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수 1200만. 한 영화에 든 관객이 아니다. 11월 한 달 동안 한국 극장을 찾은 관객 수다. 한국사회 전반을 뒤흔든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파문의 여파가 극장가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일까. 역대급으로 볼 영화가 없었다는 올 4월 이후 가장 적은 관객 수다. 같은 달끼리만 따져봐도 최근 5년간 독보적으로 낮은 수치로 지난해보다 무려 300만이 넘게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볼 영화가 없었던 건 아니다. 놀랍게도 11월 한 달 동안 무려 169편의 영화가 한국 극장에 개봉했는데 이는 올 한 해 가장 많은 개봉작 수다. 물론 보통의 관객에게 이는 수치일 뿐이다. 대다수의 경우 개봉 소식을 듣기도 어려울뿐더러 극장을 찾아도 만날 수 있는 영화는 손에 꼽는 게 현실이니까.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받고 한국을 찾은 <램스>를 보기 위해 나는 야근이 없는 날 한 시간 가까이 달려 관객 없는 작은 극장을 찾아 영화를 봤고 또 그만큼의 시간을 들여 집으로 향해야 했다. 그 극장과 회사, 집 사이엔 적게 잡아도 10곳이 넘는 멀티플렉스가 있지만, 그 가운데 어느 곳에서도 이 영화를 틀어주지 않았다.

그런 영화가 어디 <램스> 한 편뿐이었을까?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다양성은 면역성이며, 면역성은 생명성이다'라고 적었다. 우리는 스스로 얼마나 많은 가능성들을 외면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11월 극장가에서 1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모두 4편이다. 2편은 지난달 개봉한 <닥터 스트레인지>와 <럭키>이고, 11월 개봉작 가운데서는 <신비한 동물 사전>과 <형>이 100만을 넘겼다. 이들 중 세월의 가혹한 심판을 견뎌낼 영화가 과연 있었을까. 나는 답할 수 없다.

어느덧 한 해를 끝맺는 매듭달이다. 겨울방학 시작과 함께 할리우드와 충무로 대작이 줄줄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어 흥행 면에서도 열띤 경쟁이 예상된다. 국정농단 파문을 수사하는 특별검사가 만만찮은 라이벌이 되겠으나 감독과 배우, 수많은 스태프들의 땀방울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좋은 영화들이 납득할 만한 결실을 거두고 막을 내릴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그럼 매듭달 기대작 열편을 소개한다.

[하나] <판도라>

판도라 포스터

▲ 판도라 포스터 ⓒ NEW


기대작 10편 가운데 1번 타자로 배치한 영화는 <판도라>다. 7일 개봉하는 이 영화는 유독 사회 비판적 영화가 많았던 올 한 해 가운데서도 정점을 찍을 작품으로 기대된다. 무능한 국가시스템과 제 이익만 챙기는 책임 있는 자들, 그 사이에서 자신을 구해야 하는 시민들. 오늘 한국사회의 부조리한 자화상을 전면에 드러낼 작품으로 벌써 입소문이 자자하다.

소재는 원자력발전소로 이제서야 개봉하는 게 이상할 만큼 적절하고 흥미롭다. 안 그런가? 원전의 위험성과 한국 원전의 관리실태는 알면 알수록 어이가 없을 지경이니 말이다.

2012년 <연가시>에 이어 2016년 <판도라>까지 연이어 재난영화를 기획한 박정우 감독은 한국사회가 예고된 재난 공화국임을 확신하고 있는 듯하다. 다만 아쉬운 건 현실의 재난이 영화 속 재난 못지않다는 것.

[둘] <라라랜드>

라라랜드 포스터

▲ 라라랜드 포스터 ⓒ 판씨네마(주)


다미엔 차젤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 가운데 절반쯤은 그의 신작이 나오길 손꼽아 기다렸을 테고. 혹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해 한 마디를 더한다. 다미엔 차젤은 <위플래쉬>의 연출자다. 2013년 18분짜리 단편 <위플래쉬>로 눈 밝은 선댄스 심사위원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 해의 성공에 힘입어 같은 이야기를 다룬 장편 <위플래쉬>로 전 세계 영화팬의 솜털을 곤두세운 바로 그 젊은 감독이다.

<위플래쉬> 이후 2년 만에 완성한 <라라랜드>는 전작 못지 않은 격렬한 감정이 꾹꾹 눌러담긴 영화라 전한다. 폭발하고 소용돌이치는 그 감정들 사이로 다미엔 차젤이 전하고픈 말은 무엇일까. 성공한 감독의 자리에서 그가 선택한 배우는 엠마 스톤과 라이언 고슬링, 그리고 그의 '믿을맨'이 돼가는 J.K. 시몬스다.

확 끌리는 이 영화, 7일이면 볼 수 있다.

