타가 되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였을 지도 모른다.

아이러니 한 것은 자신의 데뷔작을 카피할 정도로 숭배하던 파졸리니의 비극적인 죽음(파졸리니는 자신의 차를 운전한 누군가에 의해 수 차례 치어 살해 됐다. 그가 극우파에게 살해 된 것이라는 추정만 있을 뿐 범인은 결국 잡히지 않았다)처럼 그가 살해 된 지 꼭 4년 후, 1979년 하길종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죽음까지도 파졸리니의 2인자처럼 되어버린 셈이다. 

세상이 참 변했다. 박명수가 그랬듯. 홍진호가 그랬듯. 2인자가 주목 받는 세상이다. 숨을 쉬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경쟁해야 하는 세상에서, 1인자의 위상보다는 2인자의 고군분투가 짠하고 인간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길종의 '자처한 2인자'가 더 용기 있고 철학적으로 보이는 것은 이러한 시대상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덧붙이는 글 문화 블로그 월간 <이리>에 개제했던 글 입니다.
하길종 화분 파졸리니 1970년대 한국영화 고전 한국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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