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교사는 단순히 성별이 여성인 교사라는 뜻 외에 너무도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남교사라는 단어는 존재할지 몰라도 '여교사'처럼 통용되지 않는다.
둘째, 여교사는 '여성인 교사'라는 그 뜻 자체보다 섹슈얼한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된다.

당장 인터넷에 '여교사'라는 단어만 검색해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들은 단순히 성별이 여성인 교사가 아닌, 음란물이 다수이다. 오죽하면 구글에 '여교사'를 검색하면 성인 인증을 하라고 뜨겠는가. 즉, 여교사는 일종의 여성 혐오를 보여주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이 '여교사'라는 단어를 아예 제목으로까지 내세운 영화가 개봉했다. 미성년자 관람불가등급을받은 이 영화는 여러 우려와 함께 개봉했다. 막상 만난 영화 <여교사>는 개봉 전 가졌던 우려가 우스워질 정도로, 꽤 잘 만든 '여성 영화'였다.

'여적여'에 맞서다

 여교사

<여교사>에서 대립하는 두 여자, 효주와 혜영. ⓒ 필라멘트 픽처스



'여적여 프레임'은 대표적인 여성 혐오적 단어 중 하나다. 이른바, 여성은 본디 질투가 많기에 다른 여성을 적으로 둔다는 이야기. 이러한 미소지니 속에는 여성으로서 받는 사회적 압박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여성은 같은 성과를 낸다 해도 더욱 저평가된다. 여성은 애초에 여성으로서 부여받는 파이가 너무도 작다. 그 작은 파이를, 여성들은 나눠 가져야 한다. 그 속에서 서로 치열해지는 여성들의 모습이, 정말 '여성의 적은 여성'이기 때문이었을까. 오히려 여성의 진짜 적은, 여성 혐오가 아니었을까.

효주(김하늘)와 혜영(유인영)의 관계는 단순 '여적여' 프레임으로 읽히기 너무도 쉬운 관계다. 효주는 모든 것을 가진 혜영에게 열등감을 가지며 그녀에게 날을 세운다. 그녀는 모든 걸 가진 혜영과, 제자인 재하(이원근)의 부적절한 관계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런 재하를 가짐으로써 권력관계에서 혜영의 우위에 서려고 한다. 하지만 정말 효주와 혜영의 대립은 단순 '여적여'였을까.

그러기 이전에 효주에게는 너무도 많은 사회 맥락적 조건들이 존재했다. 그녀는 '비정규직'이며 '여성'이었다. 정규직 티오 하나만 바라보고 버틴 비정규직 교사 생활이건만, 딱 하나 생긴 티오는 낙하산으로 내려온 혜영의 차지였다. 게다가 그런 혜영의 뒤치다꺼리까지 해야 한다. 효주가 혜영의 '몰카'를 찍은 남학생의 핸드폰을 빼앗으며 징계를 내리겠다고 이야기하자, 돌아온 반응은 "정식 교사도 아닌 게"라는 새파랗게 어린 제자의 모욕이었다.

휴식을 취해야 하는 집에 가면 어떠한가. 10년 사귄 남자 친구(이희준)는 일을 하지 않고 자신에게 눌러 붙는 상황이다. 그는 집안일도 제대로 하지 않고, 글 쓴답시고 집에 머물지만 딱히 글을 쓰는 것 같지도 않다. 심지어 수업 시간 중 학교에 벌컥 찾아와 망신을 준다.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효주에게, 남자 친구는 이별을 선언한다. 어떤 합의도 없이 일방적이었다.

그에 비해 혜영은 '이사장의 딸'이다. 같은 여성일지라도 혜영과 효주 사이에는 계급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혜영과 비교되는, 효주의 사회 맥락적 조건들은 한 개인의 권력 유무에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효주가 받는 압박은 그녀가 비정규직 교사이지만 또 동시에 여성이기에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만약 그녀가 여성이 아니었더라면 결혼하고 임신을 걱정할 이유도 없었다. 그리하여 일자리를 잃는, 이른바 '경력 단절 여성'이 될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효주가 혜영을 견제하고, 그녀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그녀가 가진 것을 빼앗고자 한 것은 그녀가 단순히 여성이고, 여성의 본성이 '여적여'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계급적으로도, 젠더적으로도, 생존해야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여교사'였기 때문이다. '여교사'인 효주의 상황은 가부장제에서 흔히 소비되는 '여적여' 프레임에 정면으로 맞선다. 그리고 역으로 질문한다. 왜 '여적여'냐고 말이다. 그리고 관람객들은, 쉽게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

 영화 <여교사> 속 배우 김하늘.

