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까칠하게 공연을 보고, 이야기 합니다. 때로 신랄하게 '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잘 만든 작품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하지 않을까요?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작품들이 더 많이 올라오길 바라봅니다. [편집자말]
어느 시대가 있었다. 지구 반대편, 영국의 어느 시대에서는, 여자들이 자신의 몸에 대해 말하는 것이 불법이었다. 그 뿐이겠나. 성에 대한 엄격한 잣대들이 만들어지던 시대였다. 그 시대의 산물들은 오늘 날 성에 대한 가치관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또 다른 어느 시대가 됐다. 이 땅에서는, 페미니즘 붐이 불고 있다. 그리고 그 붐은, 현실을 재현하는 무대에서도 함께 퍼져나가고 있다.

새로운 여성 서사를 그리는 뮤지컬 <레드북>이 등장했다. 창작 산실 우수 신작으로 선정되어 관객들을 만나게 된 이 작품은 <여신님이 보고 계셔>의 창작진 한정석 작가와 이선영 작곡가의 신작이다. 이 작품이 이야기하는 여성주의, 그리고 이를 넘은 '성'에 대한 담론은, 꽤 인상 깊다.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 누가 '남근'을 없앨 수 있나

뮤지컬 <레드북> 공연 실황 지난 10일,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개막한 뮤지컬 <레드북>의 공연 실황 사진. <레드북>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 여성이 재산을 갖는 것도 금지이던 시절 주체적인 여성 '안나'가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게 표출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페미니즘적 메시지를 유쾌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오는 22일까지. 유리아·박은석·지현준·김국희·김태한·주민진·윤정열·장예원 등.

▲ 유리아의 안나 지난 10일,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개막한 뮤지컬 <레드북>의 공연 실황 사진. <레드북>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 여성이 재산을 갖는 것도 금지이던 시절 주체적인 여성 '안나'가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게 표출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페미니즘적 메시지를 유쾌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오는 22일까지. 유리아·박은석·지현준·김국희·김태한·주민진·윤정열·장예원 등.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가장 인상 깊은 점은 아무래도 극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인공 안나일 것이다. 그녀가 겪는 수모는 현재 한국의 여성들이 겪는 수모와 매우 흡사하다. 그녀는 성희롱을 당하고 '친해지자고 농담을 한 건데, 뭐 그렇게 불편하게 구냐' 식의 언사를 듣는다. 이에 안나는 강하게 대항한다. 그녀가 겪은 희롱을 그대로 '미러링' 한다. 그런 그녀를 세상은 그다지 긍정적으로 봐주지 않는다. 경찰서에 잡혀간 그녀는 슬픈 감정을 잊기 위하여 '야한 상상'을 한다. 그 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해방한다. 그녀는 다른 여성들을 해방하기 위해 자신의 상상을 소설로 옮긴다. 자신이 바이올렛의 하녀로 일하며 그녀를 도왔던 것처럼 말이다.

비교적 자신을 해방한 여성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자기 자신을 알아봐 줄 다른 누군가를 찾는다. 그랬던 그녀가 변한 것은 '레드북'을 출판한 이후였다. 짝사랑하던 브라운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브라운을 찾아갔지만, 브라운은 자신의 소설이 담긴 '레드북'을 짓밟는다. 안나는 각성한다. 자신에게 주어지던 언어 '나쁜 여자'나 '야한 여자'를 선점한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일, 자신의 인생, 그리고 자기 자신을 인정한다.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라 할지라도, 남성과의 로맨스가 이뤄지면 그 캐릭터의 주체성이 상실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안나의 경우는 달랐다. 그녀에게 브라운은 결코 '백마 탄 왕자님' 따위가 아니다.

그녀는 '딕 존슨'이라는 악역이 자신을 추행하려 할 때도, 직접 그리고 홀로 그에게 맞선다. 그녀는 딕 존슨의 성기를 발로 찬다. 그리고 그 후, 딕 존슨은 성불구자가 된다. 딕 존슨의 성기가 물리적으로 불구가 되는 과정을 통해, <레드북>은 남성 중심적 사회 속의 남성성, 그리고 '남근'을 해체하는 여성 캐릭터의 면모를 보여준다.

남근은 단순 생물학적, 그리고 물리적 남성의 생식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팔루스'라는 개념은, 남성이 사회적으로 가질 수 있는 모든 권력과 힘을 동시에 상징하기도 한다. 이 남근(팔루스)이 해체될 때, 기존의 남성성과 여성성도 해체된다. 그리고 기존의 성에 대한 관념도 상당 부분 해체되어 재구성될 기회를 얻게 된다. 궁극적으로 딕 존슨의 패배는, 관객들에게 현존하는, '남성성' 중심적인 사회의 소멸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게 해준다.

