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신저스>는 과욕을 부린 작품이다.

영화 <패신저스>는 과욕을 부린 작품이다. ⓒ UPI 코리아


2013년 <그래비티>, 2014년 <인터스텔라>, 2015년 <마션>까지. 우주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얼추 다 나왔다고 생각했다. 적막한 우주에서 상처 입은 가슴을 돌아보는 인간이 있었고, 그로부터 생의 의지를 다시 부여잡는 드라마가 있었다. 스스로 삶의 터전을 파괴한 인류를 보이고 그로부터 과오를 돌아보게 하는 작품도 있었다. 그리고 2년이 흘러 다시 우주영화 한 편이 극장가를 찾아왔다. 바로 <패신저스>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일까? 할리우드 '블랙리스트(black list: 영화화되지 않은 시나리오 중 호평이 쏟아지는 작품 목록. 한국 문화체육관광부가 작성한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각본이란 풍문은 기대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왜 아니겠나. 역대 블랙리스트 명단엔 <슬럼독 밀리어네어> <킹스 스피치> <소셜 네트워크> 같은 뛰어난 작품이 즐비하고 이들 모두 재능 있는 감독과 만나 가능성을 만개시켰다.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 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비록 각색상만 받았지만, <이미테이션 게임>을 감독해 전 세계 영화팬에 이름을 알린 모튼 틸덤이 연출을 맡았다는 것도 희소식이었다. 여기에 크리스 프랫, 제니퍼 로렌스라는 할리우드 최고 주가의 배우가 주연을 맡아 "최고의 각본"이라는 호평을 쏟아냈으니 영화팬으로선 기대를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패신저스>는 우주라는 낯선 공간에서 인간에 집중하는 영화다. 모든 변수가 차단된 무균의 실험실, 혹은 하얀 도화지 위에 개미 한 마리를 올려두고 관찰하는 것처럼 낯선 공간에서 깨어난 한 인간의 내면에 집중한다. 아니, 그럴 것처럼 보인다.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너를 그리워한다

 오로라(제니퍼 로렌스 분)를 깨운 뒤 영화는 인간보다 사랑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오로라(제니퍼 로렌스 분)를 깨운 뒤 영화는 인간보다 사랑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 UPI 코리아


광속의 절반 정도 속도로 지구에서 출발해 120년을 가야 도달할 수 있는 행성, 터전Ⅱ를 향한 초호화 우주선 아발론 호 안에 짐 프레스턴(크리스 프랫 분)이 있다. 새로운 땅에서 엔지니어로 가치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짐은 기꺼이 새로운 터전을 향한 여행길에 오른다. 5000명의 승객과 258명의 승무원을 태운 아발론 호에서 짐은 120년 동안 동면상태로 여행하다 도착 4개월 전 깨어나 이주를 위한 적응교육을 받도록 예정돼 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짐 혼자만 먼저 깨어난 것이다. 그것도 무려 90년이나 먼저. 동면기를 고치려고 갖은 수를 쓰고 지구에 상황을 알려도 보지만 그럴수록 확실해지는 건 짐 홀로 이 넓은 우주선 안에 완전히 버려졌다는 사실이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노래도 해보지만 사무치는 외로움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짐의 눈앞에 동면기 안에 잠든 여성 오로라 레인(제니퍼 로렌스 분)이 나타난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녀가 그곳에 잠든 건. 오로라를 만난 후부터 짐의 시간은 오직 오로라를 깨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하는 시간으로 채워진다. 다시 잠드는 방법을 모르니 한 번 깨우면 돌이킬 수 없는 노릇이다. 나고 자란 지구를 떠나 60광년 떨어진 세상으로 향하는 선택의 무게는 얼마만큼일까. 한 사람의 삶을 완전히 망가뜨릴까 두려워 짐은 섣불리 그녀를 깨우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대로 홀로 지내기엔 혼자라는 무게가 너무도 커 짐은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로빈슨 크루소>부터 <캐스트 어웨이>까지 이어진 한 남성의 무인도 생존기는 그대로 첨단의 우주선 안에서 재현된다. 영화는 한술 더 떠 로빈슨과 척의 무인도 가운데 한 그루 선악과까지 심어뒀는데 관객 입장에선 그야말로 긴장감 넘치는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영원히 홀로 살지 모를 짐 앞에 매력적인 여인 오로라가 잠들어 있고 그는 원한다면 언제든 그녀를 깨울 수 있다. 어떤 목격자도 없는 완전범죄다.

나의 필요로 누군가의 삶을 부숴버려도 좋은가. 아무 잘못 없는 그녀와 가혹한 운명을 나뉘어도 괜찮은 걸까. 짐은 마침내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한다.

이것저것 다 하려다 어느 것도 제대로 못하는

 거대한 호화 우주선에서 홀로 깨어난 짐(크리스 프랫 분)의 선택은?

거대한 호화 우주선에서 홀로 깨어난 짐(크리스 프랫 분)의 선택은? ⓒ UPI 코리아


이로부터 영화는 고독에 몸부림치는 <캐스트 어웨이>에서 사랑이 피어나는 <타이타닉>으로 화한다. 침몰하는 여객선 가운데 둘의 사랑은 비등점을 향해 불타오른다. 수백 년 전 타이타닉호를 타고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나선 남녀가 그랬던 것처럼 3등석과 1등석의 차이를 뛰어넘어 둘은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패신저스>는 우주를 배경으로, 한 남자의 기묘한 운명을 그린 영화다. 그의 선택으로 뜨거운 멜로가 시작되고 긴박한 재난을 극복하며 예정된 해피엔딩에 안착한다.

그런데도 아쉬운 건 무엇 때문일까. <사랑의 블랙홀>이나 <샤이닝> <캐스트 어웨이>가 그린 다양한 방식의 고독과 권태, 외로움 대신 <타이타닉>의 사랑을 기꺼이 집어 든 선택, 그로부터 지워진 많은 가능성 때문이 아닐까. 낯선 공간에서 한 인간의 내면에 진득하게 집중할 것처럼 보였던 영화가 그 적막함을 견디지 못하고 화려하고 평범한 무언가로 돌아가고 말았을 때 느끼는 아쉬움이 이 영화 뒤에 남는 감정이다.

모든 변수가 차단된 무균의 실험실, 혹은 하얀 도화지 위에 개미 한 마리를 올려두고 관찰하고자 했으나 무균의 실험실은 덧없이 개방되고 개미는 도화지를 벗어나 흙으로 돌아갔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스타로드와 <헝거게임>의 캣니스 역시 별다를 것 없는 흔한 캐릭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노숙인 자활을 돕는 잡지 <빅이슈>와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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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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