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화의 흥행과 관계없이 매력 충만한 작품들을 열린 감각으로 그러모아 세심하게 해석하는 공감의 기록입니다. [편집자말]
가족과 사랑의 정형성을 거부하는 젊은 천재 감독, 자비에 돌란(Xavier Dolan)은 이번 영화 <단지 세상의 끝>을 선보이며 6번째 작품을 완성했다. 전작 <아이 킬드 마이 마더>(2009) <하트비트>(2010) <로렌스 애니웨이>(2012) <탐엣더팜>(2013) <마미>(2014)에 이어 등장한 이번 영화 역시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까지 거머쥐게 되었다니. 천재감독이란 별명이 아깝지 않다.

삶의 중심과 주변을 다루는 능력이 탁월하고 섬세한 자비에 돌란 감독의 이번 신작엔 '가족'이 등장한다. 그가 연출한 어떤 가족의 비밀은, 한 남자의 여행과도 같은 장면에서 시작한다.

 영화<단지 세상의 끝>은 시한부를 선고받은 루이가 12년만에 가족을 찾게 되는 여정을 그린다

영화<단지 세상의 끝>은 시한부를 선고받은 루이가 12년만에 가족을 찾게 되는 여정을 그린다 ⓒ 엣나인필름


모자를 눌러 쓴 한 남자. 그리고 그를 기다리는 가족들에게서는 '일정한 평화'를 찾을 수 없다. 12년 만에 가족을 찾은 남자의 이름은 루이. 루이를 기다리는 내내 엄마, 여동생 쉬잔과 형 앙트완 그리고 루이를 처음 만나는 형의 아내 카트린까지, 그들은 시종일관 불안한 긴장과 설레고 흥분된 감정을 감추지 못한다.

둘째 아들이 온다며 화려하게 치장했음에도 감출 수 없는 엄마의 결핍을 어떤 사연이 설명할 수 있는 걸까. 손톱의 숨겨진 민낯은 두껍게 칠한 매니큐어가 마르면 감쪽같이 사라진다. 드라이기까지 동원하여 한참을 말린 손톱은, 긴 세월 보지 못한 아들을 향한 복잡한 감정이 숨겨지기를 기대한 엄마의 마음에 위안을 주는 장치일까. 엄마의 화려한 모습이 전달하는 그만큼의 결핍으로 인해 첫 만남부터 강렬하다.

루이가 가족의 집에 도착하고 나서는 꽉 막힌 긴장이 더 고조된다. 처음 만난 형수 카트린은 가족 중 루이와의 대화에 가장 적극적이다. 감독은 복잡 미묘한 긴장을 타고 어찌할 줄 모르는 가족 중 아직은 만들어지지 않은 관계인 형수 카트린에게 비중을 싣는다. 반가움도 잠시, 회피하고 싶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가족의 붕괴를 막아야 한다는 사명감이라도 부여받은 것처럼 카트린은 루이 곁에 앉아 이야기를 놓지 않는다. 그녀의 눈빛에는 시종일관 초조함이 묻어 있다.

엄마는 음식을 준비하고 형 앙트완은 내내 창밖만 바라보고 서 있다. 여동생 쉬잔은 쇼파에 누워 주구장창 담배를 피운다. 각자 영역 안에서 행동을 취하고 있는 그들 귀는 카트린과 루이의 대화에 열려 있다. 카트린에게 떠넘긴 12년만의 첫 만남은 그들 모두에게 두려움이다.

12년의 세월을 건너뛰고 가족의 얼굴을 보게 된 루이의 심경은 극 초반 비행기 안에서의 독백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두려움을 삭이고 그들을 만나러 간다'는 낮은 음성에 '가족에 대한 기대'는 없다. 유명세를 떨치던 작가가 시한부 삶을 선고받고 돌연 가족을 향해 떠나는 길은, 그것이 그의 삶에 마지막 도전이라도 되는 것같이 그려진다. 꼭 마무리 지어야 할 과제, 도전 말이다.