[셋] <나, 다니엘 블레이크>

나, 다니엘 블레이크 포스터

▲ 나, 다니엘 블레이크 포스터 ⓒ 영화사 진진


존경하는 켄 로치 감독의 신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8일 개봉한다. 켄 로치는 전 세계에 그를 경배하는 영화팬만 수십만은 될 유명 감독으로 시간과 함께 작품세계가 끝없이 깊어지는 와인 같은 작가다. 그 자체로 한 편의 예술작품인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고 있자면 왜 누군가는 시간과 함께 시들고 또 상해가는데 왜 누군가는 무르익고 깊어지는가에 대한 고민이 자연히 뒤따른다.

노하우의 축적과 관심사의 확장, 기술적 향상 등 양적 변화만으로는 흉내 내지 못할 무엇이 그의 필모그래피엔 담겨 있다. 그 자신의 역사관과 가치관, 철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의 영화 역시 고요하고 깊어진다. 그 고요함은 마치 강철도 녹인다는 어느 화산 아래 물웅덩이와 같이 뜨거운 고요함이며 지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티티카카 호수의 고고함이고 러시아 바이칼 호의 깊은 차가움이기도 하다.

무책임한 환상을 무참히 깨뜨리고 그 위에 오롯한 희망 하나를 피워낸 <랜드 앤 프리덤>부터 더없이 명료하고 통찰력 있게 신자유주의를 이야기한 <자유로운 세계>에 이르기까지, 켄 로치의 필모그래피를 존중하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만큼 근사한 선택도 없을 것이다.

평생을 목수로 열심히 살아온 다니엘 블레이크. 여든 살 청춘, 켄 로치는 심장병을 얻어 더는 평범한 삶을 이어갈 수 없는 다니엘의 이야기를 통해 영국 복지제도의 부조리함을 고발한다.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더 해야 당신이 이 영화를 보게 될까. 나의 이 고민이 글에서 읽혔으면 한다.

올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이로써 켄 로치는 황금종려상을 2번 수상한 9명 가운데 한 명이 됐다. 알프 셰베리,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빌 어거스트, 에밀 쿠스트리챠, 이마무라 쇼헤이, 미하엘 하네케, 장 피에르 다르덴과 뤼크 다르덴이 그들이다.

[넷]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 포스터

▲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 포스터 ⓒ 그린나래미디어(주)


매듭달엔 유명 화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2편이 개봉한다. 나는 그 모두를 주저 없이 기대작 명단에 넣기로 했다. 뛰어난 화가의 이야기를 영화화하겠다고 마음먹은 감독이라면 화가의 작품을 수도 없이 보았을 터. 그림의 빛깔과 형태뿐 아니라 담고 있는 인상과 메시지 모두가 영화에 자연히 녹아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들을 추천한다.

15일 개봉하는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은 폴 세잔과 에밀 졸라의 유명한 이야기를 담았다. 이제는 둘 다 위대한 예술가로 기억되지만 당대엔 성공한 작가와 무명 화가의 엇갈린 삶을 살았던 그들. 그들의 깊은 우정과 그 우정이 가장 흔들렸던 때의 이야기가 영화로 펼쳐진다.

역시 프랑스의 실존 인물을 다룬 <이브 생로랑>에서 피에르 베르제 역을 맡아 남다른 울림을 전한 기욤 갈리엔이 폴 세잔을, 연출과 연기 다방면에서 재주를 보이는 기욤 까네가 에밀 졸라를 맡아 연기한다. 두 기욤의 연기가 영화의 성패를 가를 것으로 보인다.

[다섯]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 포스터

▲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 포스터 ⓒ 씨네룩스


2015년작 <디판>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으며 가능성 있는 작가에서 일류 감독으로 당당히 인정받은 자크 오디아드의 작품이다. 발표하는 영화마다 다수 영화제에 초청받는 그의 영화는 각별히 배우들의 연기력이 도드라지는 것으로 명성이 높다. 15일 개봉하는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은 한국에선 비교적 생소한 프랑스 배우들로 출연진이 꾸려졌는데 그 모두가 깊고 진한 연기를 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은 2012년 작 <러스트 앤 본>과 2015년 작 <디판>의 성취 덕에 제작된 지 무려 11년 만에 한국 개봉기회를 잡았다. 11년 지난 영화를 들여와 소개하는 건 배급사로선 그리 쉽지 않은 결정이다. 씨네룩스의 선택이 목표한 성과로 이어지길 바란다.

[여섯] <씽>

씽 포스터

▲ 씽 포스터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21일 개봉하는 <씽>은 뮤지컬과 애니메이션을 접목한 독특한 영화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동물이 대국민 오디션을 치른다는 설정 아래 각 캐릭터의 사연을 가슴 따뜻하게 녹여낸 겨울용 가족영화다. 여기까지 들으면 다소 뻔한 이야기처럼 여겨질 법도 한데, 연출을 맡은 가스 제닝스는 그저 그런 평범한 감독이 아니다.

