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의 전신인 MBC <여성살롱>의 첫 진행자 임국희 디제이를 다룬 경향신문 1977년 4월 2일 기사. 여성 청취자를 대상으로 사연을 중심으로 진행하는 방송이라는 점에서 지금의 <여성시대> 포맷과 크게 다르지 않다. (출처: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여성시대>의 전신인 MBC <여성살롱>의 첫 진행자 임국희 디제이를 다룬 경향신문 1977년 4월 2일 기사. 여성 청취자를 대상으로 사연을 중심으로 진행하는 방송이라는 점에서 지금의 <여성시대> 포맷과 크게 다르지 않다. (출처: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 경향신문/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안녕하세요, 임국희예요' 비좁은 방송실 안에 온에어(방송중) 전등이 반짝 켜지자 디스크 자키 임국희씨의 정겨운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흐른다. MBC라디오가 매일 낮 11시 10분부터 50분간 방송하는 와이드 프로 <MBC 여성살롱> 시간이 막 시작된 것이다.

'주부, 미혼 여성들을 위한 생활정보 프로예요' 지난 75년 4월 첫 방송때부터 이 프로를 맡은 임국희씨가 막간을 틈타 설명해준다. '방송시간의 80%가 청취자들께서 보내주신 편지내용을 소개하는 데 쓰이죠' 하루 평균 3백여 통의 편지가 전국에서, 때로는 아랍에 가있는 간호원에게서 날아든다. 이 편지들 중에서 같은 사연들을 고르고 다시 계절과 시사에 맞는 것들을 골라 하루에 6~7통씩 소개한다. 혼자서는 주체할 길이 없어 얼마 전에 가위로 편지봉투를 개봉하는 일만 하는 아가씨를 따로 뒀다. 그래도 쏟아져 들어오는 편지를 다 읽어내지 못해 집에까지 갖고 가 읽기 일쑤다." - <경향신문> "<여성살롱>엔 보람도 많아요"(1977년 4월 2일) 중에서

지금의 <여성시대>는 1975년 4월 <여성살롱>으로 처음 시작했다. (1988년 <여성시대>로 이름만 바뀌었다) <여성살롱>으로 첫 문을 열었을 때부터 여성 청취자를 대상으로 사연을 받아 진행했다. <여성시대>는 또한 남녀가 함께 진행하는 당대 라디오 프로그램들과 비교했을 때 여성 진행자의 비중이 높은 몇 안 되는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이런 기조는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진다.

<여성시대>가 본 2016년 대한민국

MBC 라디오 프로그램 <여성시대>는 1997년 한국 외환위기를 예측했다. 청취자들의 사연을 통해서다. 당시 <여성시대> 연출을 맡은 정찬형 피디는 사회평론 길(1998)을 통해 "연출을 맡은 것이 작년(1997) 9월이었는데 이미 그때 어음 때문에 박살나고 중소기업 부도나고 자영업자들 망하는 이야기가 엄청나게 올라왔다"며 "IMF가 닥치기 전인데 그때 이미 청취자들은 '나라 망하는 게 느껴진다'고 얘기했다"고 언급한다.

1993년부터 <여성시대> 구성작가로 일을 시작해 올해로 22년이 된 박금선 작가 역시 당시를 회고했다.

"공장이 문을 닫는다, 살기가 너무 어렵다…. 이미 외환위기 1년 전부터 그런 편지가 많이 와 '너무 이상하다' 싶었다. 그리고 (1997년 12월) 구제금융 얻어온다는 발표가 나니 확 다가오더라. 그 전에는 그저 '이상하다, 살기가 참 어려운가봐'라고 했지."

 MBC 표준FM의 <여성시대 양희은, 서경석입니다>가 7일 오전 서울 상암동 MBC사옥에서 생방송되고있다.

MBC 표준FM의 <여성시대 양희은, 서경석입니다>가 7일 오전 서울 상암동 MBC사옥에서 생방송되고있다. ⓒ 이정민


전국 각지에서 <여성시대>를 즐겨 듣는 청취자들의 사연이 속속 오면 이들은 한자리에서 사연을 모아 읽는다.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의 사연, 차마 누구에게도 입을 열지 못해 끝끝내 익명으로 도착한 이야기. 숨죽여 사연을 보내고 또 숨 죽여서 들을 수밖에 없는 사연들. 그리고 "징건하게 얹히고 답답한 게 켜켜이 쌓여 돌아버릴 것 같은"(양희은) 내밀한 일상들.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매체 중 하나인 편지는 미시사 연구에 중요한 소재로 쓰인다. 그렇다면 오늘 아침 만들어진 여성시대 속 편지들 역시 훗날의 역사가 되지 않을까. 사람들의 삶 속에 역사가 흐른다.

