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까칠하게 공연을 보고, 이야기 합니다. 때로 신랄하게 '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잘 만든 작품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하지 않을까요?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작품들이 더 많이 올라오길 바라봅니다. [편집자말]
어려운 작품이다. 95분이라는, 꽤 짧은 러닝 타임이지만, 이 연극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그 수없이 많은 것들을 작품 내에 잘 녹여낸 듯 했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들은 방대했지만, 과하진 않았고, 명확히 정의되긴 힘든 메시지긴 했지만, 어렴풋이 느껴질 수는 있었다. 이 작품의 이름은 <위대한 놀이>, 2016년 12월 3일부터 29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 111에서 공연된 작품이다.

공연 중 사용된 소품은 '테이프'가 다였다. 테이프는 많은 것을 표현해냈다. 극 중에선 심지어 '수류탄'도 '테이프'로 표현 됐다. 상상치도 못한 연출이었다. 공연은 '전쟁 속'이라는 꽤 묵직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지고 유쾌하게, 어쩌면 '놀이'의 형식으로 그 이야기를 무대에서 재현해냈다.

'옛날에 듣던 말들이 생각났다. 쌍둥이들은 연습을 다시 시작했다. 반복하다보면 말들은 그 의미를 잃는다.'

폭력의 본질

극 중에서는 언어에 대해 성찰해볼 기회를 꽤 많이 제공한다. 예컨대, 처음 쌍둥이의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아이들을 맡길 때, 어머니는 그 아이들을 '쌍둥이'라 이야기 한다. 이에 할머니는 '암캐처럼 둘이나 낳았다'고 이야기하지만 이에 대해 어머니는 '둘이 아닌 쌍둥이'라고 이야기 한다. 굳이 '쌍둥이'라는 단어와 '둘'이라는 단어를 혼용하는 점에서, 관객들은 평상시에 자연스레 사용하던 언어에 대해 이질감을 경험할 기회를 얻는다.

또 극 중에서는 쌍둥이가 스스로 아프지 않기 위하여 자신들을 폭력에 익숙하게 만든다. 이 후 할머니는 그들에게 폭력과 함께 '언어적인 폭력'을 가한다. 아이들은 때리는 것보다 언어  폭력에 더 싫은 감정을 드러내고 그 직후 무대에는 아이들이 들었을 법한 욕지거리가 가득 찬다.

그렇게 아이들은 서로를 언어폭력에 노출시키며 '아프지 않기' 위해서 그 폭력에 적응한다. 폭력에 적응하며 아이들은 매일 '욕먹을 만한' 행동들을 해댄다. 그리곤 서로가 그 폭언들에 익숙해졌는지 시험해본다. 아이들의 적응 훈련은, 그리고 이 훈련이 물리적 폭력에 대한 훈련보다 나중에 이뤄졌다는 것은, 관객들에게 '언어'가 가질 수 있는 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아마 언어가 물리적인 행위보다 낮게 평가되는 사회일 것이다. 언어  폭력은 물리적인 폭력보다 가볍게 치부된다. 하지만 과연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정말 전부인 것일까. 겉으로 상처가 나지 않았다고 해서 피해자가 겪은 폭력이 덜한 것일까. 어쩌면 <위대한 놀이>는 이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어가 필요한 이유

더 나아가 쌍둥이는 객관적이고 사실적 언어만을 사용하게 된다. 둘은 서로가 쓴 글을 잘했거나 잘하지 않은 것으로 나눈다. 객관적이고 사실적이지 않은 글은 나쁘게 평가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추측이나 감정들을 모두 지운다. 명백히 누군가가 죽었을 것 같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둘은 자신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죽었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표정이 미소 같을 지라도, 그 표정을 '미소'라 칭하지 않는다. 이는 또한 언어가 정의된다는 것이 어떤 힘을 가지는지 보여주고 있다. 설령 누군가가 진짜 죽었다고 해도 그 죽음이 '죽었다'고 정의되지 않는 이상 그 죽음은 죽음이 아니게 된다. 누군가의 미소가 미소라고 정의되지 않는다. 어쩌면 언어는 무언가를 정의할 수 있다는 그 자신의 힘을 통하여, 현실 사회를 뛰어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페미니스트라면 들어봤을 <우리에게는 언어가 필요하다>라는 책 제목처럼, 언어란 그 자체로 권력을 지니고 그러기에 중요하다. 21세기, 이제는 물론 보이는 권력도 건재하지만, 인터넷, 언론, 증시 같은 조금은 '보이지 않는 권력'들이 그 힘을 공유하고 있다. 어쩌면 이들은 보이는 권력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우리의 삶 속에 내재되어 있고, 형태 없이 떠돌아다니며, 우리의 사고를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어의 유무는 꽤 많은 차이를 야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여성 혐오'라는 단어가 지금처럼 공공연히 쓰이지 않을 때를 생각해보라. 많은 여성들은 삶 속에서 부조리한 일들을 겪었지만 이를 정의할 수 없었다. 여성들은 자기 위안을 넘어 그 모든 불편을 자신의 탓으로 환원 시키는 과정 속에 살았었다. 하지만 여성 혐오라는 단어의 사용이 확대된 후, 여성들의 삶은 조금 달라졌다. 여성들은 스스로가 겪던 것이 '미소지니'라는 것을 알게 됐고,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지는 수많은 사회적인 폭력들을 여성 혐오라 정의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이는 현재 페미니즘 운동이 더욱 확산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익숙해진다는 것

발바닥에 찔린 가시에도 아파하던 쌍둥이는 스스로를 고통에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두 쌍둥이는 서로에게 고통에 익숙해지기 위한 폭력을 선물했고, 이는 물리적인 폭력을 넘어 언어적인 폭력에도 이르렀다. 서로는 폭력에 익숙해졌고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사람은 끊임없이 익숙해진다. 이는 마치 쌍둥이가 아프지 않고 싶었던 것처럼, 살아남고 싶었던 것처럼, 각자 자신의 삶 속에서도 생존할 방법을 추구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익숙해진다는 것은 조금 편하게 생존할 수 있을 방법일지 모르겠다. 적어도 고통에 신음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적어도 모든 비인간적인 일들이 일어나도 그 일들에 있어서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은 채 '사실'만을 적어도 되니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산다는 것이 정말 사는 것일까. 스스로 아픔에 익숙해지도록 훈련하고 연습하는 것, 그것이 과연 우리가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인 것일까. 그리고 그게 과연 정말 생존인 것일까. 그게 과연 인간으로서 '아름다운' 것일까.

'프로 불편러'라는 말이 있다. 이러한 언어로 이들은, 스스로 불편함을 자처했다. 편안하기 위해서 그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것이 아닌 그 고통에 맞서는 것을 택했다.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프로 불편러'라는 비아냥거림이 섞인 언어에도 불구하고, 이 '불편한 사람들'은 그 불편함을 이야기하고, 의견을 제시하고, 싸웠다. 그 싸움은 지독히 고통스럽지만, 꽤 많은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그 선택 중 한 가지는, '고통에 익숙해질 것이냐, 아니면 지속적으로 아플지라도 이에 괴로워하고 무언가 삶을 더 나은 방법으로 만들까' 가 아닐까. 우리 삶은 전쟁처럼 물리적인 폭력이 남발되진 않아도 그 외의 보이지 않는 폭력들과 그 밖의 고달픔 속에 '전쟁처럼' 괴로운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린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선택은 무대를 나서는 관객들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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