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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교육에 직접 뛰어들게 된 계기는 아이들이 취업하면 늘 '나가서 말 잘 듣고 잘 참으면서 잘해야 된다, 그래야 후배들도 취직된다고만 하는 학교가 속상했기 때문'이라고
"아, 시급은 7000원으로 좀 해줘!"
"안 돼, 최저시급(2016년 기준 6030원)이야."
"아주 악덕이네, 악덕이야."
"식사시간은 30분? 그 정도면 괜찮나?"

지난 18일 오전 전북 익산시 황등면의 진경여자고등학교 멀티미디어실. 두 명씩 노동자와 사장으로 역할을 나눠, 5분 동안 모의 근로계약서를 작성해보라는 장세희(48) 청소년 노동인권교육 강사의 말에 교실은 곧 시끌벅적해졌다.

시급부터 주말근무, 휴일이나 상여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근로조건을 두고 격렬한 토론과 협상이 이어졌다. 학생들의 '아직은 어설픈' 근로계약서 작성이 끝나자, 장 강사가 본격적으로 교육을 시작했다.

청소년 노동인권교육이 진행되고 있는 교실
 청소년 노동인권교육이 진행되고 있는 교실
ⓒ 모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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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노동자와 사장 둘 다 만족스럽게 계약한 조?"라는 질문에, 방금 전까지 노동자와 사장이었던 학생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웃었지만 아무도 손을 들지는 않았다.

아플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이 갑자기 길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반드시 알아야 할 근로기준법 및 근로계약서 사항에 대한 장 강사의 설명이 이어지자 학생들은 '아 맞다', '몰랐어'를 연발하며 아쉬워했다.

3학년생을 대상으로 한 이번 노동인권교육은 장 강사와 백미녀(41), 김은정(38) 강사의 진행으로 세 교실에서 동시에 이뤄졌다. 김 강사가 담당한 교실에서는 최저시급 미달 등 근로기준법을 지키지 않았던 피해사례가 등장하자 당장 "얘도 그런 적 있었어요", "나도 그랬는데"와 같은 학생들의 생생한 증언이 바로 튀어나왔다.

주휴수당처럼 그동안 정확히 몰랐던 노동법상 용어의 개념이나 '알바 십계명' 등을 알려주는 내용이 화면과 칠판에 나타날 때마다 학생들의 시선이 쏠렸다. 수업 말미에 근로기준법을 설명해주던 김 강사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니까 사람은 기계가 아닌 거예요."

칠판에 적혀 있는 근로기준법 제 4조의 내용
 칠판에 적혀 있는 근로기준법 제 4조의 내용
ⓒ 모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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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하면 당연히 좋죠, 이런 수업"

50분간 쉴 틈 없이 진행된 수업은 짧았다. 학생들은 대부분 이 같은 노동인권교육이 앞으로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주말마다 치킨집에서 일하고 있다는 김정윤(19) 양은 "당장 지난해 여기저기서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만 생각해봐도 시급이 (최저시급에 한참 못 미치는) 4500원이었던 곳이 있었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전명아(19) 양도 "시내 코인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친구는 시급 3000원으로 일하면서 참다 못해 신고하려다 사장님이 무서워서 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며 이야기를 보탰다.

이들은 "연장수당이나 최저임금을 주지 않으면 이제 신고할 것"이라며 "주변의 다른 친구들도 이런 (노동인권교육) 수업을 많이 받았으면 좋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주휴수당, 통상임금… 아는 학생 한 명도 못 봐"

수업을 진행한 강사들에게 청소년 노동인권교육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물었다. 이들은 아쉬운 점으로 교육을 충실히 진행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꼽았다.

올해부터 '전북 학생인권조례'에 따라 도내 133개 고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진행되고 있는 노동인권교육은 학교당 예산 14만 원에, 연 2회의 1시간짜리 수업이 전부다. 물론 이마저 보장되지 않는 지역도 아직 많다.

장 강사는 "대부분 아이들은 근로계약서에 뭘 적어야 되는지조차 모르고, 조금이라도 알고 쓰는 아이는 한 교실에 많아봐야 서너 명"이라며 "일단 수업 차시를 더 많이 보장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근로계약서를 직접 써보고, 협상도 해볼 수 있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의미다.

