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사람들과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 누군가 '최순실 게이트'를 영화로 만드는 것도 좋겠다고. 아닌게 아니라 지금 어떤 영화나 드라마 보다도 점입가경의 상황들이 뉴스에 보도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곧바로 반대에 부딪혔다. 일단 만들어진 이야기가 너무 현실성이 떨어질 것이고 그래서 매우 '구릴'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사실 그 말도 맞는 것이, 정치 스릴러로 시작된 이야기는 갑자기 한 권력자의 몰락을 그린 장대한 드라마가 되었고, 그러더니 어느 순간 블랙 코미디가 되었다. 만약 장르로서 지금의 상황을 표현해야 한다면, 솔직히 이제는 뭘 갖다 붙여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최순실 가면 쓰고 "박근혜 퇴진" 외쳐 26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전국농민회총연맹, 민족문제연구소, 기독교교회협의회, 진보연대 등 대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박근혜 퇴진 촉구 시민사회 합동기자회견'에서 한 참석자가 '비선실세' 최순실 가면을 쓰고 있다. 참석자들은 ‘비선실세로 알려진 최순실이 실질적으로 대통령 노릇을 해온 증거들이 JTBC보도 등을 통해 알려져 주권자인 국민들이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대국민사과는  90초 동안 읽은 뒤 기자들의 질문도 받지 않았으며, 이마저도 녹화방영이라 진정성을 전혀 믿을 수 없다’고 밝혔다. 이들은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얼토당토 않은 무자격자에게 위임한 것은 대통령으로서 더이상 국정을 운영할 자격을 상실했다’며 즉각 대통령직에서 사퇴할 것을 촉구했다.

▲ 최순실 가면 쓰고 "박근혜 퇴진" 외쳐 26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전국농민회총연맹, 민족문제연구소, 기독교교회협의회, 진보연대 등 대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박근혜 퇴진 촉구 시민사회 합동기자회견'에서 한 참석자가 '비선실세' 최순실 가면을 쓰고 있다. 참석자들은 ‘비선실세로 알려진 최순실이 실질적으로 대통령 노릇을 해온 증거들이 JTBC보도 등을 통해 알려져 주권자인 국민들이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대국민사과는 90초 동안 읽은 뒤 기자들의 질문도 받지 않았으며, 이마저도 녹화방영이라 진정성을 전혀 믿을 수 없다’고 밝혔다. 이들은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얼토당토 않은 무자격자에게 위임한 것은 대통령으로서 더이상 국정을 운영할 자격을 상실했다’며 즉각 대통령직에서 사퇴할 것을 촉구했다. ⓒ 권우성


하지만 나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이야기로 만들면 별로일 것이라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거꾸로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 현실적이다. 영화 속 세계는 작가가 통제하는 인공적인 공간이다. 아무리 놀라운 상황이 발생한다고 해도, 그 일은 그 세계 속에서 최소한의 설득력을 가진다. 반면 우리가 사는 실제 세계는 그런 인위적인 통제가 촘촘하게 개입할 여지는 없다. 때문에 맥락도 없이 발생하는 '진짜 놀라운 일'은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서 등장한다. 얼마 전 트위터에서 한 지인이, 이번 사건을 놓고 '떡밥이 회수되고 이해가 되는 것 같다가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어떻게 이게 다 가능한 것인지'라는 글을 남겼다. 매우 정확하다. 그리고 보통 영화를 이렇게 만들면 '망작'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현실의 '아수라장'

물론 영화를 현실처럼 만들면 문제가 되겠지만, 실제 세계의 아수라장을 영화로 풀어내는 것은 잘만 해낸다면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아마 이 방면에서 가장 탁월한 감독을 찾는다면 누구보다 코헨 형제가 제격일 것이다. 이들은 개인들의 좌충우돌이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져나가는 이야기를 줄곧 해왔으니까. 그 속에서 아이러니와 뒤틀린 유머를 끄집어 내는 것은 덤이다. 많은 영화가 생각나지만, 개인적으로는 <번 애프터 리딩>(2009)을 추천한다. 이 영화가 만들어내는 난장판이 지금의 현실과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 <번 애프터 리딩>

영화 <번 애프터 리딩> 포스터 ⓒ (주)성원아이컴


영화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다. CIA에서 분석가로 일하던 오스본 콕스(존 말코비치 분)는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고, 자신의 삶을 자서전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기록이 담긴 디스크를 피트니스 센터에서 흘리게 되고, 이 물건은 트레이너인 채드(브래드 피트 분)와 린다(프란시스 맥도맨드 분)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이들은 이 디스크에 담긴 것이 엄청난 기밀 정보라는 착각에 빠지고 콕스를 협박하지만 당연히 일은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 한편 바람둥이에 허풍에 가득 찬 해리(조지 클루니 분)는 콕스의 아내와 바람을 피우던 중, 거기에 더해 린다를 꼬시기 시작하며 이 사건에 말려들기 시작한다. 아마 영화를 보다 보면 도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싶을 것이다. 당신의 잘못은 아니다. 이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가 원래 그런 것이다.

