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출하지 않으세요?"

배우 이원근이 인터뷰를 준비 중인 기자들에게 건넨 첫 마디였다. 괜찮다는 말에도 "지금 한창 당 떨어질 시간이잖아요. 우리 뭐 먹으면서 해요~"라며 조각 케이크와 호떡을 바리바리 챙겨 왔다. 기자들에게 포크를 하나씩 나눠주며 라운드 인터뷰(여러 명의 기자가 한 명의 취재원을 인터뷰하는 것)가 처음인데 종일 카페에 갇혀있으니 답답하다며 앓는 소리를 했다.

테이블 위에 단 것을 한 상 펼쳐놓고서야 대화, 아니 수다가 시작됐다. 종일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느라 지쳤을 법도 하건만, 그는 내내 밝고 유쾌한 톤으로 이야기를 쏟아냈다. 첫 영화, 첫 언론 시사, 첫 영화 인터뷰. 이원근에게는 <여교사>와 관련된 모든 일이 아직은 신기하고 즐겁기만 한 듯했다

첫 영화라 더 특별했다

이원근, '여교사' 흔드는 눈빛 영화 <여교사>에서 무용 특기생 남제자 재하 역의 배우 이원근이 23일 오후 서울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화 <여교사>에서 무용 특기생 남제자 재하 역의 배우 이원근이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시사회 전날 잠도 안 오더라고요. 자다 깨다 자다 깨다, 꿈까지 꿨다니까요. 제게는 정말 기념비적인 날이었거든요!"

그는 <여교사>를 "흥행과 상관없이, 복덩이 같은 작품"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100살까지 살더라도, <여교사>를 인생의 가장 큰 변환점으로 꼽을 것"이라면서 "감독님께 몇 번이나 말했는데 자꾸 '거짓말하지 마라'고 한다. 의심하지 마시라 해도 만날 의심한다"며 밝게 웃었다. 김태용 감독과는 영화를 찍는 동안 형·동생처럼 친해졌다더니, 그의 디렉션이 얼마나 꼼꼼하고 치밀했는지, 이르듯 설명하는 말투에 김태용 감독을 향한 애정이 듬뿍 담겨있었다.

<여교사>에서 이원근이 맡은 역할은 두 여교사 효주(김하늘 분)와 혜영(유인영 분)의 욕망을 자극하는 고등학생 재하다. 두 교사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하는 재하의 표정 하나, 눈빛 하나, 대사 하나, 모두 <여교사>의 긴장을 극대화하는 요소다.

"감독님은 목소리, 호흡까지 성인 느낌이 나는 걸 싫어하셨어요. 교복만 입는다고 학생이 아니다, 교복 입었으면 학생이 돼야지 왜 성인 연기를 하려고 하느냐고요. 전 혜영과 지하주차장에서 실랑이하는 장면도 남자답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감독님은 정말 애 같아야 한다, 18살짜리가 사랑을 해봤으면 얼마나 해봤겠느냐 하시더라고요. 한번은 상반신 노출 촬영 앞두고 몸매 관리하다 '식스팩 있는 고등학생이 어디 있냐'고 엄청 혼났다니까요. 하하하."

진짜 고등학생 연기하기

이원근, '여교사' 흔드는 눈빛 영화 <여교사>에서 무용 특기생 남제자 재하 역의 배우 이원근이 23일 오후 서울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이원근, '여교사' 흔드는 눈빛 영화 <여교사>에서 무용 특기생 남제자 재하 역의 배우 이원근이 23일 오후 서울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원근은 두 여교사 효주(김하늘 분)와 혜영(유인영 분)의 욕망을 자극하는 고등학생 재하 역을 맡았다. 재하의 표정 하나, 눈빛 하나, 대사 하나. 재하의 모든 것은 영화 <여교사>의 긴장을 극대화하는 요소다. ⓒ 이정민


재하의 표정이나 대사는 영락없는 10대 남학생. 그래서 그의 의뭉스러움과 영악함이 더 날카롭게 드러난다. 재하의 아이 같은 말투를 위해 이원근의 목소리라도 잠겨있으면 풀릴 때까지 기다려주고, 후시 녹음까지 했지만 '발음이 너무 또박또박하면 인위적'이라는 이유로 뭉개진 현장음을 그대로 사용하기까지 했다. 감독과 이원근의 이런 세밀하고 디테일한 노력 덕분에, 재하의 '묘한 느낌'은 뭉게뭉게 피어난다.

