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사회가 여성 혐오 담론으로 끓어오르기 시작하던 시절, 한 시사 프로에서 이 현상을 다룬 적이 있다. 이들은 한 남성 칼럼니스트를 찾아가 관련된 인터뷰를 했는데, 그는 부동산 문제나 계급 문제가 여성 혐오의 원인이라는 말을 남겼다. 나는 이 같은 발언이 신자유주의 이후 상처 받은 남성성이 여성 혐오의 원인이라는 말과 맥을 같이한다고 생각했다.(경제력이 남성성과 등치되지 않는다면, 계급 불안의 화살이 여성을 향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질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왜 남성들은 자신의 불안을 여성을 혐오함으로서 해결하려고 하는가. 혐오를 통해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발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사 너서바움의 책 <혐오와 수치심>에는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 장교들의 이야기다. 이들은 패전이 안겨준 절망과 수치심을 딛고, 다시 전지전능하며 강철과 같은 남성성을 얻고자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그들은 주변의 여성들을 적극적으로 펌훼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추구하는 남성성과 대비되며, 거기에 비추었을 때 부정적인 속성들을 여성들에게 몰아 넣은 것이다. 거기에 이들은 그 여성성을 지양하는 것이 곧 완벽한 남성성을 성취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 대비의 간극이 크면 클수록, 말하자면 분리와 혐오가 강력할 수록, 이들이 자신이 소망하는 남성성을 회복했다는 환상은 강력해졌다.

 MBC 드라마 <역도 요정 김복주>에 출연중인 배우 이주영.

MBC 드라마 <역도 요정 김복주>에 출연중인 배우 이주영. ⓒ MBC


혐오는 단지 싫어하는 감정?

내가 혐오에 대한 긴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 이유는, 많은 경우 사람들이 혐오를 단순히 '싫어하거나 증오하는 강렬한 감정' 정도로만 여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펴본 바와 같이 혐오는 누군가 스스로의 주체성을 보호하거나 혹은 그것에 드리워진 불안을 해소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작업은 자신의 주체성을 위협하는 요소를 타자화된 대상에게 부착시키고, 그들과의 경계를 강화시킴으로서 성취된다. 그것이 '그들'의 속성이 될 때, '나'의 속성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 혐오가 남성이 자신 또한 성적 개체화 당할 수 있다는 불안을, 오직 여성만이 성적 객체화·타자화가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며 해소한다는 식의 분석을 한 바가 있다.

일례로 게이들에 대한 이성애자 남성들의 선입견을 살펴보자. 흔히 이들은 게이들이 매우 '여성적'이어서 자신들과 같은 남성성을 가지지 '못했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동성애와 이성애가 대칭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이성애자 남성은 이상적인 남성성을 성취한 존재로 간주된다. 실상 우리가 수행하는 남성성이 극히 다양해 일반화가 불가능함에도, 이런 식의 구도에선 한 남성이 이성애자이기만 한다면 그가 가진 남성성은 '기본'이자 '표준'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동성애자 남성은 예외적이거나 일탈적인 존재가 된다. 때문에 누군가 '나는 게이들이 싫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도, 그가 한 일이 혐오임은 달라지지 않는다.

 배우 이주영의 트위터 캡처

배우 이주영의 트위터 캡처 ⓒ 이주영


'여배우'는 여성 혐오적 단어인가?

사실 내가 이 글을 쓰게된 이유는 배우 이주영의 발언 때문이었다. 얼마전 그녀는 자신의 SNS를 통해 '여배우'라는 표현은 여성혐오적 단어가 맞다는 글을 남겼다. 이에 대해 '여성인 배우를 여배우라고 부르는 것이 어떻게 여성 혐오'냐는 식의 반박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생각에 대한 매우 간결하고 정확한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가 평소에 남자배우에게는 '남배우'라고 부르지 않는데 여자배우를 지칭할 때 '여배우'라고 씁니다. 그것은 인간의 디폴트가 남자라는 시선에서 비롯된 단어이므로 여혐인 겁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혐오가 가져오는 그렇듯, 여성 배우가 디폴트인 (남)배우의 부수적인 존재가 될 때, 그 결과는 매우 유해하다. 가령 지금 쏟아지는 영화들을 살펴보라. '알탕'이라는 조롱처럼, 한국에서 남자 배우가 극을 이끄는 영화는 질리도록 차고 넘친다. 하지만 그에 반해 여성 배우들은 그런 영화에서 대부분 부수적이거나 여성성이 기능적으로 사용되는 소모적인 역할을 맡는 것에 그친다. 2016년 무수하게 쏟아져 나온 영화들 중에서 벡델 테스트(한 영화가 여성을 제대로 다루는지 알아보는 테스트로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두 명 이상 등장하는지, 그 캐릭터들이 다른 남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지를 질문한다)를 통과한 작품은 손에 꼽을 정도다.

또한 배우가 자신의 직업이 아니라 '성별'로 인식될 때, 그 사람에게 사회가 관습적으로 기대하는 '여성의 역할과 일'이 요구되기도 한다. 가령 영화 <도리화가>에 출연한 류승룡은 주연인 수지를 놓고 '여배우의 덕목인 애교를 가졌다'고 말해 빈축을 사기도 했다. 심지어 주인공을 맡은 배우에게도 이러한데, 비중이 더 낮거나 힘이 없는 스태프들에게는 어떻겠는가. 실제로 영화계 내 성폭력을 다룬 씨네21의 특집 대담에 등장한 영화인들은, 여성 스태프들에 대한 남성 제작진들의 성적 대상화는 늘상 벌어지는 일이라고 증언한다. 그리고 이 같은 대상화는 성추행과 성폭력으로도 곧잘 이어지곤 한다. 당장 대담에 등장하는 사례들만 봐도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다.

배우 이주영의 용기와 소신을 지지하며

하지만 반면에 남자 배우들이 비슷한 고충을 토로하는 모습을 잘 보이지 않는다. 왜? 그들은 '남배우'가 아니라 그냥 '배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배우인 자신의 일, '연기'만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기본, 표준, 정상, 디폴트가 가진 권력이다. 여기에 이들이 비정상, 일탈, 예외들을 향해 휘두를 수 있는 힘과 폭력은 덤이다.

마지막으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왜 남성의 계급 불안은 여성 혐오로 이어졌는가. 이들에게 경제력은 남성성의 속성이었으며 동시에 여성은 가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 여성이 자신이 돈을 벌어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사먹든 비싼 가방을 들든, 이들은 남의 돈으로 사치를 부리는 '된장녀'나 '김치녀'로 치부되었다. 그리고 비슷한 현상은 이주영 배우를 둘러 싸고도 벌어지고 있다. '여배우'라는 단어의 문제점을 지적한 남자 영화인들은 많았지만 SNS를 닫을 정도로 폭언을 접한 사람은 그녀뿐이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자기 주장을 할 수 있는 성별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단지 이번 사태 뿐일까? 엠마 왓슨의 경우 '남자들도 여성 해방을 위해 일어나달라'는 지극히 온건한 주장만으로도 홍역을 치렀다.

'여배우'라는 단어에는 여성 혐오가 포함되어 있으며, 한국 사회의 여성 혐오는 작금의 상황에서 보듯 만연하다. 나는 이주영 배우의 발언에 적극 동의한다. 더불어 용기있게 자신의 소신을 밝힌 그녀를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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