극 속에서 이른바 '악역'을 담당하는 딕 존슨은 레드북에 반대하는 반여성적 운동을 선동하고 그들을 지휘한다. 그런 딕 존슨에게, 더 나아가 사회의 남성성에게, 그녀는 당당히 맞선다. 자신의 애인 브라운에게도 말이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유지한다. 자신이 미쳤다 이야기하라는, 일종의 타협을 권하는 브라운에게, 안나는 자신의 목소리를 굽히지 않는다. 그녀는 작가로서, 여성으로서,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그녀는 이 '투명한 사회'에 자신이라는 '새까만 얼룩'을 남기겠다고 노래한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재판에서 이기게 됐다.

퀴어 인물의 등장, 그리고 남성성/여성성의 해체

뮤지컬 <레드북> 공연 실황 지난 10일,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개막한 뮤지컬 <레드북>의 공연 실황 사진. <레드북>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 여성이 재산을 갖는 것도 금지이던 시절 주체적인 여성 '안나'가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게 표출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페미니즘적 메시지를 유쾌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오는 22일까지. 유리아·박은석·지현준·김국희·김태한·주민진·윤정열·장예원 등.

▲ 지현준의 로렐라이 직접 바이올린까지 연주하며 열연하는 배우 지현준. 그가 연기하는 로렐라이는, 사회적으로 규정된 남성성과 여성성의 경계를 허문다.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레드북>에서 안타까웠던 점이라면, 동성애자나 양성애자 등은 성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가 빠졌다는 점이었다. 단순히 극 중 서사에 등장하지 않은 게 문제가 아니다. 여장한 브라운이 로렐라이 문학회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리고 그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여자'라고 했을 때, 놀라는 로렐라이 문학회 사람들의 반응. 이 속에서도 '동성애는 배제된 것인가'하는 아쉬움을 자아낸다.

하지만 로렐라이 캐릭터를 통해, 이 극이 온전히 퀴어를 배제하지는 않았다는 일종의 변호가 가능하다. 로렐라이는 크로스 드레서이다. 그는 생물학적 남성이고, 남성 배우인 지현준이 연기하지만, 극 내내 여성의 옷을 입는다. 그는 남성이지만 여성 문학회인 로렐라이 문학회를 운영한다. 그는 곧 젠더퀴어라고 정의될 수 있다.

그는 극 속에서의 젠더퀴어 그 이상의 존재감을 가진다.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 로렐라이가 되기로 했으며, 그로 인해 오히려 가장 남자다운 남자가 됐다고 노래한다. 자신의 성이 생물학적으로 남성이기에, 자신이 하는 행동이, 곧 '남자다운' 행동이고, 자신은 '남자다운' 남성이라는 이야기다. 이는 기존의 남성성과 여성성의 개념과는 다르다.

남성 인물들에게도 적용된 페미니즘

뮤지컬 <레드북> 공연 실황 지난 10일,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개막한 뮤지컬 <레드북>의 공연 실황 사진. <레드북>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 여성이 재산을 갖는 것도 금지이던 시절 주체적인 여성 '안나'가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게 표출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페미니즘적 메시지를 유쾌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오는 22일까지. 유리아·박은석·지현준·김국희·김태한·주민진·윤정열·장예원 등.

▲ 박은석의 브라운 박은석 배우가 연기하는 브라운은 그 시대의 대부분 남자가 그렇듯 고정된 성 관념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하지만 안나를 만나면서 점차 변화한다.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이 뮤지컬은 페미니즘에 있어 연대의 가능성을 확대한다는 점에서도 더욱 의의가 있다. 첫째, 브라운이 안나와 로맨스에 성공하기 위해, 그는 자기 '남성성'을 해체했다. 한국에서는 흔히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라는 문장과 함께, 남성에게 일종의 강인함을 강조했다. 남성성이 상징하는 것은 강인함이나 냉정함, 이성 따위의 것들이었다. 처음 브라운은 자신이 안나를 좋아한다는 감정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할머니인 바이올렛에게, '타락한' 안나를 원래 상태로 돌리는 것이 '신사로서의 의무'지 않느냐며, 자신의 감정을 부인한다.

하지만 브라운은 로렐라이 문학회에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심지어 울기까지 한다. 그의 행동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남자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그런 남자답지 못한 행동이, 오히려 로맨스의 성공을 자아냈다.

또한, 브라운의 친구들로 등장하는 잭과 앤디는 자신을 '신사'로 자처하며 온갖 '남자다운' 행동들을 해댄다. 그들은 '신사 중의 신사'라는 노래를 부르고, '신사로서' 그들의 생각대로 세상을 바로잡고자 한다. 일종의 '맨스플레인(mansplain)'이다. 그런 그들의 행동은 멋있게 포장되지 않고 우스꽝스럽게 그려진다. 이 인물들은, 극의 마지막 안나의 재판에서 변한다.

