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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꼴이 엉망이다. 이 나라는 개선이 아니라 밑동부터 다시 쌓아야 할지 모른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세대가 앞장서야 한다.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과 <오마이뉴스>는 헬조선의 현실에서도 꿈을 찾아 도전하는 청년을 응원하고 지원하는 펀딩을 시작한다. [편집자말]
11월 4일 금요일. 해가 지면서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왔다. 신참내기 노점상은 서툰 솜씨로 어묵을 끼웠다. 장사가 잘된다는 금요일이라 약간 무리해 주문한 300개의 어묵은 주위 노점상들의 도움으로 얼추 모양새를 갖췄다. 육수를 내기 위해 가마솥을 끓이고 "오늘 이거 다 팔기 전에는 집에 안 간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퇴근시간이 다가오자 손님도 하나 둘씩 어묵마차 앞을 채웠다. 그때였다.

"그만 들어가요. 뭐하는 거예요!"

단속이었다.

"알았어요. 손님이 있으니까 좀 기다리세요."
"가스 잠가!"
"싫어! 손님이 있으니까 좀 기다리라고!"

대화는 어느 새 반말이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단 세 마디.

"불 꺼! 가스 잠가! 엎어!"

지하철 역 앞에서 어묵 노점을 하고 있는 김주노(30세. 여. 가명)씨는 어묵 장사를 시작한 첫 주말에 단속을 맞았다. 부서진 김주노씨의 어묵마차
▲ 신참내기 노점상의 호된 신고식 지하철 역 앞에서 어묵 노점을 하고 있는 김주노(30세. 여. 가명)씨는 어묵 장사를 시작한 첫 주말에 단속을 맞았다. 부서진 김주노씨의 어묵마차
ⓒ 김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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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신호를 기다리던 경주마처럼, 어디선가 나타난 건장한 사내들에 의해 펄펄 끓던 가마솥이 길바닥에 내쳐졌다. 그는 필사적으로 돈통부터 챙겼다. 사내들은 아무런 설명조차 없이 일사분란하게 어묵마차를 뒤엎었다. 그러고는 볼 일 다 봤다는 듯 봉고차에 올라탔다.

신참내기 노점삼은 봉고차 앞을 막았다. "이거 치우고가!" 가마솥이 깨지고, 남은 돈을 탈탈 털어 박스째 구매한 어묵과 보리새우가 다 쓰레기가 됐지만, 그는 엉뚱하게 '치우고가'라는 말만 나왔다. 지하철 앞에서 어묵장사를 시작한 지 이제 4일이 된, 노점상 김주노씨(여·가명·30)의 호된 신고식이었다.

"늦깎이 운동권... 날 바꾼 건 용산참사"

농부의 딸로 태어난 김주노씨는 서울 유명 사립대 건설도시공학부에 입학했다. 살던 동네에서는 꽤 출세한 셈이었다. 2학년 때 '돈도 많이 벌고, 여자들은 희소성이 있어서 취업도 잘된다'는 말에 토목공학으로 전공을 택했다.

막상 선택한 전공은 생각과는 달랐다. 과 교수들은 이명박 정부의 한반도 대운하를 설계했고, 지율스님의 천정산 터널 반대 단식을 '하루 단식하면 손해가 얼마'라는 식으로 계산했다. 사람보다는 돈으로 모든 것을 따졌다.

막연한 의문은 3학년이 되고서 새로운 인생행로로 연결됐다. 운동권하고는 거리가 멀었지만 친한 언니들이 '선거에 나갈 사람이 없다'는 말에 덥석 출마해 총여학생회장이 됐다. 이명박 대통령의 BBK진상규명 집회를 시작으로 이런 저런 시위에 참여했지만 여전히 '좋아하는 언니들과 술 마시고 놀러 다니는 게 좋았던', 청춘이었다. 그러다 2009년, 칼바람이 몰아치는 겨울날, 용산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던 때, 인생이 바뀐다.

