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개봉작을 극장에서 다시 만나는 흔치 않은 기회, 올 한 해도 100편이 넘는 재개봉작이 영화팬을 찾아온다. 2010년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해 한 때의 유행처럼 여겨져온 재개봉은 불과 몇년 만에 군소극장을 먹여살리는 효자콘텐츠로 자리잡았다.

돈이 되다보니 재개봉작을 들여와 트는 상영관도 크게 늘었다. 2012년 8편에 불과했던 재개봉작은 2013년 28편, 2014년 61편으로 급속히 늘어나더니 2015년부터는 100편을 훌쩍 넘어섰다. 그렇다고 아무 영화나 모두 잘 팔리는 건 아니다. 잔잔한 분위기 가운데 추억을 자극하는 멜로와 드라마가 특별히 사랑받았다. 액션과 공포물은 유명한 작품이라도 흥행이 쉽지 않다.

재개봉은 장기상영관이 따로 없는 한국 극장가에서 개봉 당시 주목받지 못한 좋은 영화를 구제하는 창구로 활용된다. 상영 당시 인기를 끌지 못했어도 DVD나 IPTV로 잘 팔리는 영화가 많고, 좋은 영화를 스크린에서 보고 싶은 요구 역시 상당해 재개봉작이 줄을 이을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실제 일부 재개봉작은 개봉 당시보다 더욱 많은 관객이 드는 이변을 연출하기도 한다. 2005년 개봉한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이 대표적으로, 지난해 11월 재개봉해 무려 32만명의 관객을 모았다. 이밖에 <노트북> <500일의 썸머>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기 위해 10만이 넘는 관객이 극장을 찾았다.

관객의 선택을 받는 영화는 내려지지 않는다. 작은 영화의 상영 기회를 뺏는다는 일각의 비판에도 재개봉 열풍이 그저 열풍으로만 끝나지 않는 이유다.

그럼 이번달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재개봉영화 가운데 5편을 가려 뽑아 소개한다.

[하나] <반지의 제왕>

반지의 제왕 재개봉 포스터

▲ 반지의 제왕 재개봉 포스터 ⓒ (주)영화사 오원


톨킨의 책에서 튀어나와 넓은 스크린 위를 내달리던 반지원정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귀가 번쩍 뜨일 소식이다. <반지의 제왕>시리즈 3편이 1주일씩의 시차를 두고 오는 11일부터 한 편씩 개봉한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매해 겨울 개봉해 큰 인기를 끈 시리즈가 무려 16년 만에 극장으로 돌아온 것이다.

1편이 개봉했을 당시 태어난 아이가 수학능력시험을 준비할 만큼 긴 시간이 흘렀다. 과거 어느 영화와도 비견할 수 없는 큰 규모를 자랑하는 이 시리즈는 역시 큰 스크린에서 봐야 제맛이 날 듯하다. 21세기 영화사에 빼놓을 수 없는 <반지의 제왕>시리즈를 극장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이맘 때가 되면 <호빗>시리즈가 극장문을 노크하고 각종 판타지 블록버스터가 선을 보이지만 아직 <반지의 제왕> 만한 영화가 없다는 아쉬움의 목소리가 많다. 이들 영화에선 카리스마 넘치는 아라곤도, 멋이 뚝뚝 떨어지는 레골라스도, 묵직한 도끼질의 김리도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진면목은 세상에 단 3편, 오직 <반지의 제왕>시리즈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이번에 개봉하는 시리즈는 골수팬들을 위한 확장판이다. 가뜩이나 긴 시리즈에 각 수십분씩을 추가, 3편 기준 모두 170분이 더 길어졌다. 영화 한 편을 더 보는 꼴로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통해 화질과 음질도 향상됐다는 평이다.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이들은 반지를 버리러 가는 원정대처럼 나름의 각오가 필요할 듯하다.

[둘]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재개봉 포스터

▲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재개봉 포스터 ⓒ (주)노바미디어


<타이타닉>의 여주인공으로 기억되던 케이트 윈슬렛에게 첫 오스카 여우주연 타이틀을 안긴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도 19일 재개봉을 앞두고 있다. CJ CGV 등 대형 멀티플렉스도 지원에 나선 이 영화는 케이트 윈슬렛 생애 최고의 연기를 볼 수 있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으로 당시 나이의 장벽에 가로막혀 영화를 보지 못한 청춘 관객들이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주연 배우들의 과감한 노출이 등장하긴 하지만 노출 이상의 가치 있는 것들이 곳곳에 숨어 있는 만큼 주의를 집중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지난 2009년 개봉 당시 45만여명의 관객을 모으며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뒀다. 영화팬 사이에서 오래 회자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만큼 그 못지 않은 관객동원도 내심 기대하고 있다.

가난만이 아니라 지식의 부재 역시 자존감을 해칠 수 있다는 것. 경제적 배제뿐 아니라 문화적 무시가 약자들을 상처입히고 있는 오늘의 한국에서 여러모로 가치 있는 영화가 되겠다.

감독인 스티븐 달드리는 <빌리 엘리어트>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연출자로 <빌리 엘리어트> 역시 이달 재개봉을 앞두고 있다. 스티븐 달드리의 두 대표작을 함께 보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다.