잭과 앤디는 자신들이 왜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었는지 알겠다고 실토하며, 안나를 변호하는 데 꼭 필요한, 독자들의 후기를 구해준다. 처음 레드북을 비난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그런 잭과 앤디의 행동은, 일종의 페미니즘에 대한 연대 아닐까. 즉, 잭과 앤디를 통하여 <레드북>은 페미니즘이 가진 연대와 확장의 가능성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좋은 성과 나쁜 성

뮤지컬 <레드북> 공연 실황 지난 10일,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개막한 뮤지컬 <레드북>의 공연 실황 사진. <레드북>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 여성이 재산을 갖는 것도 금지이던 시절 주체적인 여성 '안나'가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게 표출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페미니즘적 메시지를 유쾌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오는 22일까지. 유리아·박은석·지현준·김국희·김태한·주민진·윤정열·장예원 등.

▲ 딕 존슨의 등장 안나를 성추행하는 딕 존슨. 권선징악적인 결말은 나쁘지 않지만, 그의 죄명이 '불법 포르노 제작'이라는 것은 다소 의아하다.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레드북>은 더 나아가 기존 사회에 존재하던 좋은 성과 나쁜 성의 개념에 대해 질문하기에 이른다. 극 중 브라운이 담당한 재판은 이혼 관련 재판이었다. 판사들은 기존의 성과 도덕성에 관한 담론으로 일관한다. '한 사람을 평생 사랑해야 한다'따위의 말로 말이다. 하지만 안나의 말로 변화했던 브라운은 사랑은 변하는 것이라며, 이혼을 성공시킨다. 이 부분에서 <레드북>은 이른바 '결혼'이라는 기존 성에 대한 관념, 도덕성 등에 질문을 던진다고 볼 수 있다.

기존의 성에 대한 판단은 주로 도덕성과 사회적 재생산을 기반으로 행해졌다. 그러기에 '결혼한' '이성과' '1대 1 관계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성관계는 성스럽고 아름답고 고결한 것, 즉 '도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숭배와 혐오는 결국 같은 뜻이다. 어떤 성이 찬사를 받지만, 어떤 성은 늘 비난받았다. 그 둘이 결국 같은 '성'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기존의 관념이나 도덕 따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성이 판단되는 기준은 그 성이 가지는 강제력의 유무, 권력의 유무, 상호 동의 여부 등이 되어야 한다. 도덕과 기존의 관념으로 판단되는 성은, 결국 특정 '성'의 배제를 낳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딕 존슨이 체포되는 이유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딕 존슨이 체포되는 이유는 불법 포르노 제작이었다. 그리고 그는 극 중에서 SM 플레이를 연상시키는 행위(채찍)를 한다. 다른 상황 맥락적인 것이 고려되지 않고 'SM 플레이'를 '불법 포르노'라 지칭하며 '나쁜 성'으로 만들고, 이를 극 중 악역인 딕 존슨이 수행하는 것은 기존의 성에 대한 관념을 답습한 것 같아 아쉽다. 하지만, 이 정도 사소한 아쉬움쯤이야. 이 극이 가진 급진성에 비하면, 앞으로의 담론의 장으로 남겨둔 채 넘겨둘 수 있는 부분이다.

어쩌면 <레드북>의 서사는 '결국 기승전-로맨스가 아니냐'는 평을 받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레드북>이 풀어낸 주제와 메시지로 반박할 수 있다. '기승전로맨스가 뭐가 어때?' 흔히 '여류 소설'이라는 호칭과 함께, 이 '여류 소설'이 그려내는 '로맨스'는 그 이름과 함께 어느 정도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그 로맨스가 뭐가 나쁘단 말인가. 왜 로맨스면 가볍게 평가되고 저평가 돼야 하느냔 말이다.

오랫동안 사회는 '여성'을 억압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가상의 허황한 공포를 설정하고, 그들의 허황한 악영향만을 이야기한다. 사회 질서가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 따위의 말을 하며 여성의 목소리를 막는다. <레드북>의 빅토리아 시대에선 레드북이 그러했고, 오늘날 한국에서는 바로 페미니즘이 그러하다. 하지만 <레드북>의 마지막 넘버처럼, 객석을 나서는 관객들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답을 얻게 된다. 우리는 각자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제2의 누군가가 아닌, 제1의 자신으로서 말이다. 결국, 페미니즘은,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학문이자 실천이고, 운동 아니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레드북>의 마지막 노래와 같은 말이 필요하다.

"당연한 것들이 당연해질 때까지,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어요. 거짓 된 말들이 고요해질 때까지, 더욱 큰 소리로 떠들어요."

페미니즘 뮤지컬 여성주의 레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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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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