너무나 초라한 그 사람들의 실체

이 영화의 흥미로운 점은 바로 캐릭터들이다. <번 애프터 리딩>에는 무언가 거창한 동기나 사명을 가진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너무나 멍청한 주제에 지나치게 의욕적인 인물이 등장하거나, 혹은 자기 주제를 모르고 분에 넘치는 일을 성취하려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또는 스스로를 과대 포장하고 여기에 너무나 심취한 나머지 자기가 정말로 중요한 인물이라고 믿어버리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 캐릭터들의 성격적 특성이 최악의 방식으로 경합하며 영화는 난장판을 향해 달려나간다. 흔한 영화적 기준에서 볼 때, 이런 일을 할 수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살인과 폭력 그리고 말도 안 되는 협박을 저지르고 다니는 것이다.

 영화 <번 애프터 리딩>

헬스 트레이너인 채드와 린다의 손에 들어간 일급기밀(?). ⓒ (주)성원아이컴


 영화 <번 애프터 리딩>

<번 애프터 리딩>에는 무언가 거창한 동기나 사명을 가진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너무나 멍청한 주제에 지나치게 의욕적인 인물이 등장하거나, 혹은 자기 주제를 모르고 분에 넘치는 일을 성취하려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또는 스스로를 과대 포장하고 여기에 너무나 심취한 나머지 자기가 정말로 중요한 인물이라고 믿어버리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 (주)성원아이컴


물론 영화가 이런 전개를 보일 때는 당혹스럽지만(그리고 이 당혹스러움은 이 영화의 매력 중 하나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 대입한다면 그리 어색한 것만도 아니다. 실제 세계의 많은 안 좋은 일들은 진상을 알고나면 터무니 없는 경우가 많고, 이런 일들을 저지른 사람들의 실체는 속된 말로 '허접'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그리고 이것이 내가 대부분의 한국형 조폭 느와르에 별로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다) 단지 그 사건이 보이는 '일탈성'이 그 일을 저지른 사람들을 우리와는 무언가 다른 사람처럼 느끼게 만들고, 그리고 그 간극 때문에 실제의 초라함은 보이지 않게 된다. 마치 영화 속 악인들처럼 그들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영화 속 아이러니가 현실이 될 때

물론 차이는 있다. 내가 말한 그 '안 좋은 일'이란 대부분 일상적 공간에서 벌어지는데, 신문으로 치자면 사건·사고란에나 등장할 일이다. 재밌게도 이 영화에는 그 모든 사건을 보고서로 받게된 CIA가 등장하는데, 지금 한국에서는 그러한 국가기관, 그것도 기관의 최고 꼭대기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생각해보라, 최순실 게이트의 등장 인물들이 어떠한지. 어쩌다 조금 큰 힘을 얻게된 주제에 자기 분에 넘치게 사람과 재물을 휘두르려던 사람,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휘둘릴 정도로 우둔했지만 지나치게 성실했던 나머지 권력의 정점에 선 사람. 여기에 기득권 유지를 위해 이들을 묵인하고 방조한 집단이 등장하고, 이들 덕분에 덕분에 정말로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이 도래하지 않았는가.

<번 애프터 리딩>에서 진상을 담은 보고서를 받아 본 CIA 고위직 캐릭터는 부하 직원에게 묻는다. 이번 사건을 통해서 배운게 뭐냐고. 부하 직원은 (당연하게도) 잘 모르겠다는 답변을 하고, 그는 자기 역시도 잘 모르겠다고 답한다. 그리고 그는 그 보고서를 읽고 그냥 태워 버리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가 보기에, 그 사건은 영화 제목처럼 한 번 읽고 태워버릴 만한 것, 기록으로 남겨둘 가치도 없는 일인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는 그 상황이 아이러니가 되지만 현실에서 그것은 비극이 된다. 한 번 읽고 태워버릴 만한 이야기를 우리는 역사로 기록해야 하기 때문이다. 매우 슬픈 노릇이다.

최순실 게이트 아이러니 비극 번 애프터 리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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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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