"재하가 효주에게 '찜질방 갈 거예요'라고 말하는 장면을 제일 여러 번 촬영했어요. 살짝 끼 부리는 느낌이 살아야 하는데, 저는 진짜 찜질방 갈 것 같이 말한다고요. (웃음) 얘가 진짜 찜질방을 간다는 건지, 효주를 유혹하는 건지, 알듯 말듯, 갈듯 말듯….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재하의 매력을 살려야 한다셨죠. 그 장면을 제일 먼저 찍었는데, 덕분에 재하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김 감독은 허리를 굽히고 있으면 '구부정한 무용수가 어디 있느냐'며 곧은 자세를 유지하도록 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대사하면 '재하는 건방진 아이는 아니'라고 알려주고, 우는 연기를 할 때는 비슷한 감정의 다큐멘터리까지 구해다 줬단다. 일대일 과외마냥 세심한 지도 덕분에 이원근도 배우로서 한 뼘 더 성장할 수 있었다.

"<여교사> 이후에 <환절기>라는 작품을 찍었는데,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었어요. 주변에서 <환절기>에 대해 좋았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저도 제 연기인데 너무 마음이 아픈 거예요.

하루는 김태용 감독님이 술이 엄청 취해서 전화하셨더라고요. 너는 내가 다 알려줬더니 다른 데서 써 먹냐고요. 화나서 <환절기>도 안 보신대요. 하하하.

<여교사>는 1년 반 전에 찍은 작품이라 지금 보니 아쉬운 부분도 많이 보였어요. 지금 다시 찍으면 물론 더 잘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감독님과 울고, 싸우고 하면서 정말 최선을 다해서 찍었어요. 그래서 후회는 없어요. (웃음)"

김하늘의 눈동자

이원근, '여교사' 흔드는 눈빛 영화 <여교사>에서 무용 특기생 남제자 재하 역의 배우 이원근이 23일 오후 서울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태용 감독의 일대일 과외마냥 세심한 디렉션은 배우 이원근을 한 뼘 더 성장시켰다. ⓒ 이정민


김태용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한바탕 쏟아낸 그는, 이번엔 김하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무 아름다워 모든 동작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는 들뜬 말투에서, 좋아하는 스타를 만난 팬의 생생한 후기가 느껴져 절로 웃음이 터졌다.

"제가 첫 현장이라 굳어있고 긴장하고 있었거든요. 하늘 선배님이 그걸 아시고는 '이거같이 먹자', '뭐 했어?' 이러면서 먼저 다가와 주셨어요. 저는 낯가림이 심한 데다 선배님께 다가가는 게 실례일 것 같아 주저하고 있었거든요. 먼저 다가와 주시니 너무 감사했죠."

김하늘의 연기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것 역시, 이원근에게는 큰 공부가 됐다. 특히 그가 감탄한 부분은 눈동자였다. 눈동자 떨림에서까지 감정이 느껴지는 그의 연기를 보며 "시선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는 법을 배웠다"고. 그런 깨달음은 <환절기>를 촬영할 때 큰 도움이 됐다.

