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회의 포문을 연 정하경주 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소장의 발언 모습

좌담회의 포문을 연 정하경주 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소장의 발언 모습 ⓒ 서지연


이번엔 한국 영화계다. 한 여자 배우의 고소가 '#영화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으로 폭로되고 있는 영화계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배우 A씨는 연기의 수위에 대해 미리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상대 남자 배우 B씨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최근 할리우드에서도 비슷한 논란이 일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의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인터뷰가 공분을 일으켰다. 그는 강간 장면에서 여자 배우와 사전 합의 없이 버터를 사용했다고 밝혔다. 여배우는 생전 인터뷰에서 "배우와 감독 모두에게 강간당하는 기분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배우가 아닌 소녀로의 마리아를 보려고 했다는 감독의 왜곡된 예술혼은 국제적으로 비난의 뭇매를 맞았다.

하지만 A씨의 경우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1심에서 재판부는 해당 사건을 과몰입에 의한 '연기'로 판단하고 B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검사는 항소했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동료가 피해를 입을 것 같았다"

16일 오후 2시, A씨를 돕고 있는 한국여성민우회(아래 민우회)와 영화계 내 성폭력 화두를 꾸준히 던져온 <씨네21> 공동 주최로 이번 사건의 엄중함과 심각성을 알리는 좌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정하경주 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소장, 조인섭 법무법인 신세계로 변호사), 손희정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연구원, 안병호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위원장, 이언희 <미씽: 사라진 여자> 감독, 배우 김꽃비, 이예지 <씨네21> 기자가 참여했다.

좌담회가 열린 가톨릭청년회관 바실리오홀은 이 문제의식을 공유하고자 하는 시민들로 붐볐다. 특히 말미에는 "나와 비슷한 억울한 상황에 있는 사람이 있다면 돕고 싶어서 왔다"는 배우 곽현화씨가 참석해 의견을 보탰다. 영화 <전망좋은 집>에 출연한 그는 자신의 동의 없이 상반신 노출신이 포함된 무삭제 감독판이 인터넷 파일공유사이트와 IPTV에 배포됐다며 이성수 감독과 2년 넘게 소송을 진행 중이다. 1심 재판부는 감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또 다른 동료가 비슷한 피해를 입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해자 A씨가 1심 판결 직전 민우회를 찾은 이유다. 정하경주 소장에 따르면 A씨는 피해자이지만 소극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B씨는 영화 인맥이 많은 사람이고, 남성 중심의 영화계에서 A씨를 명예훼손과 무고죄로 맞고소한 피고인과 싸운 다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했다고 전했다.

A씨는 예전에도 자신과 비슷한 일을 겪은 동료가 영화계를 떠나는 모습을 보아야 했다. 자신마저 침묵하면 또 다시 반복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A씨는 촬영 전 가정 폭력을 다루는 15세 관람가 영화로 들었으며, 문제 장면 역시 B씨가 A씨를 벽에 밀어붙이고 신음소리를 내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강간을 암시할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촬영은 A씨와 합의 없이 19세 상영 등급 수준으로 진행됐다. 사건 직후 이 일을 공론화한 A씨에게 B씨는 처음에 사과를 하고 하차를 받아들였지만, 이를 번복하고 감독이 요구한 연기를 했을 뿐이라고 무고죄 및 명예훼손으로 A씨를 맞고소했다.

법원은 "B씨가 연기 과정에서 가슴을 스치거나 엉덩이를 만진 것은 인정되지만 추행의 고의가 없었고, 고의가 있었다 하더라도 감독의 지시 하에 이루어진 업무상 정당 행위"라고 판단했다. 

이 대목에서 조인섭 변호사는 '고의'와 '업무상 정당 행위'라는 부분을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형사법상 고의라는 것은 미필적 고의도 포함한다.

특히 B씨의 행동에는 피해자의 승낙이 없었다. 피해자의 승낙과 관련해 법적으로 자주 언급되는 주요 분야는 의료행위인데,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하게끔 엄격하게 적용되는 부분이다. 또한 법적으로 업무의 내용이 사회 윤리상 정당한지 여부도 치열하게 판단해야 한다. 조 변호사는 "한국영화계 70년 역사상 추행이라 불린 것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결론은 결국 여배우가 성적 결정권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는 사회적 통념을 반영한다"고 설명했다.

두려움과 낙인... 이중고에 놓인 여배우들

<씨네21>이 마련한 대담에서 배우 이영진씨가 밝힌 것처럼 여배우의 경우 노출 신을 거부하게 되면 촬영장 분위기를 망치거나 까다로운 배우로 낙인찍히는 분위기가 영화계 전반에 만연해 있다.