"얼마 전 경주에 지진이 났지 않나. 그러면 지진이 난 지역에서 온 사연을 꼽는다. 아니면 통영이나 거제 지역의 조선소 노동자들의 이야기. 홍수가 난 이야기. 뉴스에서 듣는 소식과는 그 느낌이 다르다. 뉴스는 객관적이고 상대적으로 밖에서 보는 느낌이 강하다면 이건 그 안에서 일을 겪고 있는 당사자의 이야기다." (박정욱 피디)

"시대의 흐름이 그대로 드러난다. IMF 이후에는 외국인 며느리 이야기도 많이 왔다. '우리 아들이 장가를 못 가서 만나보러 갔다'는 편지가 오면서 어느 순간 다문화가 왔고 매 맞는 여성들 이야기도 왔다. 그런 사연이 오면 피디들이 의식을 갖고 방송하더라. 사연이 과거와 비교해서 조금 줄었는데 폭력이 줄어든 건 아니겠지만 하소연을 할 수 있는 곳이 여기만이 아니라 다른 곳도 많이 생겼다는 뜻이 아닐까." (박금선 작가)

박금선 작가는 "<여성시대>가 시사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어떤 프로그램보다 시사적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또 그는 "뉴스를 보지 않는 사람들도 필요한 소식을 접할 수 있게 내용을 담는다"며 "단순히 아름다운 세상 이야기, 열심히 살자는 이야기만 쓰는 건 무책임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라디오 <여성시대>를 통해 본 2016년 대한민국의 풍경은 어떨까. 크고 작은 사연들을 통해 세대의 풍경을 본 <여성시대>의 박정욱 피디, 박금선 작가가 입을 열었다.

 MBC 표준FM의 <여성시대 양희은, 서경석입니다>의 박정욱 PD(왼쪽)와 제작진들이 7일 오전 서울 상암동 MBC사옥에서 생방송을 제작하고 있다.

MBC 표준FM의 <여성시대 양희은, 서경석입니다>의 박정욱 PD(왼쪽)와 제작진들이 7일 오전 서울 상암동 MBC사옥에서 생방송을 제작하고 있다. ⓒ 이정민


20대의 취업과 결혼

"대표적으로는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을 담은 사연이 많이 온다. 그리고 자녀들 취업·결혼 문제. 3~4년 전부터 심각하게 느껴질 정도로 많이 오더라. 왜 자녀들이 결혼을 미룰 수밖에 없고 생각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지가 편지 속에 잘 드러난다. 또 젊은 친구들 편지에는 '부모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라는 말로 끝나는 편지가 많더라.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어떤 식으로든 부모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으니 편지를 쓰는 것 같다. '저는 시험공부를 몇 년째 하고 있는 사람인데 부모님께서 뒷바라지를 해주신다, 너무 죄송하고 몇 년만 기다려주세요 꼭 효도할게요' 같은. 취업 문제가 저절로 심각하게 느껴진다." (박금선 작가)

전후세대의 감소

"개인적으로 한국 현대사에 관심이 많은데 특히 북한이 고향인 분들, 전쟁을 겪은 분들이 쓴 개인적인 기록은 간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복사를 해놓았다.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6월이면 한국 전쟁과 관련된 편지가 많이 왔다. 이제 그런 것들이 사라지고 이산가족 편지도 사라졌다. 그렇게 손편지를 써주시는 분들 대부분이 꼭 편지 끝에 북한 평양에 있는 자기 집 약도라며 손으로 그림을 그려 보낸다. '그 곳이 눈에 선하고 훗날 통일이 돼 평양에 가서 자기 집을 찾을 거라고' 쓰신다. 그런 분들 편지가 점점 없어진다.

이제 그 분들의 자녀들이 편지를 쓴다. '옛날에 저희 아버지가 그런 말씀 많이 하셨어요. 그런데 돌아가셨어요. 술 드시고 명절 때 우시면서 고향 이야기 하시고 종이에 자기 집을 그리면서 '여기가 '우리집'이고 이 집이 개울에 다리를 건너 몇 번째 집이고'. 아버지가 부르시던 노래가 생각난다는 편지 올해도 한 두 통 본 것 같다. 그 전에는 자녀들을 통해서가 아닌 그 분들이 직접 편지를 보내셨지만." (박금선 작가)


 MBC 표준FM의 <여성시대 양희은, 서경석입니다>의 박정욱 PD(왼쪽)와 제작진들이 7일 오전 서울 상암동 MBC사옥에서 생방송을 제작하고 있다.