가족과의 만남이 더 이상 미뤄져서는 안 되는 이유엔 안타깝게도 '끝'이 존재한다. 죽음을 앞둔 자가 생의 처음을 기억하고 마주하고자 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하다. 영화는 그 당연한 과정이 어떤 이들에게는 쉽지 않다는 것을 수준급의 연기력과 세심한 기법으로 연출한다.

치밀하고 적나라하게 채우다

가족의 폭발하는 감정은 치밀하게 등장한다. 팽팽하고 무거운 감정들을 떠받치는 장치는 클로즈업된 인물들과 낮고 높게 극 전체를 휘감는 대사이다. 클로즈업과 대사에 충실한 영화는, 프랑스의 뤽 라갸르스가 쓴 동명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영화의 클로즈업은 초반부터 인물을 적나라하게 비춘다.

진한 화장을 한 얼굴 중심에서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느껴지는 엄마의 얼굴에는 감춰진 초조함이 있다. 여동생 쉬잔에게는 오빠를 향한 그리움과 미움이 동시에 공존한다. 남편의 동생을 처음 만난 카트린은 마치 곧 깨질 것 같은 유리를 다루는 듯 조심스럽다. 오랜만에 본 동생을 냉대하며 매몰찬 기색을 드러내지만 실상 그 감정의 이면엔 뜨거운 눈물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형 앙트완. 그리고 그토록 두려워했던 가족과의 만남에서 차분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어쩔 줄 몰라 헤매는 루이의 얼굴도 클로즈업을 통해 적나라하게 비춰진다.

물론 프랑스를 대표하는 배우들의 명연기와 연극적 요소가 다분한 작품을 정적이고 세련된 영상으로 완성시킨 감독의 연출능력도 영화 내내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움켜쥐게 한 중요 요인이긴 하다. 그 와중에 극의 '클로즈업'을 칭송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각 인물의 꽉 들어찬 화면 안에 그리움, 사랑, 증오, 슬픔, 안타까움 등 감정의 종합선물세트를 짊어지고 애면글면 살아왔던 세월이 전부 있었다고 해도 무리가 없는 것이다.

 12년만에 만나 긴장감 속에 대화하며 식사 하는 루이와 가족

12년만에 만나 긴장감 속에 대화하며 식사 하는 루이와 가족 ⓒ 엣나인필름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할 수는 있다

형수 카트린과의 어색한 처음을 지난 루이는 수순을 밟듯 다른 가족과도 밀착된 공간에서 대화를 이어간다. 유명 작가로 이름을 날린 작은 오빠의 신문기사를 스크랩하여 붙여놓은 여동생 쉬잔의 방에서는 자욱한 담배연기가 떨어져있는 둘 사이의 물리적 공간을 메운다. 연신 줄담배를 피워대는 쉬잔의 행동은, 다급할 정도로 그리워했던 오빠에 대한 감정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는 증거로 여겨진다. 자주 티격태격하는 큰오빠를 향한 힐난과는 정반대의 '동경'이 작은 오빠 루이를 향해 닿는다.

"오빠가 떠났던 건 실수 같아." "우리 보고 싶었지?"

솔직하게 터놓는 쉬잔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루이를 바라보는 관객의 타들어가는 심경은, 쉬잔의 손에서 타고 있는 담배와 같은 처지였다고나 할까.

옛날에 살았던 집에 가보고 싶다는 루이를 향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비난조로 대꾸하는 형 앙트완에게는 과거의 시간들을 다시 마주볼 용기가 없다. 두 형제가 어렸을 때 일요일마다 떠났던 가족여행에 대해 회상에 젖은 눈빛을 하고 주절주절 터놓는 엄마를 향한 앙트완의 책망은 동생 루이에게도 이어진다. 반복 재생되는 노래가사처럼 지겨운 엄마의 '옛날 얘기'에 미칠 것 같은데 12년 만에 찾아온 동생 녀석은 '옛날 집'을 운운한다. 루이가 없던 십여 년의 세월을 기억하는 것이 감정의 고역인 앙트완의 폭발은 '옛날'이라는 단어에 집중된다.