손희정 연구원은 "이 문제는 연기, 연예 노동이 갖는 특수성과 보편성에 대한 종합적인 고려가 필요하다"고 했다. 감독이 영화산업으로 진출하는 등용문이 영화제에서 인정받는 것이다 보니 센 것을 계속해서 요구하게 되고, 남성화한 제도의 카르텔 속에서 여배우는 끝없이 대상화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여배우는 이미지 타격에 대한 두려움과 용기를 내어 폭로해도 결국엔 피해자의 이름만 남는 이중고에 놓여있다.

안병호 위원장은 예술이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악행들을 꼬집었다. 그에 따르면 영화계에는 감독이 배우와 정확한 소통 없이 "좋은 데 한 번 더 가자"는 식의 연출 방식이 마치 더 '영화적'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이런 잘못된 인식 아래에서 대부분의 배우들이 '계약 체결일로부터 발생해서 일을 다 마칠 때 종료 된다'는 식의 허술한 근로 계약서를 쓰고 노동하고 있다. 안 위원장은 "배우도 결국 노동자"임을 강조했다.

배우 곽현화는 1심에서 감독과의 대질 신문을 회상했다. 이수성 감독은 곽 배우를 향해 "<아티스트 봉만대>에서는 노출 신이 있으면서 내 영화에서는 왜 안 돼?"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영화판에는 합의하지 않은 여배우의 노출이 때로는 예술 영화로, 때로는 성인 영화라는 이름으로 당연시된다는 뜻이었다.

이언희 감독은 과거 자신이 연출한 영화에 노출 신을 찍고 난 후 배우가 "엄마가 보고 싶다"라는 말을 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영화에서 노출 신이 필요한지 합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이예지 기자는 좋은 디렉팅의 예로 <아가씨>의 박찬욱 감독을 들었다. 박 감독은 스토리본을 최대한 자세히 쓰고 배우와 피드백을 세세하게 반영했다. 또한 노출 신의 경우에 카메라 리모트 컨트롤(원격 조종)을 사용하고 남성 스태프를 모두 나가게 하는 등 세심하게 디렉팅을 챙겼다고 한다.

배우 김꽃비씨는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배우 생활 10년 간 자기 검열에서 벗어나 불편한 상황들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고 덧붙였다.

 이수성 감독 영화 <전망좋은집>에 출연한 배우 곽현화씨.

이수성 감독 영화 <전망좋은집>에 출연한 배우 곽현화씨. ⓒ 영화 캡처


배우 곽현화씨는 소송과 인터넷 댓글로 인한 2차 가해를 호소하기도 했다. 영화배우로 처음 도전한 기회였던 만큼, 진지하게 임했다는 그녀는 감독의 디렉팅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감독 측 "문제 없이 촬영"
이수성 감독 측은 "제작에 앞서 노출이 포함된 정식 계약서를 제출했으며, 사전에 콘티 등을 배우와 스태프에게 공유했고, 이후 아무런 문제 없이 모든 장면의 촬영을 마쳤다"고 반박했다.

재판부는 정식 계약서를 통해 촬영한 부분에 대한 저작권은 제작사에 귀속된다는 계약 내용에 따라 이 감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스태프가 이렇게 한 번 모이기 어려우니 일단 상반신 노출 신을 찍은 후 편집에서 논의하자"는 감독의 설득으로 해당 장면을 찍었으나, 편집과정에서 곽씨는 노출신이 불필요하다고 느꼈고 그의 요청으로 개봉판에는 이 부분이 삭제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동의 없이 인터넷 파일 공유나, IPTV를 통해 유료로 판매된 영상물에는 이 노출 신이 포함됐다.

곽씨는 재판 과정에서는 이런 영화계의 상황이나 정황들은 담은 녹취들은 참작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배우가 원하지 않는다면 노출신은 편집하겠다는 구두 약정만 믿고 촬영해 응했다는 사실은) 이례적이다"라는 법원의 판결 앞에서 그는 한 번 더 상처받았다고 한다. 악플 때문에 방송에서도 자기검열에 시달리느라 한동안 활동을 쉬며 가슴앓이를 했다고 전했다.

성폭력 2차 가해는 또 새로운 폭력이라는 말처럼, 이를 무겁게 여기고 막으려는 움직임도 있다. 정춘숙 더불어 민주당의 의원이 대표 발의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그것이다. 이 법안은 성폭력 사건이 불기소 처분 종료되거나 재판이 확정되기 전까지 무고죄를 조사·수사·심리·재판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신고율이 낮은 성폭력 범죄 특성상 무고죄 고소 남발로 성폭력 피해자가 사실상 피의자로 전환 되어 진술 조력권 등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면 2차 피해를 당할 수 있으니 이를 차단하자는 취지다.

여성계 전반이 환영의 뜻을 밝히고 있으나 고소할 권리의 침해라는 의견도 있어 법안이 통과될지는 미지수다. 대안으로 검찰 내부에 규제 방침을 두는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좌담회의 모든 패널들은 어떤 방향으로든 영화계 내 성폭력 피해자를 구제할 적극적인 제도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데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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