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걷기왕>의 한 장면.

영화 <걷기왕>의 한 장면. ⓒ (주)인디스토리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수부룩이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까투리 메추래기 새끼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
폭으은히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낯이 붉은 처녀 아이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미당 서정주의 시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의 서두다. 이 시를 접할 때 마다 "괜찬타", 그러니까 괜찮아라는 의미와 이 단어의 발성이 주는 온기를 곱씹게 된다. 꼭 크나큰 절망과 시련에 빠진 이에 대한 위로일 필요는 없다. 때로는 지쳐 쓰러지고, 때때로 목표 없이 흔들릴지라도 누군가에게 괜찮다며 도닥임을 받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지난 19일 전야 개봉한 영화 <걷기왕>이 꼭 그런 영화다. "조금은 느리고 가끔은 미끄러지기도 하는 지금 너의 모습도 충분히 괜찮다 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다"라는 연출자 백승화 감독의 연출의도처럼, <걷기왕>은 "아프니까 청춘이다" 따위의 허울뿐인 담론을 설파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저 "힘들면 언제든 걸어도 좋아"라는, '괜찮타'라는 응원과 위로면 그만이다. 살아낸 시간보다 살아갈 시간이 더 길고 긴 '청춘'들에게는 그저 담백하지만 진심어린 '관심'과 '동행'만이 필요할 뿐이라고, <걷기왕>은 속삭인다.

머리론 익히 알지만 한국사회에서 특히 실천이 어려운 이 난제를 영화는 주인공 만복(심은경 분)과 그 주변인물의 변화상을 통해 잔잔하게 읊조린다. 아니, 만복이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만들고 기어코 응원을 하게 만든다. 거기에 <걷기왕>이 지닌 힘이 자리한다. 흔한 청춘영화나 성장영화로만 치부할 수 없는 독특한 온기 말이다.

'노오력'? 너는 뛰어라, 나는 걷는다

 영화 <걷기왕>의 포스터.

영화 <걷기왕>의 포스터. ⓒ (주)인디스토리


하고 싶은 일? 없다. 공부? 재미없다, 아니 못한다. 그런데 자꾸, 주위 어른들은 '노오력'을 강조하고, '열정'을 요구하며, '정신력'이 부족하다 힐난한다. 심지어 공부 좀 하는 짝궁은 '바보냄새'가 난다고 골려댄다. 이런 고등학생 만복이야말로 너 같고, 나 같은 세상의 '흔한' 학생이다. 그래도 왕복 4시간이나 걸리는 학교까지 통학하는 근성의 소유자기도 하다. 4살 때부터 생긴 선천적 멀미증후군으로 그 어떤 교통수단도 탈 수 없는 신세여서 생긴 '능력'이다.

그런 만복에게 어느 날 '경보'가 찾아왔다. 마치 학생들에게 꿈을 찾아 주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은 담임선생(김새벽 분)의 강권이 시작이었다. 경보란 종목의 존재조차 몰랐던 만복. 처음엔 그저 '나에게도 전념할 일이 생겼다'가 전부였다. 잘나가던 마라톤 유망주였으나 부상 때문에 경보로 전환한 에이스 선배 수지(박주희 분)의 구박과 무시도 그래서 참을 만 했다. 하지만 멀미증후군으로 인해 좌절을 맛본 만복에게 어느새 경보는 노력하고 싶은 그 무엇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두 다리를 땅에 단단히 딛고, 무조건 뛰어서는 안 되는 경보. <걷기왕>의 주요 소재는 그 존재만으로 꽤나 강력한 은유로 다가온다. 전력질주를 할 필요는 없지만 분명 자신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면서도 속도를 높이고 순위경쟁을 벌여야 하는 경보는 분명 만복이와 같은 평범한 필부필부들이 경주해야 할 인생의 레이스와 꽤나 닮아 있다. 여기에 만보기, 아니 만복이의 유일한 특기인 걷는 행위는 종종 인생이란 노정과 동일시된다.

이러한 전제로부터 출발하는 <걷기왕>은 이 만복이 경주와 조우하고 또 전국체전에 출전하기까지의 여정을 허허실실 완주한다. 딱히 재기발랄을 강조할 생각도 없다. 그저 엉뚱한 듯 친근한 배우 안재홍의 목소리가 제법 잘 어울리는 만복이네 소 소순이의 친절한 내레이션을 따라 만복이의 일상을 따라잡기만 하면 된다. 근데 역시나 엉뚱한 듯 친근한 만복이의 성장을 바라보는 재미가 꽤나 쏠쏠하다.

