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첨단의 예술이다. 소설의 서사성과 시의 서정성을 갖췄고 시청각적으로 뇌와 가슴을 자극한다. 계산된 동작과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배우들은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서, 그 안에 자리 잡은 의도 가운데 감독은 관객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예술의 본질이라 할 만한 표현과 수용, 다시 표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영화만큼 활발하게 이뤄지는 분야도 없을 것이다. 기성 영화평론가뿐 아니라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이 말과 글, 그밖에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감상을 전한다. 감독의 표현이 관객에게 전해져 또 다른 표현을 낳고 그 표현들이 모여 하나의 담론을 이루며 사회에 긍정적인 파장을 만들어간다. 예술은, 그리고 영화는 그렇게 사회를 발전시킨다.

좋은 영화는 사회를 더 낫게 변화시킨다. 때로는 사회를 향한 직접적인 메시지로 때로는 보는 이의 감정을 건드리는 울림으로 영화는 사회와 영향을 주고받는다. 좋은 영화는 엔딩 크레디트가 오른 뒤 독자를 전과는 조금쯤 다른 사람으로 보이게 만든다. 영화가 관객의 내면에 작은 돌을 던지고 그로부터 긍정적인 파문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외부의 자극과 내면의 변화, 그런 작용을 거쳐 인간은 비로소 성장한다.

올 한 해 보는 이를 한층 성장하게 한 좋은 영화가 여럿 개봉했다. 그 가운데 몇은 당신의 눈에 들었겠으나 그보다 많은 영화가 그저 곁을 스치고 지나갔을 것이다. 영화의 깊이나 만듦새가 최소한의 흥행도 담보하지 못하는 왜곡된 구도 속에서 너무나 많은 좋은 영화가 입소문도 타기 전에 쓸쓸히 퇴장하는 모습을 나는 여러 차례 목격했다. 그들이 지금보다 더 많은 관객에게 보였다면 얼마나 많은 긍정적인 담론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나는 실현되지 않은 그 가능성이 몹시 안타깝다.

그래서 여기, 보고 또 보고 다시 봐도 아깝지 않을 좋은 영화 5편을 추려 소개하려 한다. 모두 세 편으로 나눠 쓰는 기획으로 상편에선 지난 12달 극장가 풍경을 살펴봤고, 이번 중편에선 한국사회에 긍정적 파문을 남길 수 있었을 좋은 영화를 돌아보며, 다음 하편에선 지난 한 해 한국영화계에서 발생한 의미 있는 일을 되새기려 한다.

* 관련기사 : 올해 최고의 영화는? 월별로 살펴본 2016년 영화 성적표

[하나] 아담 맥케이, <빅쇼트>


<빅쇼트>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 대출) 사태를 다룬 극영화다. 그보다 건전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미국 주택담보부대출 파생상품들이 투자은행과 금융당국, 신용평가사 등 금융계 전체의 도덕적 해이와 맞물려 국제적 경제위기를 초래한 21세기 최대 경제위기가 바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다. 이 사건으로 전 세계 수위를 다투는 투자은행들이 줄지어 도산위기에 처하고 금융계의 종말, 나아가 세계 경제의 파국을 예견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모두가 알지만, 충분히 알지는 못한 이 이야기를 2시간 내외의 극 영화 한 편에 담아내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이 영화 이전, '가능하다'고 말하는 이가 있었다면 웃음거리가 되었을 게 분명했다. 사태가 종결된 지 8년여가 흐르기까지 이 사태를 전면에서 다룬 이렇다 할 작품이 나오지 않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영국 출신의 연출자 아담 맥케이는 모두가 힘들 것이라 했던 이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다. 탄탄한 원작의 도움이 컸지만 영화 자체적인 혁신적 시도가 이를 가능케 했다. 영화는 원작의 구성을 따라 크게 네 개 투자가 집단을 주인공 삼아 옴니버스식으로 돌아가며 비춘다. 사태 당시 공매도(실제로 갖고 있지 않은 물건을 빌려 판 후 나중에 물건으로 갚는 방식으로 투자대상의 가격이 내려가면 이익을 보는 투자방식) 투자를 한 실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시장 전체의 비합리성을 일깨운다는 것이 영화의 목적이다.

현대 금융에 대한 초보적인 이해만 가진 관객일지라도 영화를 즐기는 데 큰 무리가 없을 만큼 친절한 작품이다. 2시간짜리 극 영화라는 테두리 안에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전반을 이해하기 쉽게 담으려 감독 이하 제작진이 얼마나 고심했을지가 훤히 보이는 장면들로 영화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실제로는 들을 수 없는 진심을 모든 인물에게서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분량의 제약이 심한 영화이기에 장면이나 캐릭터, 하다못해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도 허투루 들어가지 않았다. 관객은 이로부터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둘러싼 총체적인 문제를 효과적으로 접하게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그 장면에 등장하는 이유가 있고, 이들이 내뱉는 대사 역시 함축적이고 상징적으로 배치됐다.

