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화의 흥행과 관계없이 매력 충만한 작품들을 열린 감각으로 그러모아 세심하게 해석하는 공감의 기록입니다. [편집자말]
*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 동북부 더럼주의 탄광 마을에 사는 빌리. 형 몰래 듣는 레코드판의 음악이 빌리를 통통 튀어 오르며 춤추게 하는 영화의 시작은, 통제와 제약 속에 숨겨진 한 소년의 댄싱본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케 한다. 그의 심장박동은 흘러나오는 노래 가사에 힘입어 몸과 함께 거센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내가 12살 때 난 춤을 추고 있었죠. 태어나자마자 난 춤을 췄어요."

조용한 탄광촌은 그 당시 극심한 혼돈에 빠져 있었다. 전국적인 탄광 파업이 일어난 해인 영국의 1984년. 대처정부가 국영 탄광 중 일부 탄광 폐업과 급여 삭감, 수많은 탄광 노동자를 해고하겠다는 발표를 한 이후 일어난 반발은 노조 내부의 분열까지 초래했다.

당시 대처 정권의 강경한 진압은 무장경찰들이 지키고 서 있는 거리에서 벌어지는 노조원들끼리의 폭력적 대립을 통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철창으로 무장하고 탄광을 향해 떠나는 버스 안 노동자. 그리고 그들을 배신자들이라며 비웃고, 격분하는 감정을 참지 못해 과격한 언행을 보이는 노동자들. 이를 사실적으로 비추는 장면은 가슴이 저리다.

 석탄이 부족하여 엄마의 유품인 피아노를 부수어 땔감을 채운, 악몽같은 크리스마스

석탄이 부족하여 엄마의 유품인 피아노를 부수어 땔감을 채운, 악몽같은 크리스마스 ⓒ 팝엔터테인먼트


혼돈의 수렁에 빠지게 되는 건, 탄광 노동자로 일해 먹고 사는 빌리 가족 역시 마찬가지이다. 빌리의 아버지 재키와 형 토니는 철창 버스 속 노동자들을 향해 비난을 퍼붓는 친노조원들이다. 그들은 폭발할 것 같은 분노를 가슴에 지닌 듯, 늘 기분이 좋지 않다. 레코드판을 건드렸냐며 빌리에게 분노하는 형. 엄마의 유품인 피아노를 둥당거리는 빌리를 향해 따끔한 잔소리를 서슴지 않는 아버지의 일상적 한숨. 그리고 치매 증상이 있는 연로한 할머니. 11살 성장기 소년 빌리에게 위안이 되는 사람은 없다. 엄마의 부재로 인해 더욱 휑한 집의 냉기는, 점점 떨어져 가는 석탄 때문이 아니라 웃음기 가신 가족의 일상에서 비롯된다.

금기와 모험의 대상 '발레'

노동자들끼리의 싸움 뒤에서 웃고 있을 비겁하고 냉혹한 그 당시 영국 정권의 실태를 그린 영화에서 다행히도 웃음을 주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소년 빌리의 모험이다.

대대로 물려받은 복싱 장갑을 끼고 복싱수업을 다니는 빌리. 아버지가 문밖에서 지켜보는 와중에서도 상대에게 맞아 쓰러지고 만다. 결투 자체를 두려워하는 빌리에게 복싱은 어울리지 않는다. 상대를 때리고 무너뜨려야만 환호받을 수 있는 복싱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빌리. 아들의 두려움을 알지도 못한 채 빌리를 향해 "한 대 쳐!" 외치는 아버지 재키의 고함과 기대에 찬 눈빛은, 일종의 대리만족에 가깝다.

대처정부에 맞선 파업노동자 아버지의 승리에 대한 염원은 작위적일 정도로 아들 빌리에게 닿아있다. 수업료 50펜스를 벌기 위해 죽으라고 일을 해야 하는 아버지 입장에서는, 아들에게 남성성을 과시할 수 있는 운동을 가르치는 일이 옳다. 강한 힘을 가진 자만이 승리할 수 있다는 관념은 그를 사로잡는다. 그런 그에게 발레가 어떠냐며 유명한 남자발레무용수 웨인슬립을 거론하면서까지 맞서는 아들 빌리의 행동은 가슴에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무겁게만 다가온다.

 복싱을 하다 발레수업에 흠뻑 빠진 '빌리'(제이미 벨)

복싱을 하다 발레수업에 흠뻑 빠진 '빌리'(제이미 벨) ⓒ 팝엔터테인먼트


'여자들이나 하는 발레'를 한다는 아들이 이해되지 않는 아버지 재키가 아니더라도, 빌리가 발레에 집중하는 일은 숨어서 해야만 하는 어떤 금기처럼 다뤄진다. 빌리는 월킨슨 선생님에게 받은 토슈즈를 자기 방 매트리스 밑에 숨기고, 발레 관련 책을 빌려 갈 수 없다는 사서의 빈틈을 이용하여 그녀가 한눈팔 때 몰래 책을 가져온다. 그 책을 보며 은밀한 공간인 화장실에서 발레 동작 연습에 매진하는 빌리의 행동은 형 토니와 아버지 재키가 답습해온 방식을 뛰어넘는 날개가 된다.

"발레가 어때서요?"

재키와 대립하며 되묻던 빌리는, 복싱처럼 남을 쓰러뜨리지 않고도 날아오를 수 있는 희망을 찾는다.