상당한 마니아층을 보유한 SF영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영화화해 성공적으로 상업영화판에 뛰어들었고, 2년 뒤 낭만이 살아 있는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으로 범상치 않은 재주를 선보인 바로 그 감독이다. 일기장에만 적기 아까워 덧붙이자면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은 첫사랑과 본 첫 영화이기도. 누군가에겐 <씽>이 그런 영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쁘지 않은 선택일 거다.

매튜 매커너히, 리즈 위더스푼, 스칼렛 요한슨, 테런 에저튼, 세스 맥팔레인, 존 C. 라일리 목소리 출연.

[일곱] <업 포 러브>

업 포 러브 포스터

▲ 업 포 러브 포스터 ⓒ (주)엣나인필름


한국에도 팬이 많은 <꼬마 니콜라>의 감독 로랑 티라르의 신작 <업 포 러브>가 21일 개봉한다. 175cm 여자와 140cm 남자의 연애담을 다룬 로맨틱 코미디. 로맨틱 코미디의 생명인 연기는 검증된 거나 다름없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 장 뒤자르댕에 프랑스의 로맨스퀸 버지니아 에피라가 만났으니. 이 겨울 따뜻하고 유쾌한 사랑 이야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업 포 러브>를 추천한다.

[여덟]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 포스터

▲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 포스터 ⓒ 티캐스트


프랑스가 세잔과 졸라를 스크린 위에 되살렸다면 오스트리아는 에곤 쉴레를 불러왔다. 클림트 이후 최고의 재능으로 불리며 당대 미술계를 놀래킨 에곤 쉴레의 일대기가 오스트리아 출신 감독 디터 베르너의 손에서 태어난 것. 22일 개봉하는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은 쉴레의 불꽃 같은 삶을 그의 마음을 거쳐 간 여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풀어냈다. 에곤 쉴레의 욕망은 과연 어떤 모양일까? 궁금한 관객이라면 극장을 찾자.

[아홉]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 포스터

▲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 포스터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스타워즈> 시리즈의 스핀오프. <스타워즈 에피소드 4 - 새로운 희망> 직전의 이야기로 악당들의 최종병기 '데스 스타(Death Star)' 설계도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되겠다. 2014년 작 <고질라>를 연출하는 등 대규모 블록버스터 연출로 경력을 쌓고 있는 가렛 에드워즈가 감독을 맡았다. 그에겐 일류로 나아가기 위해 넘어야 할 중요한 관문이기도 하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펠리시티 존스가 <인페르노>에 이어 다시금 대규모 블록버스터에 출연, 중책을 맡았다.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8> 개봉을 앞두고 시리즈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을까? 마블 스튜디오를 인수, 작품을 줄줄이 성공시키며 21세기 최고의 영화사가 되겠다는 꿈을 현실화시켜가고 있는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의 야심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28일 개봉.

[열] <최후의 Z>

최후의 Z 포스터

▲ 최후의 Z 포스터 ⓒ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이 영화를 기대작으로 뽑은 건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마고 로비.

<어바웃 타임>에서 '유혹'을 담당한 그녀는 끝내 팀(도널 글리슨 분)을 유혹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고백건대 나는 그녀의 첫 등장부터 완전히 유혹당하고 말았다. 이후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에 출연한 그녀는 그 늘씬하고 우아한 몸매를 시종일관 과시하며 뭇 남성들의 뇌리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빅쇼트>에선 겨우 1분 남짓한 욕조신으로 그해 최고의 장면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마이클 버리(크리스찬 베일 분)의 첫 등장신과 쌍벽을 이뤘는데 마고 로비가 아니었다면 그 같이 매력적인 분위기를 빚어내지는 못했을 게 분명하다.

할리우드 제작자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 이후 그녀의 몸값은 폭등에 폭등을 거듭해 최근 할리우드에서 마고 로비보다 바쁜 여배우를 찾기 어려울 지경이다. 특히 마고 로비는 침몰하는 배에서도 홀로 빛을 내며 살아남는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이어가고 있는데 악명 높은 두 작품 <레전드 오브 타잔>과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대표적이라 하겠다.

미국에선 <수어사이드 스쿼드> 시사회 이후 반응을 고려, 할리퀸 등장씬을 대폭 추가하기도 했다는데 영화의 완성도를 고려할 때 여러모로 현명한 선택이었음이 입증됐다.

더 쓴다고 해서 영화에 딱히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으니 이쯤에서 마감한다. 마고 로비 주연 <최후의 Z>는 28일 개봉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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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엄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간직하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 팟캐스트 '김성호의 블랙리스트' 진행 / 인스타 @blly_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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