수조 원대 회계사기와 경영 비리로 검찰의 대대적인 수사를 받는 대우조선해양 사건을 지켜보며 영화 속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우리 가운데서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동시에 한국사회가 <빅쇼트>로부터 배우고 느껴야 했을 것들이 적지 않았으리란 판단도 든다. 이런 영화에 고작 44만 관객이 들었다는 건 아무리 냉정하게 생각해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 참고기사 : 친절한 <빅쇼트>씨, '보이지 않는 손' 신화의 민낯 까발리다

[둘] 대니 보일, <스티브 잡스>


이제는 명감독이란 말이 위화감 없이 어울리는 대니 보일과 할리우드 최고의 주가를 자랑하는 극작가 아론 소킨, 차기 오스카 수상자 1순위로 꼽히는 마이클 패스벤더가 만나 빚어낸 멋진 전기영화다. 아론 소킨은 온갖 장치와 대사로 극을 공백 없이 가득 메우고 대니 보일은 장기인 현란하고 능란한 연출로 영화에 속도감을 더한다.

비범한 작가들의 진검 승부가 영화 내내 펼쳐지는 가운데 마이클 패스벤더의 진중한 연기가 관객을 사로잡는다. 아론 소킨과 대니 보일이 각기 이성과 직관의 영역을 담당한다면 마이클 패스벤더는 감성의 영역에서 영화에 깊이를 불어넣는다. 이들의 활약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관객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대사와 상징, 이면에 가득 깔린 복선과 디테일이 영화엔 시종 넘실거린다. 관객은 촌각을 다투는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어떤 성품을 지녔으며 그들 사이엔 어떤 사연이 있는지를 짐작한다. 어느 관계, 어느 사건 하나 쉽게 풀어 설명되지 않고 이야기는 앞으로, 앞으로만 내달린다. 내달리는 극도, 현란한 연출도, 나태한 관객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때로는 속도감이 지나쳐 불친절하게도 느껴지지만, 그보다는 이 시대 가장 재능 있는 작가들의 진검승부를 지켜보는 듯한 짜릿함이 더욱 크다.

올 1월 21일 개봉해 전국 6만8000명의 관객을 모은 <스티브 잡스>는 짝을 찾기 어려운 전기영화다. 사실을 재구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형식 면에서도 파격을 거듭해 스티브 잡스의 성품이 고스란히 영화로 반영된 것 같다는 호평도 받았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사회 문화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스티브 잡스를 할리우드가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식으로부터 한국 영화계, 나아가 한국사회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 참고기사 : 편집의 힘, 이토록 현란한 전기 영화라니?

[셋] 윤가은, <우리들>


지난 6월 16일 개봉해 4만6000명의 관객이 든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은 아이들의 세계를 통해 어른들의 세계를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다소 고전적인 형식의 작품이다.

영화는 때 묻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의 사회가 실은 어른들의 세계와 그 본질이 다르지 않고, 심지어는 더욱 폭력적이고 비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로부터 영화는 영화 속 '우리들'의 이야기를 영화 밖 '우리들'의 이야기로 끌어내 관객 앞에 펼쳐 보인다.

<우리들>은 많은 이들이 일찍이 고민했음이 틀림없고 앞으로도 고민할 수밖에 없을 '관계 맺음'에 대한 이야기다. 특별히 관계 맺음이 가장 서툴면서도 간절한 시기를 배경으로, 비슷한 경험을 가진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산다. 무엇보다 감독 자신의 자전적 경험에서 출발했기에 진솔하고, 관객 다수가 유사한 경험과 고민을 했을 거란 점에서 울림이 있다.

우리는 왜 타인에게 진실할 수 없는가. 어째서 진실한 마음을 내보이면 상처받게 될 거라 지레짐작하고 불안에 떠는가. 비겁해서, 나약해서, 그 잘 난 자존심 때문에 우리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어른스런 관계 맺음을 하고 있지 못한 게 아닌가.

주지하다시피 관계 맺음은 사회의 기초를 이룬다. 강한 사회는 개인들의 건강한 관계에서 출발하며 부실한 사회는 그 반대다. 병신년 오늘의 한국이 아이들의 사회로부터 보고 배워야 하는 이유다.

* 참고기사 : 영화 속 '우리들'로 보는 영화 밖 '우리들'

[넷] 제임스 밴더빌트, <트루스>


8월 24일 개봉해 1만9000여 명의 관객을 모은 <트루스>는 언론을 다룬 많은 영화 가운데서도 특별하게 기억돼 마땅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불과 2시간여의 러닝타임 동안 언론의 역할과 한계를 영리하게 내보이고 이와 관련된 가치 있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트루스>가 있기 전에 이 만큼 현대 언론과 언론인을 다양한 층위에서 그려내려 한 작품이 있었던가. 나는 알지 못한다.