같은 체육관에서 복싱수업을 받다 우연히 월킨슨 선생님의 발레수업에 매료된 빌리가 발레리나의 꿈을 조금씩 키워나가는 다분히 모험적인 일상. 춤의 완성처럼 흘러가는 빌리의 일상은 경직된 사회와 가정에 유연성을 장착시킨다. 결국, 빌리의 꿈을 지원하고자 애쓰게 된 가족과 주변 이웃의 응원이 바로 그 방증이다.

 아버지 재키(게리 루이스)와 아들 빌리(제이미 벨)

아버지 재키(게리 루이스)와 아들 빌리(제이미 벨) ⓒ 팝엔터테인먼트


남에게 기대지 않는 것

여러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 재키가 아들 빌리의 꿈을 인정하고 지지하게 되지만, 그로 인한 과정이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간절히 염원한 주인공의 꿈인데 이뤄지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평면적 주장에 모순되긴 하지만 말이다.

발레 선생님인 월킨슨이 아들에게 베푸는 관심과 호의에 감사를 표하지만 자기 아들을 다른 사람 지원으로 키우고 싶지 않다고 단언하는 재키. 파업을 포기하고 다시 생업에 뛰어들기 위해 탄광으로 향하는 철창 버스에 타고 만다. 아직 선택할 수 있는 꿈을 가진 빌리를 위해 다시 일할 수밖에 없다며 큰아들 토니에게 눈물로 호소하는 장면은 재키의 부성애가 부각되는 영화의 절정이다. 결국, 파업 중간에 포기하고 일터로 나가는 것은 토니의 만류로 접었지만, 죽은 아내의 패물로 추정되는 귀금속을 전당포에 팔아 로열발레학교 입학을 위한 오디션 비를 마련한다.

 파업을 포기하고 빌리의 꿈을 위해 탄광으로 가 일하려는 재키를 울면서 만류하는 토니(제이미 드레이븐)

파업을 포기하고 빌리의 꿈을 위해 탄광으로 가 일하려는 재키를 울면서 만류하는 토니(제이미 드레이븐) ⓒ 팝엔터테인먼트


아들이 발레리나를 꿈꾸는 것과 동시에 '모범적인 남성의 삶'에서 벗어난다고 여겼던 아버지. 그 굴레를 뛰어넘으니, 다음엔 스스로의 희생만이 아들의 꿈을 이뤄줄 수 있다는 고정관념에서 헤어 나오질 못한다.

보다 여유 있는 생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월킨슨 선생님의 지원을 거절할 수밖에 없던 심리적 강박은 어디에서부터 나온 것일까. 무엇이든 자기 힘으로 구축한 삶을 살아야만 한다는 고정된 의식은 가난한 노동자에게는 너무도 가혹하지 않은가. 힘들면 누군가에게 기댈 수도 있지 않은가.

남에게 기대지 않는 정신을 강요한 시대에서 노동자 아버지가 발레리나 아들을 키워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재키의 희생은 영화 막바지, 장성한 빌리가 차이콥스키 백조의 호수 음악 안에서 새처럼 나는 듯 펼치는 공연으로 귀결된다.

그 당시 사회의 역할 보다 개인의 노력과 희생을 주장한 마거릿 대처. 그녀의 잔혹한 철학이 빚어낸 결과는 과연 어마어마했다. 파업 노동자들을 다시 악조건 속에 지하탄광으로 보내게 했고, 그 희생으로 인해 한 아버지는 아들의 꿈을 지원했다.

 노조항복으로 파업이 중단되고 탄광으로 돌아가는 아버지 '재키(게리 루이스)와 형 '토니'(제이미 드레이븐)

노조항복으로 파업이 중단되고 탄광으로 돌아가는 아버지 '재키(게리 루이스)와 형 '토니'(제이미 드레이븐) ⓒ 팝엔터테인먼트


선택할 수 있는 삶

빌리의 선택을 존중한 아버지 재키, 그리고 형 토니에겐 선택할 수 있는 삶이 없다. 런던에 가본 적 있냐는 빌리의 질문에 더럼(Durham)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는 아버지. "런던엔 탄광이 없어"라는 말로 대화를 종식한 재키의 삶엔 다른 선택이 없다. 그렇기에 더 받아들일 수 없던 아들의 새로운 선택이 낯설기만 하지만 그런데도 움직일 수밖에 없는 부정(父情)이 영화의 흐름을 아름답게 마무리 짓는다.

런던 로열발레학교 입학 허가를 받은 빌리의 합격통보 편지와 노조가 항복하여 다시 일터로 돌아가야 하는 가족의 현실이 이어진다. 동시에 선택할 수 있는 삶과 더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삶은 대비를 이룬다.

더군다나 이 영화가 실화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졌다는 점은, 대처가 집권했던 시대, 선택적 희망 없이 희생만을 강요받았던 노동자의 삶을 더욱 깊숙이 파고들게 한다.

 런던국립극장, 장성한 빌리(제이미 벨)가 '백조의 호수' 음악 속에서 새처럼 뛰어오르며 공연

런던국립극장, 장성한 빌리(제이미 벨)가 '백조의 호수' 음악 속에서 새처럼 뛰어오르며 공연 ⓒ 팝엔터테인먼트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순지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rnjstnswl3)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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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문화, 다양한 사회현상에 관해 공부하고 씁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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