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새 세상을 꿈꿨으나 갑신정변에 실패한 혁명가. 순진하게 일본을 너무 믿었던 몽상가. 끝내 암살된 후 사지가 찢긴 비운의 풍운아. 관점에 따라 평가가 엇갈리는 그는 세간의 찬양과 비난을 동시에 받는 인물이다. 혼란스러웠던 그 시대처럼 뭐라고 단정 짓기 어려운 인물이기에,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김옥균이라는 사람 자체가 굉장히 뜨거웠다가 한풀 꺾여서 지고 난 후의 인물이잖아요. 산전수전 다 겪고, 그 풍파와 상처가 너무 많아서 뭐든지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예요."

뮤지컬 <곤, 투모로우>는 바로 이 김옥균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오태석의 희곡 <도라지>를 원작으로 삼은 후, 이지나 연출이 역사적 변용을 가해 느와르로 완성했다. 갑신정변에 실패한 그는 다시 한 번 시대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이내, 그 희망의 불씨를 살리지 못하고 고종이 보낸 암살자 홍종우에게 그 불씨를 전한다.

 뮤지컬 배우 강필석이 13일 오후 서울 압구정동의 한 공연장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배우 강필석이 돌아왔다. 실패한 혁명가 김옥균이 되어 꿈에 대해 노래하는 그에게 자신의 캐릭터에 대해 물었다. ⓒ 이정민


"'나는 이제 더 이상 못할 것 같다, 내가 꼭 아니어도 된다, 어떻게든 한 번 해 보자, 너가 해봐라' 그런 이야기에 조금 더 초점을 맞췄어요. 그래서 김옥균이라는 인물을 너무 미화하지 않고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혁명에 실패한 김옥균으로서, 새로운 청년에게 제가 하고 싶은 무언가를 배턴 터치를 해줘야 하는데, 순교자같이 느껴질 수 있는 게 다분하죠. 나는 목숨을 끊으니 배턴을 이어가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일반적인 사람으로서 판단하기 어려운 것들이잖아요. 어쩔 수 없이 미화가 되는 부분들이 있는데, 너무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강필석, 뮤지컬 <곤, 투모로우> 프레스콜 중에서

실제 역사에서 홍종우는 고종의 충실한 암살자였지만, 이 작품에서는 김옥균의 이상에 매료되어 그의 암살을 주저한다. 극 중 김옥균의 못다 이룬 꿈은 청년 홍종우에게 이어지고, 역사의 수레바퀴는 비극을 향해 굴러간다. 지난 13일 오후 5시, 뮤지컬 <곤, 투모로우>에서 꿈꾸는 사람 김옥균으로 분한 배우 강필석을 서울 광림아트센터 1층 카페에서 만났다.

연기하는 강필석, 혁명가 김옥균을 만나다

 뮤지컬 배우 강필석이 13일 오후 서울 압구정동의 한 공연장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배우로서 또 하나의 터닝 포인트에 다다른 그. 그는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어떤 선배가 될까. ⓒ 이정민


1978년생 배우 강필석을 다시 만났다(관련 기사 : 부산 찍고 인천까지 날아온 그, 알고 보니 수비 요정?). 우리나이로 서른아홉, 곧 불혹의 나이에 접어드는 그는 그의 나이와 비슷한 시기에 가장 격렬하게 살았던 혁명가를 연기한다. 1851년생 김옥균은 갑신정변을 일으키던 해(1884년) 34살이었고, 암살당하던 1894년에는 44살이었으니 딱 그 가운데 있는 셈. 30대 후반임에도 '요정'이라는 별명의 소유자인 그가 김옥균을 연기하는 건 어떤 느낌일까.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하면서 재밌어요. 계속 웃어요. 옛날에는 '왜! 왜! 아니라고! 그런 거 아니라고! 뭐하는 짓이야! 하지 마!'이랬는데…. (웃음) 지금은 같이 웃으면서 '재밌으시죠?'해요. 나쁜 뜻은 아니잖아요? 관심 있으시니까 그렇게 불러주시는 거고, 저로 인해 재미있으시다면야. (웃음) 물론 나이가 더 든 후에는 '저 사람이 무슨 요정이야'하는 말을 듣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은 사실 끊임없이 들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전에도 그랬죠. 젊어서 배우를 시작하고 나이를 먹어갈 때는 재능 있는 후배들을 보며 감탄했어요. '나는 저때 저렇게까지 못 했는데'하면서. 그런데 30대 초·중반 즈음부터는 다른 생각을 하더라고요. '무대에 오래 남아 있는 배우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존중받고 존경받을 가치가 있구나'라고. 그게 굉장히 힘든 거더라고요. 그런 배우가 되려고요. 물론 그걸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좋은 것도 있고 안 좋은 것도 있겠지만, 저에게 숙제로 남아있는 거예요. 어떻게 잘 현명하게 대처를 하느냐는 저의 몫이겠죠."