"전에는 그냥 사람이 좋아서 총여학생회를 했었는데 용산사건이 터진 거예요. 내 전공이 토목공학인데 이게 사실 개발로 먹고 사는 거잖아요? 용산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을 보니까 '내가 돈을 벌려면 누군가가 죽을 수도, 집에서 쫓겨 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가 이런 일을 해야 하나...? 난 못하겠더라고요."

농부의 딸로 태어난 김주노씨는 소위 '늦바람이 난' 운동권이었다. 토목공학을 전공하는 그는 용산개발 참사를 목격하며 전공을 버린다. 대신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바꾸는 꿈을 쌓았다.
▲ 늦깎이 운동권 농부의 딸로 태어난 김주노씨는 소위 '늦바람이 난' 운동권이었다. 토목공학을 전공하는 그는 용산개발 참사를 목격하며 전공을 버린다. 대신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바꾸는 꿈을 쌓았다.
ⓒ 김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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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돈을 벌려면 누군가가 죽거나, 쫓겨나야 하는 사회'에 대한 의심은 의식으로 발전했다. 총여학생회장 임기가 끝나자 총학생회에서 '연대사업국장'을 맡았다. 노동자와 농민, 빈민을 만나는 일이다. 그는 이 과정에서 수많은 '아버지들'을 만났다. 

"또 다른 세계가 보였어요. 그동안 아빠가 부끄럽지는 않았지만 농부라는 직업에 불만은 있었는데 농촌활동하면서 우리 아빠가 어떻게 살아오셨고, 어떤 사람인가를 이해하게 됐어요.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대한민국과는 너무 다른 모습도 많이 봤고... 나라가 이런데 나 혼자 돈을 번다고 행복해 질까? 이런 의문이 계속 드는 거예요. 돈 벌어서 어려운 사람들 후원하고 지원하는 사람보다 그들과 함께 있고 함께 싸우는 사람이 되자. 결국 이렇게 결심했어요."

늦바람은 무서웠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격렬하게 학생운동을 했던 많은 이들이 졸업과 함께 운동판을 떠났다. 마이크를 잡으면 자꾸 웃음이 나와서 앞에 나서기 부끄럽다는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치 거대한 기계를 움직이는 작은 톱니바퀴처럼 묵묵하게 길을 갔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행복했다. 그런데...

"졸업하고 3년이 지나니까 전화가 왔어요. 대출 상환하라고. 제가 농어촌 학자금 대출을 받았는데 3년이 지났으니 무조건 상환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매달 30만 원씩. '돈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죠?' 물으니까 '계속 연체하시면 신용불량자 됩니다'고 하더라고요. 어이가 없어서 '그게 다입니까?' 물으니까 '그게 다입니다' 하더라고요."

"빚 갚으려 돈 버는 미안함... 결국 떠나지 못한 자리"

발등의 불이었다. 대학생활과 활동을 위해 여기 저기 빌린 돈은 모두 2천2백만 원. 학원강사와 화상과외,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등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지만 한계가 왔다. 결국 사촌언니가 하던 쥬스바에 매니저로 일하면서 활동을 접었다. 몸은 편해졌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갚아야 할 돈은 줄어갔지만 마음의 빚은 늘었다.

"처음에는 '내가 돈 벌면서 시간 나면 촛불시위 나가고... 이렇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싶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자꾸 마음에 갈등이 생기고 미안함이 생기더라고요. 내가 돈 버느라 못한 일을 다른 사람들이 대신하고 있다는 미안함. 이런 생각이 드니까 사람들 만나는 것도 피하게 되고... 결국 이렇게는 못 살겠다 싶어서 1년 만에 그만 뒀어요."

불편했던 마음은 편해졌다. 다시 사람들을 만나고 조직하고 거리에서 싸웠다. 그러나 빚독촉은 휴가가 없었다. 계속 '운동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노점을 하면서 노점인의 권익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의 활동가로 일하는 것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노점 리어카를 끌었다. 스마트폰 케이스 판매였다. 