영화는 CBS 탐사보도팀이 2004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조지 W. 부시의 병역 비리를 고발하다 부실한 취재로 인해 역풍을 맞은 실화를 배경으로 한다. 전반부는 사명감 있는 언론인들이 권력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진실을 파헤치는 활약상으로 채워지지만, 후반부는 보도과정에서 벌어진 문제와 이를 무마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윤리적인 문제들이 전면에서 다뤄진다. 선과 악의 경계가 무뎌지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이 한바탕 뒤엉켜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다.

<트루스>는 현대 언론과 언론인이 처한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언론이 자본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는 사실, 취재가 그 목적이 지향하는 것만큼 윤리적으로 이뤄지기 어렵다는 점, 공적인 업무에 충실할수록 가정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기자의 삶, 소속 기자들을 보호하지 않는 언론사의 비겁한 태도 등 언급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다.

<트루스>는 그 자체로 날 선 질문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부시의 병역비리의혹을 거듭 제기하는 것만큼이나 영화 역시 관객들에게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 질문의 강도와 깊이를 따져 볼 때 <트루스>는 최근 수년간 제작된 수많은 언론 관련 영화의 끝판왕 격이라 할 만하다.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스포트라이트>가 작품상을 받았다지만 나는 <트루스>가 결코 그보다 못하지 않은 작품이라고 확신한다.

한국 사회 상당수 언론이 그 기능과 역할을 의심받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반드시 봐야 할 영화다.

* 참고기사 : 이제껏 이런 영화는 없었다... 분노가 치민다

[다섯] 켄 로치, <나, 다니엘 블레이크>


올해 발표한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황금종려상을 두 번째 수상한 켄 로치는 살아있는 전설이라 봐도 무방한 거장 중의 거장이다. 올해로 80이 된 그는 전작들을 통해 파시즘과 신자유주의, 전쟁 등 인간의 존엄을 위협하는 각종 폭압적 지배체제에 거듭 경고음을 울려왔다.

그런 그가 이 영화에서 영국 복지제도의 문제점을 고발한다. 영화의 주인공인 다니엘은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목수다. 인터넷이니 스마트폰이니 새로운 문물은 잘 모르지만, 나무와 작업 도구만 있으면 뚝딱뚝딱 못 만드는 게 없다. 하지만 정신질환으로 오랫동안 투병하다 죽은 아내를 간호하며 그간 모아둔 돈을 모두 쓴 그의 삶은, 심장병 진단과 함께 나락까지 추락한다.

영화는 관료화돼 사람을 돌아보지 않는 영국 복지체계의 허상을 드러낸다. 외주업체 콜센터 직원이 쇄도하는 상담 전화에 기계적으로 응답하고 정부 공무원들은 양식화된 매뉴얼만 요구한다. 눈앞의 진실엔 누구도 관심이 없고 돈 없는 사람은 지폐 한 장보다 배려받지 못한다. 관청 밖에선 성실한 시민이 역시 성실한 시민이었을 누군가에 '복지나 타내는 게으른 놈'이라는 비난을 쏟아낸다.

송파 세 모녀 사건을 기억한다. 일자리를 잃고 살아갈 방도가 없어지자 남에게 폐 끼치는 일 없이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엄마와 두 딸은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가는 순간까지 집주인에게 미안하다는 편지와 함께 공과금과 월세를 남겼다. 가는 순간까지 존엄을 지키려 했던 그네들의 모습이 영화 속 다니엘의 모습과 겹쳐지는 듯도 하다.

사건 이후 박근혜 대통령은 그들이 긴급복지지원제도를 알았다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가난한 자가 그 제도를 알고 직접 동사무소로 와 자신의 가난을 증명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설사 그들이 그렇게 했다고 해도 제도의 허실로 수급대상이 될 수 없었음이 여러 전문가의 증언으로 입증되기도 했다.

영화를 통해 켄 로치가 강조하는 건 막연한 선의가 아닌 실제적 도움이다. 극 중 다니엘이 케이티에게, 다시 케이티의 딸이 다니엘에게 그랬던 것처럼 단순한 선의가 연대로 발전해 구체적인 변화를 끌어내야 한다는 게 그가 내놓은 해답이다. 네가 문을 열고 나오기 전에 내가 너의 문을 두드려야 한다는 것, 이것이 다니엘과 케이티, 그와 같은 처지에 놓였거나 놓일 수 있는 한국 사회 구성원들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곳곳에서 사회안전망이 붕괴하고 나락으로 추락하는 이웃의 모습이 목격되고 있다. 영화 속 영국의 부조리가 내가 사는 이 나라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던진 메시지는 대륙 반대편 한국에서도 놀랄 만큼 유효하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아직 소수의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다.

* 참고기사 : "코코넛과 상어 중에 뭐가 사람을 더 많이 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