MBC 표준FM의 <여성시대 양희은, 서경석입니다>의 박정욱 PD(왼쪽)와 제작진들이 7일 오전 서울 상암동 MBC사옥에서 생방송을 제작하고 있다. ⓒ 이정민


요양원으로 간 부모들

"몇 년 전부터는 요양원이나 요양보호사에게도 온 편지가 눈에 띈다. 부모를 요양원으로 보내며 가족 간의 갈등이 많이 드러나고 그걸 보면서 '아 우리 세대가 정리를 해줘야겠구나' 싶더라. 그래서 요양원이나 요양 보호사에 대한 특집도 여러 번 했다. 이를 진행하며 '요양원이 버림 받은 사람들만 가는 건 아니다. 앞으로 기꺼이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이 든 부모를 요양원에 보내 죄송하다는 편지도 많이 온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강요받았던 '효(孝)'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바꿔가야 하고 그런 부담을 덜어줘야 다음 세대도 편하지 않을까. 부모님이 연로해서 치매가 생긴 것이 자녀가 죄송해야 할 일은 아니다. 그런 걸 보면 안타깝고 <여성시대>에서 물밑작업을 통해 조금씩 인식을 바꿔가야겠다는 합의도 한다.

그런데 그런 방송을 하면 항의 문자가 되게 많이 온다. 이런 '불효막심한 사람'이 어딨냐고. 그런 사람의 편지를 왜 방송하냐고. 그런 분들은 부모님이 편찮으시면 모든 걸 그만두고 집에서 봉양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 우리는 과도기에 있는 것 같다." (박금선 작가)

친구 같은 엄마?

"편지를 보면서 배운다. '나이 들면 이런 모습이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하고 젊었을 때는 '이런 엄마였으면 좋겠다'는 모델들을 편지에서 많이 본다. '집착하지 않는 엄마'가 되겠다고도 많이 생각했다. 교육에 열의는 있지만 집착하지 않는 엄마. 친구 같아야 한다는 이유로 너무 밀착되지 않아야 한다고. 모든 부모는 자녀와 친구가 되고 싶겠지. 조금 더 간섭하고 싶을 때 '저건 저 아이가 스스로 정리해야 할 문제니까 나는 빠져야겠다'는 걸 깨달을 수 있는 엄마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친구 같은 엄마들도 참 많다. 그러다 보니 너무 많은 것에 관여하고 욕심이 많아진다. 물론 보기 좋은데 가끔 부작용이 느껴지는 편지들이 있다. 그래서 20대 여성들을 보면서 안쓰러울 때가 많다. 예전에는 아들에게 많이들 기대했는데 이제는 딸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하는 거다. 친구도 돼주고 나이가 들었을 때 아들에게 기대하지 않는 보호자 역할을 딸에게 기대하기도 하고. 이 시대 딸들이 옛날의 아들보다 훨씬 더 어깨가 무겁다는 생각을 한다. 취업을 해서 성공한 자녀가 되고 또 아들 딸 구별 없이 자식을 낳고. 결혼을 해서도 밀접한 관계를 갖길 바라고 아플 때는 용돈도 드리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딸이 되기를 원한다. 아들에게는 그렇게 많은 걸 기대하지 않는데 딸에게 많은 걸 기대하기에 '나이가 들수록 힘들겠구나' 싶다." (박금선 작가)

세대를 넘나든 영원한 숙제 '인간관계'

"취준생이면 취준생끼리 공감을 한다. 애를 낳아서 키우는 사람들은 비슷한 사람들에게 공감하고. 20대 부부든 70대 부부든 가정에 불만이 있다면 서로 공감할 수 있다. 역시 집에 누가 아프다면 나이에 상관 없이 비슷한 걸 느낄 수 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친구들은 아마도 편의점에서 알바를 할 때 라디오를 틀어놨다가 설움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그와 비슷한 사연이 나오니 자신의 사연을 보내더라.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취업준비를 하는 학생들에게서 사연이 주로 오고 직장 생활을 하는 2030대 사이에서는 많이 오지 않는다. '사람 사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주자' 싶었다. 젊은 사람이라도 해도 각자 다 정서가 다르다. 소위 금수저나 은수저, 흙수저가 다르고 남성과 여성이 다를 거고, 지역에 따라 다를 것이다.

부모가 큰 병에 걸렸다는 사연이 오면 전혀 다른 연령층의 사람에게 '우리 가족도 그 병에 걸렸다'며 문자가 실시간으로 온다. 물론 똑같은 상황에 처해있지는 않더라도 마음이 더 간다. 시간이 지나면서, 삶을 겪으며 결국은 공감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박정욱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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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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