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판도라>에서 핵발전소 현장 소장 평섭역을 맡은 정진영.

정진영은 <판도라>의 대본을 가장 먼저 받아 본 사람 중 하나였다. 반(反)원전 주의자였던 그에게 찾아온 반원전 영화였다. ⓒ 권우성


국가적 위기는 언제나 평범한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해결된다. 역사적으로도, 현실에서도, 영화에서도. 평범한 소시민들은 위기의 상황에서 그렇게 영웅이 된다. 배우 정진영이 <판도라>에서 연기한 박평섭 소장도 그런 인물이었다.

13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정진영을 만났다. 그는 <판도라>의 대본을 가장 먼저 받아 본 사람 중 하나였다. 반(反)원전 주의자였던 그에게 찾아온 반원전 영화. 그는 책(시나리오)을 읽는 내내 "아니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영화가, 이 정도 스케일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싶었다고. 그는 "만들어지기만 한다면 무조건 한다"는 마음으로 곧장 출연을 결정했다.

합리적 의심

 영화 <판도라>에서 '평섭' 역을 맡은 배우 정진영. 그는 '무조건 한다'는 생각으로 작품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영화 <판도라>에서 '평섭' 역을 맡은 배우 정진영. 그는 '무조건 한다'는 생각으로 작품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 NEW

"1980년대 대학을 다녔잖아요. 그때 진보 의제 중 하나가 환경 운동이었어요. 그래서 오래전부터 원전에 대한 문제점을 느끼고는 있었죠. 전 원전의 안전성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해요. 폐연료봉의 반감기가 20만 년인데, 이걸 안전하게 격납할 수 있는 시설이 현재 지구상에 없어요. 이제 하나를 짓고 있죠. 황당하지 않습니까?"

그는 "(폐연료봉) 보관비용을 생각하면 원전의 최대 장점인 경제성도 무색해진다. 사고가 나면 돌이킬 수 없는데, 제대로 된 대비책도 없다. 게다가 원전 부품 납품 비리 뉴스도 있지 않았나. 유지관리가 잘 되고 있는가, 과연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의심은 합리적 의심"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영화 <판도라>는 상업 영화의 스토리 라인을 그대로 따라간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관련 정보와 메시지는 잘 만들어진 원전 다큐멘터리에 비견해도 될 정도였다. 정진영은 "감독이 원전에 대한 교과서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면서 "관객분들이 영화를 통해 원전 문제에 경각심을 갖게 되셨으면 하고 바랐던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라며 만족스러워했다.

현실이 돼 버린 허구

사실 원전은 우리에게 그리 낯선 문제가 아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벌어진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보았음에도, 대다수 우리 국민들은 이를 '남의 일'로 여겨왔다. 우리나라는 지진 안전지대에 있다는 믿음과, 방사능은 눈에 보이지 않아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영화 개봉 즈음 터진 경주 지진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아니었더라면, 관객들이 <판도라>를 통해 느끼는 공포는 훨씬 덜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를 <판도라>에 호재라고 보기도 했다.

"저희는 당혹스러웠어요. 재난 영화라는 게, 영화를 보고 나올 땐 안도감을 가져야 하거든요. 그게 상업영화로서 재난영화의 포인트예요. 현실과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어야 하는데 이게 뭔가 싶었죠. 겁먹으라고 만든 영화는 아니거든요. 우리의 목적은 '원전 문제를 수면 위에 올려 함께 고민해보자'였는데…."

원전의 위험성을 부각하기 위해 설정한 극 중 대한민국의 모습이, 4년 사이 현실이 되어버린 탓이다. 그는 관객들이 <판도라>를 통해 느끼는 공포의 이유를 "우리 국민이 여러 정치적 사태를 목격하면서 학습하신 것 같다"고 분석했다.

 영화 <판도라>에서 핵발전소 현장 소장 평섭역을 맡은 정진영.

영화와 현실은 어느 정도 거리감을 유지해야한다. 하지만 <판도라>의 허구는 어느새 현실이 되어 버렸다. ⓒ 권우성


<판도라>가 놓인 묘한 지점

"<판도라>는 재난 영화의 어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요. 하지만 국민들은 그 안에서 시국을 읽고 계세요. 그게 이 영화가 놓인 묘한 지점이죠. 불신, 불안…. 우리 국민이 그만큼 마음을 다친 거예요."