[셋] <블랙>

블랙 재개봉 포스터

▲ 블랙 재개봉 포스터 ⓒ 이언픽쳐스


발리우드의 유명감독 산제이 릴라 반살리의 <블랙>은 인도영화치곤 비교적 한국에 익숙한 작품이다. 제작된 지 4년 만인 지난 2009년에야 한국 극장가에 상륙해 87만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인도영화의 대표격인 <내 이름은 칸>에 37만, <세 얼간이>에 22만명의 관객이 든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흥행이다.

재개봉영화의 일등 덕목이라는 '감동'에 충실한 영화로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소녀와 그녀에게 눈과 귀가 되어주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렇다고 인도판 '헬렌 켈러' 미담에 그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영화는 선생님이 어느날 갑자기 소녀의 곁을 떠나며 벌어지는 극적인 이야기를 그린다.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세상에 나선 그녀의 이야기에 관객은 벅찬 감동을 억누를 수 없을 것이다.

전형적인 신파극의 구성이지만 연출과 촬영, 연기만큼은 독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상가능한 영화라도 가드 위에 얹어지는 묵직한 펀치처럼 마침내 관객에 감동을 전할 힘을 갖췄다. 앙상한 계절, 더없이 따스한 기운을 전달하는 작품이다.

전 세계 누적관객수 10억명에 이르는 <블랙>의 흥행이 2017년에도 지속될지 주목된다.

[넷] <빌리 엘리어트>

빌리 엘리어트 재개봉 포스터

▲ 빌리 엘리어트 재개봉 포스터 ⓒ (주)팝엔터테인먼트


박근혜 대통령이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라고 해서 감동이 희석되긴 했지만 <빌리 엘리어트>는 절대로 폄하돼선 안 되는 멋진 작품이다. 꿈 꾸는 소년의 성공을 그린 성장드라마로 주인공 소년뿐 아니라 아버지를 포함한 가족, 발레 선생님, 성적소수자 친구 등 다양한 주변인물도 자연스럽고 매력적으로 담아냈다.

방과 후 권투를 배우는 탄광촌 소년 빌리. 매일 얻어터지기만 하고 재미를 붙이지 못하던 그는 같은 체육관에서 발레수업을 받는 소녀들을 바라보다 발레에 묘한 끌림을 느낀다. 사내자식이 발레를 한다는 편견과 가난 속에서 꿋꿋하게 꿈을 키워가는 빌리의 열정이 큰 감동을 선사한다.

영화의 성공 뒤 감독 스티븐 달드리는 연극연출가의 경험을 살려 <빌리 엘리어트>를 뮤지컬로도 제작했다. 뮤지컬은 영화 못지 않은 성공을 거둬 2009년 뮤지컬 분야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토니상 10개 부문을 석권했다. 이는 이 이야기가 지닌 힘이 보편적으로 호소력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성장드라마가 주는 벅찬 감동에 더해 가족애를 녹여내고 시대상을 반영하는 등 다양한 매력을 갖췄다.

탄광촌 소년이 발레를 한다는 설정에선 편견과 맞서는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무너지는 탄광촌 풍경에서 대처 정부의 실정이 빚어낸 당대 영국사회의 민낯을 만나볼 수 있다.

주인공인 제이미 벨은 <설국열차>에도 출연해 한국 관객에 낯이 익은 배우로 <빌리 엘리어트>를 통해 일약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19일 재개봉.

[다섯] <여인의 향기>

여인의 향기 재개봉 포스터

▲ 여인의 향기 재개봉 포스터 ⓒ 에스와이코마드


"탱고는 실수할 게 없어요. 인생과 달리 단순하죠. 탱고는 정말 멋진 거예요. 만일 실수를 하면 스탭이 엉키고 그게 바로 탱고죠."

매혹적인 여인과의 탱고, 시속 123마일의 페라리. 이런 것만이 인생이라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끝없는 어둠과 외로움도 역시 인생의 일부다. 19일 재개봉하는 <여인의 향기>는 그런 좋지 못한 것들에 피하느냐 맞서 싸우느냐의 이야기다.

마틴 브레스트 감독이 남긴 유일한 걸작 <여인의 향기>는 알 파치노와 탱고로 기억되는 영화다. 개봉 당시 너무도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지만 포르 우나 카베자(Por Una Cabeza) 유명한 선율에 맞춰 추는 탱고 이외에 많은 장면은 24년의 시간과 함께 휘발됐다. 그래서 이번 재개봉이 더욱 반갑게 느껴진다.

알 파치노는 이 영화로 그토록 멀게 느껴진 오스카를 손아귀에 넣었다. 무려 8번째 노미네이트 끝에 거둔 성과였다. 그가 영화 가운데 생면부지의 여성과 춘 탱고는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 되었다.

눈 먼 퇴역군인과 소심한 고등학생이 뉴욕에서 함께 보낸 부활절 연휴. 때로는 단 며칠의 시간이 삶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시키기도 한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순간 서로를 만난 그들은 예정된 비극을 멋진 성장드라마로 바꿔낸다. 멋스런 영화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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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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