아마도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튀는 역할은, 이지나 연출의 연극 <지구를 지켜라>의 강만식이었을 것이다. 키치한 감성 속에 현실 비판을 녹였던 <지구를 지켜라>에서, 강필석은 (정체를 숨긴) 부패한 권력자 강만식을 연기했다. 하지만 <곤, 투모로우>의 김옥균도 평소 강필석의 이미지와는 다소 톤이 다르다. 뜨겁게 불타올랐던 혁명가는, 다 타고 남은 재속에서 다시 한 번 타오르려 한다. 이전까지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나 <프라이드>에서 보여줬던 강필석의 아우라는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이미지가 강했지만, 이번엔 조금 더 원색에 가깝다.

"저는 되게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다르다고 보시는 분들이 주변에 많더라고요. 사실 저는 결이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별로 안 했어요. 오히려 잘 맞는 것 같은데…. (웃음) 연출께서도 저의 새로운 매력을 찾았다고 하셨어요. 연출이 항상 주문하는 '맛있는 포즈(Pause)'를 잘 살리려는 데 중점을 뒀고요. (웃음)

원래 제가 가지고 있는 호흡이 좀 느리고 무거운 편이에요. 저 스스로 그렇게 말과 말 사이를 두는 걸 좋아하고요. 사실 김옥균도 말과 말 사이의 '공백'으로 말하는 게 많거든요. 실제 입으로 꺼내는 말과 전혀 다른 말을 마음속으로 나누고 있어요.  <닥터 지바고>의 파샤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지저스 같은 느낌도 있었죠. 심지어 강만식 같은 부분도 있고. (웃음) 그런 게 섞여 있었기 때문에,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큰 어려움 없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19세기 조선, 비극의 시대

 뮤지컬 배우 강필석이 13일 오후 서울 압구정동의 한 공연장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뮤지컬 배우 강필석이 13일 오후 서울 압구정동의 한 공연장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세기 조선이 처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극은 반복됐다. 어찌 보면 이들 모두가 시대의 피해자이자 희생자는 아니었을까. ⓒ 이정민


19세기 말, 제국주의가 도래하고 세계는 먹느냐 먹히느냐로 갈라졌다. 조선은 뒤처졌고, 열강의 먹잇감이 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조선이 넘어가기 전, 그 시대의 한가운데 급진개화의 꿈을 꾸는 이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김옥균은 참 외로운 인물이다. 고종이 김옥균에게 버림받았다는 슬픔과 원망에 휘둘린 것처럼, 김옥균 역시 고종을 원망하지는 않았을까. 마음을 준다고 했으면서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왕. 충성을 바쳤지만, 돌아온 건 암살 의뢰였던 왕이었기에. 실제 김옥균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그가 연기하는 극 중 옥균의 의중은 뭐였을까.

