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명의 야구계 전설이 그라운드와 작별을 고했다. LG 트윈스의 이병규가 25일 은퇴를 선언했다.

이병규는 올해가 FA 3년 계약의 마지막 해 였다. 이미 지난 시즌 중반부터 사실상 전력에서 제외되며 은퇴 수순을 밟았다. 양상문 LG 감독은 리빌딩을 이유로 젊은 선수들을 과감하게 중용했고 이병규는 올 시즌 1군 경기에 단 한 차례 출장시키는 데 그쳤다.

LG가 올해 가을야구에 진출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남긴 탓에 이병규의 입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향후 거취를 고민하던 이병규는 타 구단 이적으로 현역 연장 지속 가능성도 거론되었지만 구단과 상의 후 장고 끝에 결국 자신의 야구인생 대부분을 바친 LG에서 명예로운 은퇴를 선택했다.

아쉽지만 명예로운 은퇴를 택한 이병규

 LG 트윈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적토마' 이병규(9번)가 은퇴한다. (LG트윈스 제공)

LG 트윈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적토마' 이병규(9번)가 은퇴한다. (LG트윈스 제공)ⓒ 연합뉴스


이병규는 장충고-단국대를 졸업하고 1997년 LG에서 프로무대에 데뷔하여 20년을 활약했다. 2007년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하여 활약한 3시즌을 제외하고 KBO에서 활약한 17시즌 동안 오직 LG의 핀스트라이프 유니폼만을 입고서 그라운드를 누빈 프랜차이즈스타였다.

이병규는 KBO 역대 강타자들 중에서도 타격 재능은 손에 꼽힐 만한 선수로 평가받는다. 데뷔 첫 해부터 타율 0.305, 23도루 7홈런 69타점으로 신인왕을 거머쥐며 화려하게 등장했고, 골든글러브 7회, 최다안타왕 4회, 타격왕 2회, 득점왕 1회 등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는 3년 연속 최다안타 부문 1위를 차지했고, 데뷔 첫 해부터 일본 진출 전인 2006년까지 2003년을 제외하고 매 시즌 세 자릿수 안타를 때려내기도 했다. 특히 1999년에는 잠실구장을 홈구장으로 쓰는 선수 중 최초로 30-30 클럽에 가입했고 이 기록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이밖에도 2014년 5월6일 잠실 한화전에서 당시 역대 최소경기인 1653경기 만에 2000안타를 달성했는데 단일팀에서만 뛰며 2000안타를 달성한 선수는 이병규가 최초였다. KBO에서 17시즌 동안 이병규는 통산 1741경기에 출전해 타율 0.311 161홈런 972타점 147도루 992득점의 성적을 남겼다.

일본 진출 시절에는 국내 무대에서만큼의 활약은 보이지 못했지만 주니치 입단 첫해인 2007년 일본시리즈 우승에 기여하며 좋은 활약을 했다. 이는 이병규의 프로 경력에서 유일한 우승 경험이 됐다. 국가대표팀에도 꾸준히 발탁되며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1998년 방콕-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2연패에 기여했다.

이처럼 개인성적만으로도 이미 역대급 전설의 반열에 오른 이병규지만, 특히 많은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이병규만의 독특한 캐릭터와 플레이스타일이었다. 아마도 이병규는 특유의 장발과 세리머니로 유명했던 '삼손' 이상훈 투수코치 이후로 가장 강렬한 개성을 지닌 LG출신 스타로 기억될 것이다.

개성 강했던 이병규만의 플레이 스타일

이병규는 유독 별명이 많은 선수 중 하나다. 일단 신인 때부터 생긴 '적토마'는 언론에서 자주 쓰이는 이병규의 공식 별명이다. 원래 시작은 말상이었던 외모에서 비롯되었지만 나중에는 천리를 질주하는 명마처럼 거침없는 이병규의 플레이스타일과도 딱 맞아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공격적인 타격 스타일 때문에 볼에도 방망이가 잘나간다고 '배드볼 히터'라는 별명도 있다. 보통 어이없는 공에 헛방망이를 돌리며 '선풍기'라고 조롱당하는 타자들과 차이점은, 이병규는 커리어 내내  배드볼 히터였음에도 통산 3할타율과 2000안타를 넘겼다는 점이다. 지금 시대에도 이병규만큼 볼도 안타로 만들어낼 만큼의 컨택트와 타격센스를 지닌 선수는 찾기 힘들다. 하지만 이를 두고 훗날 일부 야구인들은 "이병규는 4할도 가능한 재능을 지녔지만 3할에 안주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라뱅'은 수비나 주루할 때 마치 동네 가게에 라면 사러가듯 설렁설렁 뛴다고 해 붙은 별명이다. 팬들 사이에서는 적토마보다 친근한 라뱅으로 불리우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라운드에서 자신감이 넘치고 여유롭다못해 건방져 보이기까지 했던 이병규의 모습에 팬들의 호불호가 갈리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실력이 받쳐줬기 때문에 가능한 자신감이었다. 이처럼 누가 뭐라해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한 이병규는 이른바 야구판 '나쁜 남자'의 캐릭터로 팬들을 사로잡았다.

