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영화 <혈의 누>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탐정은 진리의 수호자로 그려지곤 한다. 어둠 속에 숨겨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 살인을 막아서 사람들의 생명을 구한다. 그들의 활약 덕분에 사회는 안정을 되찾고, 나쁜 범죄자는 처벌을 당하게 된다. 진실을 조사하는 이들은 구원자로 등장하기도 하며, 그의 활약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하지만 탐정 역시 자신의 욕망과 이중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진실을 아는 사람이 자기뿐이라면, 자신의 통제 하에 들어온 진실을 어떻게 쓸 지는 자신만이 정하게 된다.


2005년에 개봉한 영화 <혈의 누>는 진실과 이중성에 관한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은 진실을 찾고 사람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조사관으로, 추리소설의 탐정과 같은 역할을 한다. 하지만 주인공이 진실에 다가갈수록 그와 가까워지는 것은 사건의 해결이 아닌 자신의 이중성이다.

조선 후기, 양반 관료의 아들 원규(차승원)는 제지업으로 부흥한 동화도에 가게 된다. 나라에 종이를 진상하는 동화도에 사고가 발생하자 사건 조사를 위해 파견된 것이다. 동화도는 과거 강객주라는 이가 사람들을 도와 부흥시킨 섬이었다. 조정에 바칠 종이가 불에 탄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도착했지만 원규는 곧 섬 사람들 간의 살인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원규는 진상을 밝히기 위해 섬 사람들을 만나 살인 사건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섬 사람들은 불안을 내비치고 살인이 과거에 살해당한 강객주의 저주가 아닌가 두려워한다.

마을의 권력자 제지소 주인의 아들 인권(박용우)은 제지소의 기강을 잡기 위해 강객주의 저주를 두려워해 제지소에 들어가지 않으려하는 이들을 두들겨 패도록 명령한다. 강객주는 앞서 동화도의 유지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데 인색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또한 시대를 앞선 평등주의적인 사상을 가지고 사람을 무시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강객주 일가는 섬 사람들에 의해 천주쟁이로 고발당한다. 마을 사람들로 구성된 발고자들에 의하여 강객주 일가는 온 가족이 형벌을 받아 죽음을 당했다. 강객주 일가가 당한 형벌은 몸을 찢거나 얼굴에 물묻은 종이를 묻혀 숨을 막아 죽이는 것 등으로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원규는 사건의 진실에 다가서려 하지만,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기도 전에 계속해서 발고자들이 살해당한다. 발고자들은 강객주 일가가 당한 처형 방법대로 끔찍한 죽음을 맞는다. 원규는 이전에 강객주 사건을 조사한 토포사에 대해 알아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건을 조사한 토포사는 천주쟁이를 조사하는 절차를 지키지 않고 사건을 조사한 바 있었다. 또한 강객주가 정말 천주쟁이였는지 의심되는 증거도 발견된다.

그러다 원규는 강객주의 하인이었던 두호가 가진 강객주의 그림 뒷면에 부적이 붙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강객주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 그림 뒤에 부적을 붙인 것이다. 두호는 신분이 미천한 자신을 따뜻하게 돌봐준 강객주가 사실 자신을 천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걸 알고 밀고한 마지막 발고자였다.


모든 인간은 이중적이다

두호를 찾으러 간 원규는 살인사건의 범인인 인권을 마주하게 된다. 인권은 강객주의 딸 소연을 사랑하여 소연을 빼돌려 살려냈으나 이후 소연이 발고자들에게 살해되자, 복수하기 위해 발고자들을 잔인한 벌로 죽인 것이었다. 그리고 원규는 과거 강객주 사건을 규정대로 처리하지 않고 그들을 참혹하게 죽인 토포사가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원규는 인권을 죽이고 두호를 살리는데 성공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마지막 발고자를 죽여서 강객주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 달려들어 두호를 죽인다. 마을에는 피같은 비가 내리고 원규는 사건의 진실을 알면서도 진상을 덮으면서 섬을 떠나버린다.

영화는 잔혹한 장면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섬 사람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행동 역시 잔인하기 짝이 없다. 끝까지 죽음을 피하려했던 두호를 습격하는 마을 사람들의 폭력은 날이 서있다. 이외에도 잔인한 장면이 많아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은 폭력의 잔혹함뿐이 아니다. 영화 속에 깔려 있는 중요한 주제는 바로 이중성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중적인 인물이며, 자신이 말하는 명분과 해야 할 바와 상관없는 자신의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에 우선하여 살인조차 마다하지 않는다.

강객주는 시대를 앞서간 평등주의적인 인물이지만, 두호에게는 차별적인 면모를 보이며 그가 이를 갈게 만든다. 두호는 강객주를 모시는 입장이지만 마음 속 깊이 강객주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그에게 보복한다. 마을 사람들은 강객주에게 저리로 대출을 받아 삶을 일궈나갈 수 있었지만, 그가 죽음에 처하게 될 때에는 자기도 피해를 입을까봐, 혹은 채권자가 죽으니 빚을 안 갚아도 되어 좋은 일이라 여기고 넘겨버린다.

영화의 중심인물인 원규 역시 이중적이다. 그는 살인 사건의 조사를 위해서 위험한 상황조차 마다하지 않았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몸을 아끼지 않는 인물이다. 마을 최고 권력자인 김치성 영감의 조사를 주장하거나, 토포사에 대해 알아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직한 모습도 보인다. 그는 섬의 권력자에 맞서서라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원규는 과거의 진실이 자신의 아버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강객주 딸의 유품을 바다에 버린다. 탐정처럼 진실을 찾던 주인공조차도 인간의 이중성 앞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마을을 떠나는 원규와 버려지는 진실을 보여준다. 치밀하고 논리적인 추리를 통해 맞이한 진실은 현실의 이중성과 욕망 앞에서 쓸모가 없었다. 억울한 죽음과 피같은 비를 뒤로 하고, 무력해져가는 진실을 그린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