"전혀요. 원망스럽지 않아요. 연기하면서 고종을 원망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거기에 남아있던 사람들을 불구덩이에 던져놓고 도망 나온 것이나 다름 없잖아요. 그 불타는 집에 고종을 던져두고 나왔으니 얼마나 미안했겠어요. 그러니 저 사람을 위해서 무언가라도 더 하고 싶은 마음이었겠죠. 그래서 그 이홍장이라는 실날 같은 희망을 부여잡는 거죠. 배에 타기 직전까지도.

고종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고, 김옥균도 마찬가지고…. 사실 김옥균은 당대의 슈퍼스타였다고 생각해요. 주변에서 다들 속삭이지 않았을까요. 그라면 바꿀 수 있을 것 같다고. 그에게 기대를 걸어보자고.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건 한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당시 그분들 모두의 생각이니까…. 위험한 걸 알면서도 계속 계란을 던지는 거죠. 그게 실패한 건 고종만의 탓은 아니에요. 어떻게 보면, (홍)종우도 아주 큰 뜻을 처음부터 품은 게 아니라 시대에 휩쓸린 거죠."

고종을 삼킨 것도, 김옥균과 홍종우를 무너뜨린 것도 시대였다. <곤, 투모로우>는 그 비극적 시대를 보다 비극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김옥균에서 홍종우에게로 혁명의 불꽃이 이어지는 것 같지만, 그 불꽃 역시 '이완' 캐릭터로 상징되는 거악에 맞서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의 흐름처럼, 조선의 빛은 점차 사그라들어만 간다.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끝났던 시대, 그걸 그린 작품. 연기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죽어서까지 자신의 의지가 전달되기를 바랐던 김옥균으로서 아쉽지 않을까.

"저는 그 시대를 살아본 사람이 아니죠. 연습할 때도 그냥 '그때 그랬겠지'하는 정도의 추상적인 생각뿐이었어요. 우리가 아무리 공부를 하고, 고민을 해도 그 시대의 사람들이 왜 그토록 공분하고, 싸우고, 순교했는지 100% 이해할 수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공감할 수는 있잖아요. 본 공연을 시작하면서부터, 보고만 있어도 자꾸 눈물이 나더라고요. 분하기도 하고요. 비록 작품은 비극으로 끝나지만, 완전한 비극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계속 두드리는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예전에 비하면 조금은 좋아졌잖아요. 물론 지금도 계속 두드리는 분이 계시죠. 두드려야 하는 세상이고요. 하지만 좋았다 안 좋았다를 반복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점점 좋아지는 것 같아요. 다만 '난 만족스러워'라고 하면 세상은 더 이상 변하지 않겠죠.

김옥균의 대사가 말하는 것도 그런 의미라 생각해요. 너가 두드리든 내가 두드리든 그건 상관 없다고, 다만 우리는 계속 두드려야 한다고…. 계속 두드리다보면 언젠가 그 세상에 갈 수 있지 않을까했던 거죠. 나는 더 이상 못하니까 너라도 두드려달라는 그 김옥균의 마지막 부탁이, 우리가 실패했다고 해서 그게 끝은 아니라는 의미였다고 믿어요. 저도 어떤 부분에서는 혁명가 같은 타입이에요. 또 어떤 부분에서는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웃음) '피와 살점이 조선 팔도에 도라지 뿌리처럼 스며들어 아름답게 피어날 것'을 꿈꿨고, 그 꿈이 이어지니까 비극이어도 만족해요."

21세기 한국, 비극의 시대

 뮤지컬 배우 강필석이 13일 오후 서울 압구정동의 한 공연장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뮤지컬 배우 강필석이 13일 오후 서울 압구정동의 한 공연장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직 피어나지 않은 도라지들의 꿈. 극 중 김옥균이 홍종우에게 전해준 불씨는 근근히 이어져 여기까지 왔다. 역사의 고비마다 그 불꽃이 폭발했던 것처럼, 이 극을 보고 가는 우리도 가슴에 작은 온기 하나씩 안고 갈 수 있지 않을까. ⓒ 이정민


모든 문화 콘텐츠는 그 콘텐츠가 피어난 시·공간적 배경과 얽혀 있다. 똑같은 작품이어도 몇 년도에 어느 나라의 무대에 올라오느냐에 따라 그 작품이 갖는 의미는 달라질 것이다. 2016년 대한민국에서, 창작 뮤지컬 <곤, 투모로우>가 올라온 것도 어떤 식으로든 '맥락'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궁금했다. 김옥균을 연기한 배우 강필석은, 2016년 지금의 이 땅에 도라지가 아름답게 피어났다고 믿는지.