물론 건방진 이미지 때문에 오해를 받거나 손해 본 부분도 있었다. 패기 넘치던 신인 시절 투수들을 겨냥해 "신인이라고 얕보지 말고 전력으로 상대해줬으면 좋겠다"고 한 발언은 지금도 역대급 어록으로 야구팬들에게 회자된다. 1998년 삼성과의 플레이오프에서는 자신의 홈런성 타구를 수비하던 상대 선수가 펜스에 부딪혀 정강이뼈가 골절되는 중상을 입었을 때 이를 비웃는듯한 태도를 보였다는 오해를 받아 엄청난 비난을 듣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병규의 전성기는 하필 LG의 암흑기 시절과도 거의 일치한다. 이병규는 LG 선수로서 1997년과 2002년, 한국시리즈 무대를 두 번이나 밟은 유일한 선수지만 우승에는 실패한다. LG가 2003년부터 2012년까지 10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며 조롱의 대상이 되는 동안 팀의 간판스타인 이병규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LG 선수단의 개인주의 문화와 파벌, '도련님 야구' 등의 루머가 불거질 때도 유독 LG에서 도도한 이미지가 강했던 이병규가 비판의 타깃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실제로 팀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질 때마다 이병규 본인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병규는 주니치 시절 우승을 차지하며 무관의 한은 풀었지만 LG에서는 끝내 우승컵을 들어올리지 못했다. LG는 2013년부터 오랜 징크스를 끊고 가을야구에 복귀했고 최근 4년간 세 번이나 플레이오프 무대까지 진출하며 중흥기를 열었다. 하지만 정작 2013년 이후 이병규의 비중은 해마다 조금씩 줄어들었다. LG의 부활에 기뻐했던 팬들도 간판스타였던 이병규의 입지가 조금씩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는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

이병규는 올 시즌 내내 1군에서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뜨거운 감자였다. 시즌 중반 양상문 감독의 팀 운영을 성토하는 극성팬들의 항의가 이어질 때도 이병규의 1군 배제가 주요한 명분 중 하나였을 정도다. 대다수의 이성적인 팬들의 시각에서 보기에도  리빌딩과 세대교체의 당위성은 이해했지만 이병규에 대한 노골적인 냉대와 사실상의 은퇴 종용에는 아쉬움을 표시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기대되는 이병규의 제2의 야구인생

이병규와 LG의 동행이 올 시즌이 마지막이 될 것임은 이미 예고된 결말이었다. 문제는 어떤 모양새로 마무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LG는 그동안 김재현, 이상훈 등 프랜차이즈스타들과 좋지못한 모양새로 결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병규가 만일 현역 연장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고 해도 LG로서는 이병규에게 기회를 줄 가능성은 낮았다.

이병규는 고심 끝에 다른 팀으로 이적하여 현역생활을 좀더 연장하는 대신 LG맨으로 은퇴하는 길을 택했다. 본인의 명예를 위해서나 LG 구단을 위해서나 가장 원만한 마무리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결과와는 별개로 20년 가까이 헌신한 팀의 레전드를 강제 은퇴로까지 몰아붙인 과정은 못내 옥의 티로 남을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이병규에 앞서 며칠 전에 이미 두산 홍성흔도 은퇴를 선택했다. 공교롭게도 잠실 라이벌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양팀의 전설들이 나란히 같은 시기에 야구인생의 피날레를 맞이하게 됐다. 프로야구의 한 시대가 막을 내림과 동시에, 이들이 현역은 떠났지만 그간의 경험을 살려서 지도자나 해설위원 등으로 한국야구에 기여할 제 2의 야구인생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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