"<환절기> 감독님이 시선의 떨림으로 감정을 표현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어떤 느낌인지 몰라 생각을 많이 했는데, 문득 하늘 선배님의 눈동자 떨림이 생각났어요. 하늘 선배님 모니터했던 기억을 되짚으며 연기했죠. '(하늘 선배님은) 이런 걸 고민하셨구나', '이렇게 연기 하셨겠다'고 하면서요. 큰 도움이 됐죠. 이게 성장하는 건가 싶었어요. (웃음)"

<여교사>가 넘어야할 산

이원근, '여교사' 흔드는 눈빛 영화 <여교사>에서 무용 특기생 남제자 재하 역의 배우 이원근이 23일 오후 서울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화 안에 어떤 메시지가 담겨있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든, '10대 제자와 교사들의 삼각관계'라는 소재가 주는 거부감은 <여교사>에 분명 마이너스 요소다. ⓒ 이정민


<여교사>에게는 넘어야 할 산이 있다. 영화 <여교사>는 거칠게 표현하자면, 고등학생 제자를 사이에 둔 두 여교사의 치정극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자존심이 짓밟힌 두 여자의 무력감과 분노가 촘촘히 담겨 있다. 치정극의 탈을 쓴 감정 스릴러인 셈이다.

영화 안에 어떤 메시지가 담겨있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든, '10대 제자와 교사들의 삼각관계'라는 소재가 주는 거부감은 <여교사>에 분명 마이너스 요소다. 우리 관객들 중에는 이런 소재 자체에 보수적인 이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노출이나 소재는 사실 <여교사>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키'예요. 그로 인해 사건이 발생하고 갈등이 촉발되는 거지, 그게 전부는 아니거든요. <여교사>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인간의 질투심은 끝이 어디인가', '열등감은 어떤 일들을 일으키나' 같은 거죠. 관객분들도 유인영 선배님이 연기하는 혜영의 얄미운 미소, 제가 연기하는 재하의 영악함, 김하늘 선배님이 연기하는 효주의 서늘한 감정을 섬세하게 따라가 주셨으면 좋겠어요."

<굿 와이프>의 이준호 변호사, <여교사>의 재하, 최근 웃는 얼굴 뒤로 의뭉스러움을 감춘 역할을 연달아 연기한 탓일까? 처음에는 밝은 표정으로 먹을 것까지 주며 먼저 다가온 그였지만,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거리감은 채 10분이 가지 않았다. 질문할 틈도 없이 이야기를 술술 쏟아내던 그는 귀여운 수다쟁이였고, 진지한 표정으로 연기와 영화에 관해 이야기할 땐 다음 작품이 더 기대되는 유망주였다.

분명 <여교사>는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는 영화다. 개인적으로 '불호'에 가까웠던 <여교사>의 결말은, 그와의 대화하는 동안 두 번 세 번 곱씹으며 '호'로 바뀌었다. <여교사>가 원래 그런 영화인 것인지, 이원근의 힘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처럼, 그 역시 보면 볼수록,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호감이 상승하는 배우 그리고 사람이었다.

2017년 첫 개봉작인 <여교사>부터, <환절기> <그대 이름은 장미> <괴물들> 등 그가 지난 시간 차곡차곡 쌓아온 작품들이 잇따라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2017년은 배우 이원근의 연기를 차근차근 곱씹을 수 있는 해인 셈이다.

"<여교사>를 기점으로 여러 오디션에 합격했고, 거의 쉬지 않고 여러 작품을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더 특별하고 감사한 작품인 것 같아요. 흥행과 상관없이, 제게는 복덩이 같은 작품이죠. 감사한 분들, 좋은 분들도 너무 많이 만났고요. 음…. 흥행까지 하면 더 감사하겠지만요. 하하하."

이원근, '여교사' 흔드는 눈빛 영화 <여교사>에서 무용 특기생 남제자 재하 역의 배우 이원근이 23일 오후 서울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불호'에 가까웠던 <여교사>의 결말은, 이원근과 대화하는 동안 두 번 세 번 곱씹으며 '호'로 바뀌었다. <여교사>가 원래 그런 영화인 것인지, 이원근의 힘인지는 모르겠지만. ⓒ 이정민



이원근 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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