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물숨>의 포스터

영화 <물숨>의 포스터 ⓒ 영화사 숨비


"내 고향 제주에는 바다로 출근하는 여자들이 있다"는 나레이션으로 시작하는 <물숨>은 '해녀의 발원지'로 알려진 제주도의 동쪽 끝 우도를 배경으로 해녀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화를 찍는 기간만 장장 7년이 걸린 <물숨>은 갑작스레 암 진단을 받은 고희영 감독이 고향 제주도에 돌아가면서 태어난 프로젝트다. 해녀를 지켜보던 그녀는 이전엔 풍경화로 보았으나 그때는 자신의 감정을 담아서 보자 큰 힘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저 사람들은 어떻게 두려움 없이, 물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있겠지만, 거침없이 뛰어들 수 있을까?" 궁금했다고 한다.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고희영 감독에게도 해녀를 카메라에 담는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제주도는 해녀 집안이라고 하면 업신여기는 편견이 뿌리 깊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해녀들은 카메라에 강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물숨> 제작팀은 2년에 걸친 시간 동안 50여 명에 이르는 해녀들과 일상을 함께하며 마음을 열어주길 기다렸다. 폐쇄적이었던 우도의 해녀들은 제작팀의 진심에 닫혔던 문을 열어주었고, 이를 통해 <물숨>은 해녀 사회의 내부를 긴 호흡으로 포착할 수 있었다.

인간의 법도, 바다의 운명

<물숨>은 우도 해녀들의 1년간의 삶을 그린다. 사계절 속엔 해녀들의 삶이 만든 치열함이 새겨져 있다. 그 속엔 '인간'이 정한 법도와 '바다'가 정한 운명이 존재한다. 해녀들은 더 높은 수입을 올리기 위해 신경전을 벌이지만, 모두가 바다에 들어갈 준비가 끝나야만 비로소 움직일 수 있다. 먼저 들어가는 이는 없다. 이것은 해녀들이 정한 법도이다.

ⓒ 영화사 숨비


아무런 장비도 없이 들어가는 해녀들이 바다 안에 머무는 방법은 오로지 숨을 멈추는 것뿐이다. 숨의 길이는 태어날 때부터 하늘이 정한 운명이다. 숨에 따라 해녀는 상군, 중군, 하군의 계급으로 나뉘어 다른 깊이의 바다에서 활동하게 된다. 깊은 바다일수록 수확하는 해산물의 질은 높아진다.

자연은 각자에게 한계를 정했지만, 인간의 욕망은 종종 규칙을 잊고 망각의 길로 안내한다. 해녀들은 숨을 참아서 얻은 바다의 수확물로 가족을 먹이고 입힌다. 다른 이보다 빨리, 많이 가지고 싶은 욕심은 숨의 한계를 잊고 바다에 더 머물게 붙잡는다. 그 욕망을 다스리지 못한 때에 숨이 넘어서는 순간에 먹게 되는 '물숨'은 찾아온다. 살기 위해 들어갔던 바다가 무덤이 되기도 한다는 것은 해녀가 지닌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영화는 인간의 욕심 외에 바다의 파도, 상어의 공격, 배의 위협 등 해녀를 위협하는 여러 요소를 보여준다.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해녀의 장례식 장면은 바다에 순응했던 이의 마지막 여정이다. 반대로 딸에겐 해녀의 운명을 주지 않고 싶었던 어머니가 보이는 저항의 몸부림도 있다. <물숨>엔 해녀들이 토한 삶의 숨비소리(바다에서 멈추었던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수면으로 올라오며 내뱉는 숨소리)가 다양하게 들어있다.

<모래시계> 송지나 작가 <물숨> 원고에 참여해

<물숨>은 많은 이들이 보탠 힘으로 완성됐다.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등을 집필한 한국 최고의 작가 송지나는 다큐멘터리 원고 작업에 참여했다. 정성스레 쓴 그녀의 글엔 해녀들의 애환이 스며들어 있다. 그녀가 쓴 글은 배우 채시라의 목소리를 빌어 호소력을 더한다. 채시라는 "딸로, 엄마로, 여성으로 살아가는 해녀들의 모습에 감동했다."고 밝히며 흔쾌히 영화에 참여했다고 한다. 영상과 목소리에 정서를 입혀주는 역할은 음악이 맡았다. <물숨>의 음악 감독은 재일 한국인 2세 피아니스트이자 뉴에이지 작곡가로 유명한 양방언이 담당했다. 그가 작곡한 음악은 <물숨>의 영상과 어울려 깊은 울림을 전한다.

ⓒ 영화사 숨비


"그간 해녀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수없이 제작됐지만, 대부분 강인한 여성, 우리네 어머니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는데 나는 <물숨>을 통해 해녀들의 깊은 바닷속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는 고희영 감독의 바람은 수중과 지상촬영을 50:50의 비율로 촬영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물숨>의 빼어난 영상미는 황도철(지상), 김원국(수중) 이병주(지상과 수중) 감독이 잡았다. '문화재 항공 촬영'의 대가 김치연 교수는 하늘 위에서 해녀를 담았다. 이들이 작업한 <물숨>엔 해녀의 삶이 지닌 독특한 질감이 잘 살아있다.

이전엔 해녀를 그저 바다에서 노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물숨>에는 해녀 어머니를 바다에서 잃은 딸은 자신도 해녀이기에 심정을 이해한다고 고백하는 대목이 나온다. 어머니는 바다에 들어가지 못하는 시간을 견디지 못했을 거라고 말한다. 딸의 말을 듣는 순간, 바다의 의미, 해녀의 의미는 새롭게 다가왔다. 해녀는 삶의 파도를 헤치고 나아갔던 용감한 딸이자, 강인한 엄마이고, 현명한 아내이면서, 따뜻한 할머니였다. 바다는 그녀들을 품어준다.

<물숨>의 첫 장면은 바다로 시작한다. 마지막 장면은 바다를 나아가는 해녀의 모습으로 끝맺는다. 두 장면은 4계절의 시간을 통과하며 하나의 의미로 합쳐진다. 바다로 힘차게 나아가는 여성의 몸짓을 보며 "바다가 밥이고, 집이고...나는 다시 태어나도 또 해녀가 되고 싶어"라는 영화 포스터의 문구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말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물숨 고희영 송지나 양방언 채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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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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