세상의 만복이들아, 꿈이 없어도, 적당히 해도 괜찮아

 영화 <걷기왕>의 한 장면.

영화 <걷기왕>의 한 장면. ⓒ (주)인디스토리


누군가는 심심하지 않느냐고 투덜댈 법도 하다. 그러나 <걷기왕>의 담백함은 일본영화 특유의  심심한 정서와는 또 거리가 멀다. 대신 한국 대중영화 특유의 과잉의 정서나 독한 캐릭터들과는 분명 결별을 선언한다. 그 빈자리를, <걷기왕>은 만복이를 비롯한 주변인물들에 대한 소소한 묘사와 애정들로 채워 넣는다. 갈등도 물론 존재한다.

전국체전을 앞둔 만복이의 복잡한 내면이 기기묘묘한 악몽으로 드러날 때, 경보에 매진하는 만복의 노력을 무시하는 짝궁 지현(윤지원 분)에게 만복이 일침을 가할 때, 아직은 한국사회가 강요하는 그 가치들에 자신을 꿰맞춘 수지와 만복이 반목할 때, 영화는 딱히 너와 나를 가르지 않으면서도 각 캐릭터의 마음을 관객에게까지 공명시키는 기지를 발휘한다.

그건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그 어떤 캐릭터도 놓치지 않겠다는 감독의 의지와 응원에서 출발했을 공산이 크다. 이러한 의도는 꽤나 전형적인 스포츠성장 영화의 외피인 듯싶지만 분명 전형적인 전개에서 탈피하려는 시도와도 맞닿아 있다.

그래서 더더욱 만복이의 선택을 강조하는 전국체전의 피날레는 <걷기왕>의 "꿈이 없어도, 적당히 해도 괜찮다"는 메시지와 정확히 일치한다. 더불어 소순이의 내레이션이나 만복이의 짝사랑 에피소드처럼, 과하지 않으면서도 소소한 영화적 장치나 주변서사들로 웃음을 자아내는 방식도 사람과 사람을 도닥이는 정서로 가득 찬 <걷기왕>의 주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개성이 반짝반짝한 이 청춘영화, 심은경이라서 고맙다 

 21일 오전 서울 압구정CGV에서 열린 영화 <걷기왕> 제작보고회에서 배우 이재진, 심은경, 박주희, 김새벽, 허정도가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21일 오전 서울 압구정CGV에서 열린 영화 <걷기왕> 제작보고회에서 배우 이재진, 심은경, 박주희, 김새벽, 허정도가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 이정민


물론 이 중심엔 젊지만 묵직한 심은경이란 배우의 존재감이 자리한다. <써니>의 전학생 나미와도 다르고, <수상한 그녀>의 오두리와도 또 다르다. '우리의'란 표현을 이름 앞에 꼭 넣어야 할 것 같은 만복이 캐릭터는 과유불급일 수밖에 없는 캐릭터였기에 완급조절이 필수였을 터. 심은경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상상이 가지 않을 만큼, 심은경은 꽤나 까다로운 캐릭터를 능수능란하게 소화해냈다.

여기에 박주희, 김새벽, 윤지원 등 여타 배우들의 앙상블도 도드라진다. 그건 캐릭터 자체에 대한 감독의 애정과 배분이 있어야 가능한 문제였겠지만, 주로 독립영화에서 활동했거나 신예에 가까운 배우들이 안정적인 연기도 큰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 록다큐멘터리 연작 <반드시 크게 들을 거>를 연출했던 만큼, 백승화 감독의 취향이 크게 반영됐으리라 짐작하기에 충분한 강민국 음악감독의 영화음악은 올해의 영화음악 후보에 올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특히나 한국영화에서 보컬 부분을 (극도로 불안정한 연주의)리코더로 연주한 <타이타닉> 주제곡 'My heart will go on'을 들을 날이 올 줄이야.

<걷기왕>은 척박한 한국 청춘영화 장르에서 그 개성을 인정받아 마땅한 작품으로 등재될 것이다. 꽤나 패기나 열정, 노력과 간절함의 무위에 대해 논하는 주제는 물론, "공무원되고 '칼퇴근'해서 맥주나 마시겠다"는 이 시대 학생들의 꿈을 삽입하는 현실성과 판타지에 가까운 묘사를 적절히 배합할 줄 아는 아기자기한 연출력을 겸비한 작품이다. 무엇보다 극장을 나서며 "괜찮아, 다 잘 될거야"라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는 한국영화는, 흔하지 않은 게 현실 아닌가. 

걷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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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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