"사실,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저희가 계속 얘기를 해줘야죠. 대극장에 오신 1000명의 관객 분 중에서 5명이나마 그런 걸 느끼고 가주시면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언젠가 모두가 완전히 행복한 세상이 온다면, 그 시대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어, 옛날에는 저랬나?'하는 정도로 끝나겠죠.

하지만 저는 100년이 지난 후에도 이 극을 보시는 분들이 느끼는 건 비슷할 것 같아요. 지금도 사실 10년 전, 20년 전에 비하면 많은 부분에서 살기 좋아졌지만, 아직도 우리가 더 좋은 나라로 가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할 부분들이 있잖아요. 인간의 본능이 그런 거 아닌가요? <맨 오브 라만차>의 돈키호테 이야기를 지금 봐도 눈물이 나는 것처럼요. (웃음)"

그토록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도 청년들은 꿈을 꿨다. 세상을 뒤엎자고, 운명을 바꾸자고. 갈 수 없는 나라에 가려고 노력했고, 오지 않을 내일을 붙잡으려 발버둥 쳤다. 청년 김옥균의 꿈은 꺾였고, 나이를 먹었다. 청년 홍종우의 꿈도 꺾이고, 산화했다. 우리의 오늘도 혼란스럽고, 청년 역시 흔들리고 있다.

"갑신정변 이후의 김옥균은 더 이상 청년이 아니었죠. 그래도 말씀하신 것처럼, 이 작품은 끊임없이 청년에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의심하라고. 그리고 잘못되어 있다면, 이야기를 해야죠. 목소리를 내야죠. 잘못되고 있는 건가 의심하기까지만 어려운 것 같아요. 일단 알기만 하면, 자연스레 목소리를 내게 되어요. 지금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너무 깊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좋지 않을까요. (웃음)"

이미 가버린(Gone) 내일(Tomorrow). 그렇다고 해서 그 내일이 영영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엘리트 청년들만의 혁명은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꿈 자체가 그릇된 것은 아니다. 그 기반이 마련되지 않고서,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아주 조금의 변화를 위해서 수없이 두드리고 계란을 던졌던 게 무의미한 일로 머무르지도 않는다. 우리는 오늘도, 두드리고 있다. 시대를 관통하는 그 두드림을 관객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은 오는 11월 6일까지이다.

피어나지는 못했지만, 이 땅 곳곳에는 그때부터 김옥균과 청년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심어왔던 도라지들이 있다. 그 도라지들은 아직도 움틀 날을 기다리고 있다. 도라지들이 만개하는 날, 우리의 꿈도 하얗게 피어나리라.

"여덟 조각 찢긴 내 꿈과 사랑, 날 찾아오리 이곳에, 저 바다에 날 데려가 다오. 바닷가 어디 그곳에. 푸르른 하늘 푸르른 물결 속에서 난, 내 뼈와 내 핏물 흘리리라. 흘려서 비 되어 살아가리. 이곳에서. 난 다시, 다시." - 뮤지컬 <곤, 투모로우> 2막. '저 바다에 날' 중에서

 뮤지컬 배우 강필석이 13일 오후 서울 압구정동의 한 공연장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뮤지컬 <곤, 투모로우>는 창작 초연 작품이다. 만듦새에서 다소 아쉬운 부분이 많지만, 어쨌든 배우 강필석이 연기하는 김옥균이 꽤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캐릭터의 호소력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그는, 분명 좋은 배우이다. ⓒ 이정민



곤투모로우 곤투 강필석 김옥균 요정옥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