JTBC의 최순실 태블릿 PC 보도로 확산된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며 정진영은 "만약 JTBC가 아니었더라면, 저 태블릿 PC가 남아있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모르고 그냥 살았어야 했던 건가,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었던 건가 생각했다"며 "오히려 그게 더 무섭고 당혹스러웠다"고 말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현 시국으로 넘어갔다. 그 역시, 최근 수능을 마친 아들과 함께 5차 6차 광화문 집회에 참석했다. "주위 시민들에게 들키지 않았느냐"고 묻자, "티 안 나게 조용히, 조심해서 다녀온다"며 웃었다. "불이익이 걱정돼서가 아니라, 대단한 일도 아닌데 주목받는 게 싫어서"다.

1980년대 대학가 주도의 민주화 운동을 경험한 세대인 그에게, 이번 촛불 시위는 어떻게 보였을까? 몇 초 뜸을 들인 그는 "놀랍고 감동적이었다"며 말을 이었다.

"새로운 세대로 넘어갔다는 느낌이었어요. 새로운 힘인 거죠. 남녀노소, 어린아이들까지 데리고 나오시잖아요. 평화로운 집회라는 믿음, 위험성이 없다는 믿음이 있었으니 가능한 거예요. 이 사태에 분노한 분들이지만 흥분해서, 홧김에 나왔다기보다 침착하게 고민하고 나오신 모습이었어요."

 영화 <판도라>에서 핵발전소 현장 소장 평섭역을 맡은 정진영.

1980년대 대학가 주도의 민주화 운동을 경험한 그에게, 이번 촛불 시위는 어떻게 보였을까? 정진영은 몇 초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 권우성


배우도 국민의 한 사람

그는 자신 말고도 많은 배우들이 광화문에 다녀왔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배우들끼리는 '나 갔다', '너 갔냐' 하면서 알음알음 알고 있다고. 그는 "배우라고 특별한 사람인 건 아니지 않으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과 같은 마음으로 나간 것일 뿐 대단한 일이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하지만 전면에 나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김제동과 이승환에 대해서는 "정말 훌륭한 사람들"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하기도 쉽지 않은데, 그들처럼 지속해서 일관되게 행동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면서. 그는 "연예인이라서가 아니라, 일반인이라 해도 그 정도면 시민운동가 수준"이라며 "존경스럽다"고 말했다.

이야기가 이어지다 보니 자연스레 촛불 집회 참여나, 시국에 대한 생각을 밝혔지만, 그는 내내 "칭찬받을 건 우리 국민이고 김제동, 이승환 같은 사람들이지"라며 한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촛불 좀 들었다고) "주목받을 필요도, 그래서도 안 된다"는 이유다. "유명인들도 뜻을 함께하고 있다는 데에 힘을 얻는 분들도 있다"고 말하자 "필요할 땐 나서서 목소리를 내겠다"면서 필요한 곳에, 필요한 힘을 보태겠다는 뜻을 밝혔다.

"상상치도 못했던 일들이 불과 두 달 사이에 벌어졌잖아요. 아직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지만, (촛불의 힘으로 탄핵 가결까지 끌어낸 것은) 시대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국민이 상실감을 이겨낼 자신감을 얻은 것 같아요."

젊은 세대에 미안하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주축 세대였던 그에게, 오늘날 촛불 집회의 중심인 젊은이들에게 한마디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제가 알던 시대의 생각으로 지금을 봐서는 안 될 것 같다"며 조심스러워했다. 말을 고르던 그는 '미안함'을 이야기했다.

"집회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우리 때와는) 굉장히 달라졌어요. 젊은 세대들이 우리 세대에 남은 문제들을 짐 지고 해결해 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남겨준 데 대해, 저를 포함한 우리 세대 사람들은 그저 미안할 따름이죠."

 영화 <판도라>에서 핵발전소 현장 소장 평섭역을 맡은 정진영.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주축 세대였던 그에게, 오늘날 촛불 집회의 중심인 젊은이들에게 건네는 한마디는 부탁하자 "미안하다"고 말했다. ⓒ 권우성



정진영 판도라 광화문 촛불집회 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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