노동인권교육에서 배운 내용을 토대로 작성한 학생들의 표준근로계약서. 장세희 강사는 "이를 깊이 가르치기에는 수업시간이 많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노동인권교육에서 배운 내용을 토대로 작성한 학생들의 표준근로계약서. 장세희 강사는 "이를 깊이 가르치기에는 수업시간이 많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 모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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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시간이 넉넉하다면 노동인권교육을 어떻게 진행하겠느냐는 질문에 장 강사가 기다렸다는 듯 구체적인 계획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근로계약서는 천천히 두 시간 정도 가르치고 싶어요, 같이 고쳐보고 서로 발표도 해가면서. 그 다음 한 시간은 노동자에 대해서. 노동의 가치나 귀함, 혹은 노조와 파업을 이해하고 지지해줄 수 있는 이야기도 해주고 싶고. 남은 한 시간은 최저임금, 생활임금으로 밥상 차려보기. 그렇게 나도 얼마든지 정치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또 관심을 가지면 바꿀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을 주고 싶죠."

"예산도 의지도 없는 중앙… 제도나 법만 갖춰진다고 다 되는 건 아냐"

한편 교육부 주도의 체계적인 전문 인력 양성이 전혀 없다는 점 또한 문제로 지적됐다. 노동인권교육에 대한 교육계의 인식이 아직은 부족하다는 얘기다. 세 명의 강사는 교사가 아니라 시민단체인 참교육을 위한 학부모회(이하 참학)에 속해 있는 상근활동가들이다.

총 25명인 전북 청소년 노동인권교육 강사단의 다른 구성원들도 대부분 평화인권연대와 평등교육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등 시민단체에 소속된 이들이다.

현재 노동인권교육 강사 양성은 몇몇 인권단체나 비정규직센터 등에서만 간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 만큼 교육 과정도 아직은 충분히 체계화·일원화되지 못한 상황이다.

참학 전북지부장을 맡고 있기도 한 장 강사는 "참학의 경우는 지부 내 (노동인권교육을) 할 수 있는 사람끼리 알아서 정보 주고받고, 매번 서로의 수업에 참관해 평가도 해주면서 지금까지 성장해왔다"고 말했다.

물론 아쉬움만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그간 전무하다시피 했던 청소년 노동인권교육이 전북과 광주 등 진보교육감이 있는 지역에서부터 시작해, 이들 활동가들의 기여로 점차 틀을 잡아나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노동인권교육이)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는데 그래도 일단 됐으니 너무 좋다"는 장 강사는 "여기까지 온 것은 전북 시민의 힘이고 이런 교육감을 가진 것도 우리의 힘"이라고 말했다.

이어 "고마운 게 예전(교내 강의가 마련되기 전)에는 교육장도 따로 빌려야 했고 노트북이나 스피커, 빔 프로젝터까지 다 들고 다녔지만 요즘은 그나마 USB 하나 들고 다닌다"며 웃었다.

"헌법은 가르치는데 노동법은 왜 안 가르치나"  

이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미래는 강사단이 한두 번씩 학교에 찾아가는 현재 수준을 벗어나, 노동인권교육이 정규 교육과정으로 편성되는 것이었다. 사회든 윤리든 기존 교과 내에서,  제대로 양성된 교원들에 의해 충분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다.

법 조항처럼 딱딱한 설명만 늘어놓거나, DVD 보여주기 등으로 '시간 때우기'만 하는 것보다는 학생이 직접 체험해볼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는 제언도 이어졌다.

백 강사는 "수업을 진행하면서 가장 활발한 시간은 모의 근로계약서를 직접 써보라고 할 때"라며 이러한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최근의 철도파업처럼 자주 벌어지는 상황을 설정해주고, 노사 측 역할을 나눠 실제 발표된 성명서를 주고 직접 교섭해보도록 해도 좋겠다는 등의 이야기도 나왔다.

참학의 세 활동가들이 이러한 교육에 직접 뛰어들게 된 계기는 아이들이 취업하면 늘 '나가서 말 잘 듣고 잘 참으면서 잘해야 된다, 그래야 후배들도 취직된다고만 하는 학교가 속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노동현장은 안정되어 있지도 않고 아직도 위험한데, 저렇게 가르치는 것보다는 우리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들은 교실에서 생소했던 노동인권교육을 전파하는 강사이자 활동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러한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했을 누군가의 엄마이기도 했다.

바른 교육만을 전해주고 싶은 그 엄마로서의 당연한 마음이 예산과 인력, 홍보 등이 턱없이 모자란 환경에서도 노동인권교육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인 셈이다. 이야기가 마무리될 즈음, 장 강사가 불쑥 꺼낸 말에 그러한 심정이 그대로 묻어났다.

"공부라는 게 삶하고 연결이 돼야 되잖아요. 12년 공교육을 받고도 근로계약서 한 장 못쓰는, 그게 너무 생소한 아이들을 기른다는 게, 기가 차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니까, 계속 당하고 사니까. 뭐 어떻게, 좋은 세상 열심히 만들어보겠다기보다는, 그냥 소박한 거예요. '엄마 심정'이지."


태그:#청소년, #노동인권교육, #근로기준법, #노동법, #최저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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