옛날 그 집이 얼마나 변했는지, 얼마나 망가졌는지 알고 싶지 않은 것은 엄마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의 조각을 퍼즐 짜 맞추듯 일부 맞추며 즐기는 것이 엄마의 취미지만, 불행한 사연이 에워싼 기억의 전체를 의미하는 옛날 집에 관해서는 뒷걸음질 하게 된다. 그건, 늘 멀리 떨어진 간격을 유지한 채 단 몇 줄의 요약된 편지로 안부를 전하던 작은 아들에 관한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다. 또 바뀐 집 주소를 가르쳐 주지 않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 없이 낭비한 아들의 시간들이 얄밉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도 사랑이다. 밉고 섭섭한 심정을 아들 면전에 쏟아 붓기만 할 줄 알았던 엄마의 주름진 입가에서 예기치 못한 말이 튀어 나온 것이다.

"널 이해 못하겠어. 하지만 널 사랑해."

극 중 루이가 동성애자인 성수자라는 점도 가족에게 이해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해하면서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과 '이해하지 못하지만 사랑하는 것'은 의지의 차이로 결판나는 것일까. 누군가를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는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으로 이끈다. 가족의 사랑이 피로 맺어진 운명 같은 것이라 말하고 싶진 않다. 운명이 있다면 가족을 불행한 시절로 이끈 장본인도 그 것이 되어야 할 테니까. 모든 것은 인간의 선택과 의지다.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할 수 있는 기막힌 감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나온다.

 "다음엔 더 준비하고 맞아줄게." 엄마와 루이

"다음엔 더 준비하고 맞아줄게." 엄마와 루이 ⓒ 엣나인필름


제한된 시간 속에서

그나마 신과 운명에게 부여할 수 있는 것이라 여겨지는 중대한 임무는 영화 막바지에 흘러나온 음악이 전한다. '오 주여 너무 힘이 듭니다'라며 운을 떼는 노래가사는 가족과 다시 행복해질 수 있는 시간을 더 갖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도망치듯 끝을 향해 가야만 하는 루이의 처절한 마음이다. 허망한 마음으로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신을 향한 원망으로 느껴진다.

왜 결국 가족과의 만남이 마지막이어야 했을까. 알 수 없이 흘러가던 인생, 그 끝을 암시하는 병, 그리고 두려워 멀리하던 가족을 만나게 되는 용기.

영화는, 생의 처음부터 끝까지 결코 혼자가 아니었음을 알고 떠나려는 자의 과정을 관조의 시선으로 비춘다. 그리고 비슷한 누군가의 아들이자 동생, 오빠인 이들과 그 가족에게도 위로를 건넨다.

꾹꾹 눌러왔던 감정들이 비집고 나오는 것을 막을 방법 없는 제한된 시간. 시간이 없고, 이것이 '끝'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며 가족의 감정은 극에 달한다.

"다음엔 더 준비하고 맞아줄게"라며 이별의 눈물을 감춘 엄마의 말. 그리고 시간이 없음을 자각하며 가족과의 마지막 만남을 위해 애썼던 루이의 초조함. 그 모두가 안타깝게 여겨진 것은 슬프게도 다음은 없다는 사실 때문이리라.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루이(가스파르 울리엘), 카트린(마리옹 꼬띠아르), 앙투안(뱅상 카셀), 쉬잔(레아 세이두)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루이(가스파르 울리엘), 카트린(마리옹 꼬띠아르), 앙투안(뱅상 카셀), 쉬잔(레아 세이두) ⓒ 엣나인필름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순지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rnjstnswl3)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단지세상의끝 자비에돌란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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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문화, 다양한 사회현상에 관해 공부하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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