"처음에는 리어카가 너무 무거운 거예요. 보관해둔 곳에서 지하철 앞까지 이동하는데 몇 번을 주저앉아서 쉬어야 했어요. 주위 노점하시는 분들이 일을 가르쳐줘도 뭐가 뭔지... '할 수 있죠?' 하시길래 자신 있게 '네!' 했는데 돌아서면 뭐가 뭔지 모르겠고...(웃음) 적응하는 데만 일주일이 걸렸어요."

처음 해본 노점일은 익숙지도 않았고 수입도 형편없었다. 물건 대금을 주고 나면 일주일에 들어오는 돈은 평균 12만 원, 한달이면 50만 원도 안 됐다. 약간의 단체 활동비를 합치면 겨우 생활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지출은 어쩔 수 없었다.

"한번은 몸이 너무 아파서 응급실에 실려 갔는데 해열제 두 통 맞고 나니까 20만 원 넘게 내라데요? 물건 값 줘야할 돈만 있었는데... 그냥 줘버리고 나니까 너무 허탈하더라고요. 어떻게든 아끼면서 살면 살겠는데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밥도 먹어야 하는데..."

"계속 이렇게 살 거냐고요? 지금은요!"

장사 준비에 부족한 잠에 겨우 새벽녘에야 한 끼 먹는 식사는 그래서 종종 폭식으로 이어진다. 이런 삶 속에서도 노점상을 조직하고 단속에 맞선다. 사회현안에도 적극적이다. 백남기 농민 사망사건을 비롯해 촛불시위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만 있을까?

"하루는 노점을 하고 있는데 고향 친구가 저 앞에 서 있는 거예요. 저도 모르게 뒤로 확 돌아섰어요. 부끄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고향 친구를 보니까... 그래도 우리 고향에서는 제가 서울에 이름 있는 4년제 대학 나와서 '성공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그때 그 친구가 절 봤었는지 나중에 다시 찾아왔더라고요. '우리 아빠한테는 말하지 마라...' 신신당부하고 헤어졌죠. 헤헤."

사람들은 노점이 불법과 탈세의 온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노점상은 생존을 위한 마지막 탈출구다. 노점상에 대한, 자신에 대한 편견과 싸우는 것이 김주노씨의 과제다.
▲ 노점상에 대한 편견과 싸우는 김주노씨 사람들은 노점이 불법과 탈세의 온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노점상은 생존을 위한 마지막 탈출구다. 노점상에 대한, 자신에 대한 편견과 싸우는 것이 김주노씨의 과제다.
ⓒ 김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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떳떳하다 생각했지만 아직 자신도 인정하지 못했던 편견은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살아가면서, 도대체 하고 싶은 일이 뭘까?

"글쎄요... 지금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갈 뿐이에요. 제가 원래 멀리 보고 살지는 않아요.(웃음) 다만, 우리 아빠 같이 열심히 사시는 분들이 더 이상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돈이 없어서 좌절하지 않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노동자들이 해고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런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요. 계속 할 거냐고요? 지금은요! 내일 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웃음)"

'한때' 운동권이었던 이들은 존경과 찬사를 한몸에 받으며 국회의원도 하고 장관도 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운동'의 자리를 이어가고 있는 이들은 때로는 냉소와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래도 활동가로서의 삶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를 그는 '미안함' 때문이라는 김주노씨. 정말 냉소받고 조롱받아야 할 이들은 누구일까?

김주노씨는 단속으로 문 한짝이 부서진 어묵마차를 정리하러 다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다시 치열한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

도전하는 청년에 대한 후원은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하실 수 있습니다.
☞ 다음 스토리 펀딩 후원 바로 가기 =>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14940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 스토리펀딩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노점상, #청년, #용산참사,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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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발견하는 생활속 진보를 꿈꾸는 소시민입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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