영화 <여교사> 속 배우 김하늘. ⓒ 필라멘트픽쳐스



비록 효주가 혜영과 재하의 계략에 농락당했다 할지라도, 그녀는 제 욕망을 분출했다. 이른바 '코르셋'을 풀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처음 효주를 생각해보라. 그녀는 돈을 벌어오지도 않고, 효주가 벌어오는 돈으로 눌러 붙는 남자친구를 뒷바라지한다. 고단한 몸과 함께 집에 돌아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남자친구를 위해 또 밥상을 차려야 했다. 효주는 말도 없이 학교를 찾아온 남자친구에게 지갑을 열어 돈까지 쥐어준다. 그런 그는 효주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하며 "네가 좋아서 한 거잖아", "내가 해달라고 한 적 없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효주는 남제자 재하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에 솔직해졌다. 늘 질끈 묶고 다니던 머리를 풀렀다. 재하를 자신의 집에 들인 날 찾아온 남자 친구에겐 네가 필요 없다고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그녀에게 남자 친구는 '너 못 본 사이에 XXX이 됐구나'라며 비난을 퍼붓지만, 그의 욕설은 꼭 '김치녀'를 비난하는 사회 풍조를 떠올리게 한다. 욕망에 솔직한 여성을 비웃는 사회적 분위기 말이다.

농락당한 재하와의 관계 속에서도, 적어도 효주는 제 감정에 충실했다. 제가 원하는 것을 드러내며 무미건조했던 남자친구와의 관계와 달리 뜨겁게 사랑했다. 관계의 실체를 알고 나서도, 효주는 결코 온전히 실패하지 않았다.

재하는 '선생님이 시키는 것대로 했다'며 책임을 효주에게 전가 한다. 같은 '내가 해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내가 원하지 않은 일이다' 식의 말인데도, 남자 친구와의 관계 속에서의 언어와 재하와의 관계 속에서의 언어가 각각 내포하는 것은 너무도 다르다. 무엇이 정말로 효주가 원해서 한 일이었을까. 무엇이 정말로 효주가 온전히 자신으로서 원하여 저지른 일이었을까.

한 사람의 자기 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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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여교사> 스틸컷 ⓒ 필라멘트 픽처스



많은 사람들이 <여교사>를 보고 불편함을 토로했다. 그럴 만도 하다. 끝내 파멸하는, 기존의 여성상과는 다른 여성 캐릭터가, 사회의 부조리함을 잔인할 정도로 잘 그려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다소 잔인한 결말을 지니기도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여교사>가 보여주는 자기 파멸, 혹은 한 개인의 복수극은 결코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효주는 젠더 권력의 부재자와 계급 권력의 부재자로서, 그 권력을 지니지 못한 개인이 어떤 압박으로 미쳐갈 수밖에 없는지를 잘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교사>는 권력 구도가 명확한 현실에 대한 경고로 볼 수 있다.

또한 다른 각도에서 보았을 때, <여교사>의 서사는 효주의 복수극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리고 그녀가 복수에 성공하는 데는, 그녀가 전통적인 성녀, 창녀 따위의 여성성을 거부하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 물론 영화 초반 효주는 전형적인 '개념녀'로 등장한다. 하지만 효주는 자신의 재하에 대한 욕망을 직면하고, 자신을 감싸는 그 '코르셋'을 벗어 던지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한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부정하고 자신을 농락한 혜영과 재하에게 복수한다. 그런 효주는 여성을 카테고리화 하는 방식에 소속되지 않는다.

효주는 가장 흔히 사용되는 '어머니'라는 여성상이 아니다. 그녀의 모습은 성녀 혹은 창녀라는 이분법적인 프레임 속에서 타자화되어 그려지지도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긍정한다. 그 욕망을 부정하는 혜영에게 끓는 물을 부어 죽여버리며, 제 감정을 농락한 재하에게 그 혐의를 뒤집어씌운다. 그래놓고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저 샌드위치를 먹는다. 이게 복수가 아니면 무엇인가.

2016년 말, 영화계에서도 함께 분 페미니즘 붐은 다양한 여성 서사의 확장을 일으켰다. 더불어 많은 여성 서사가 주목을 받고, 흥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교사>는 여성 서사를 전면으로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에게조차 외면받고 있다.

그러나 이대로 묻히기에는, 영화 <여교사>는 생각보다 더 잘 만든 영화였다. 사회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사람이 어떻게 변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관람객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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